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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광석 Sep 29. 2023

세 나신(裸身)

발가벗은 손자와 아들 그리고 할아버지

  내 나이 서른셋, 4월의 마지막 토요일 저녁 즈음이었다. 회사에서 돌아와 이제 막 두 돌이 지난 아들 손을 잡고 가벼운 옷차림으로 밖으로 나갔다. 아들도 오랜만의 아빠와의 외출이 좋은가 깡충깡충 뛰며 재잘거린다. 아내는 잘 알아들어도, 나는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아들과 처음으로 가는 목욕탕이라 나도 기분이 상기되었다. “나 아들하고 목욕탕 가요. 나 좀 봐주세요” 자랑하고 싶었다. 


  계산대 직원에게 아들이 이제 막 두 돌이 지났다 말하고, 나만 돈을 지불하고 탈의실로 갔다. 발가벗은 어른들이 많은 것을 보고 놀란 것일까? 갑자기 조용해지고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아빠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아들의 손을 잡고 탕으로 갔다. 토요일이라서 사람이 많았다. 가볍게 샤워를 한 다음, 아들을 가슴에 안고 탕 안으로 들어갔다. 39도 정도의 물도 아들에게는 뜨거울 것이다. 발이 물에 닿자 얼른 움츠린다. 따뜻한 물을 다리와 등에 조금씩 끼얹어 주었다. 조금 지나 적응이 된 것 같아 가슴이 잠기도록 물속으로 들어갔다.

 

  맨 살의 아들을 가슴에 안는 행위,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아직 불안한 아들은 가는 팔로 목을 안고, 두 발로는 허리를 감았다. 따뜻한 물속에서 연하고 부드러운 피부를 접하니 신비하고 경이로운 촉감으로 행복했다. 탕 안의 할아버지들이 ‘젊은이, 그 기분 나도 잘 아오’ 하듯 눈길을 주셨다. 


  맨몸의 아들을 안고 느끼는 기쁨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갓 태어나 처음으로 땅을 짚고 비틀비틀 일어서는 송아지를 핥아주는 어미 소. 오랜 산통 후에 낳은 첫아기를 품에 안은 젊은 엄마. 어미 소와 젊은 엄마가 느끼는 행복이 이런 것일까? 이제까지 느껴보지 못한 행복감이었다. 환희나 희열이라 표현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시스티나 성당의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가 머리에 떠올랐다. 성당 안의 수많은 나신들과 만났을 때의 문화적 충격은 지금도 가슴에 생생하다. 그중의 하나가 천지창조이다. 조용한 하늘에는, 옷을 입은 조물주와 옷을 벗은 아담의 검지손가락이 맛 닿으려 하고 있었다. 생명으로 창조하는 위대한 힘의 표현이었다. 천지창조를 두 검지 손가락으로 표현한 미켈란젤로에게 고개가 숙여졌다. 내 아들의 미래에도 하늘과 땅이 있고, 우주와의 무한한 교류가 있을 것이다. 바로 이 아이야말로 천지와 우주를 창조한 조물주의 창조물이며, 하늘과 땅이고 우주임이 틀림없다. 아름다운 행복을 선사하는 어린 아들이 곧 우주이다. 


  사십여 년이 지났다. 운동을 마치고 체육관에서 나오는데, 아들이 두 돌 지난 손자의 손을 잡고 들어온다. 목욕하러 왔단다. 손자가 반갑게 웃어준다. “그래, 먼저 들어가~! 할아버지 옷 벗고 바로 갈게~~!” 하고 서둘러 탕으로 갔다. 샤워를 끝내고 탕 안에 들어가 있으니 아들이 손자를 안고 탕으로 왔다. 손자는 공중목욕탕이 처음이었다.  

 

  내가 아들에게 했던 대로 아들도 손자에게 그대로 하고 있었다. 어쩜 그렇게 똑같을까 신기했다. 내 앞에서 아들은 자기 새끼를 안고 행복한 표정이었다. 보기 참 좋았다. 그런데 손자는 물이 뜨겁지 않아 그런지 바로 아빠 품에서 나와 탕 안을 돌아다닌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두 팔을 벌리니 할아버지의 늙은 가슴에 와서 쏙 안긴다.


  발가벗은 아들 앞에서 발가벗은 손자를 안고 있다. 촉감은 아들을 안았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어느 면에서는 더 귀엽고 더 행복했다. 어린 손자는 할아버지의 가슴과 목에 난 낟알만 한 사마귀가 신기한지 자꾸만 잡아 뜯는다. 너무나 사랑스러워 두 손으로 가슴에 꼭 안았다. 삼대가 발가벗고 하나의 탕 안에서 같은 숨을 쉬고 있다. 이러한 행복이 참 행복 아닐까? 원초적인 행복, 원시의 행복. 행복이란 거창한 것이 결코 아니다. 가슴속에서 솟아나는 사랑이 나를 행복하게 하고, 아들과 손자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다. 이 행복이 천지창조의 기쁨이 아닐까! 


아들 그리고 손자,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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