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와 별을 보며 나눈 이야기
중학교 2학년 때로 기억한다. 우리 가족은 전주시 인후동 서낭댕이 고개 가까이에 살았다. 마당이 있고 담장에는 구기자나무가 자랐다. 봄이면 보라색 예쁜 꽃이 피고, 가을이면 열매가 빨갛게 익었다. 할머니와 나는 새순을 따서 나물도 무쳐 먹고, 잘 익은 열매는 따서 말렸다가 차를 달여 마셨다. 넉넉하지는 않아도 모자라지도 않았던 소박한 살림살이를 할머니께서는 잘도 꾸려가고 계셨다. 뒤란에는 작지만 소담한 채소밭이 있었다. 할머니의 정갈한 손 끝이 지나간 장독대는 언제나 반짝거렸다. 여름철 저녁이면 모깃불을 피우고 칼국수를 끓여 먹으며 행복하게 웃곤 하였다. 밤이 되면 하늘에서는 별이 쏟아지고, 귀뚜라미와 여치들의 노랫소리가 아름답던 집이었다.
그날도 멍석을 깔고 밤늦게까지 할머니 무릎을 베고, 이러 저런 얘기를 도란도란 나누고 있었다. 내가 뜬금없이 “할머니, 할아버지가 만세 부르고 감옥 가셨을 때 고생 많았지?” 하고 물으니, 할머니는 “글매, 고생 많았지야.” 하시며 깊은숨을 쉬시고는 말이 없으셨다. 다시 “할머니 그때 얼마나 고생했는지 말해줘요.”라고 여러 번 조르니까, “그러먼 내가 이약 한 자리 해 주꺼나” 하시고 말씀을 시작하셨다.
할아버지와 동생들은 잠자리로 들어가고 할머니와 둘만의 정겨운 시간이었다. 어머니가 계시지 않은 자리를 대신하시는 할머니시기에 도와 드리기도 하고, 어머니에게 못 부린 어리광을 부리기도 하였다. 지금도 할머니의 정이 그립다. 나는 할머니와 단 둘만의 시간을 좋아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할머니와 눈을 맞추고 얘기를 들었다.
할머니는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한참 동안을 전깃불에 날아드는 나방들을 바라보고 계셨다. 40년 동안 가슴속 깊이깊이 묻어 둔 이야기를 꺼내려면 정리도 필요하셨을 것이다. 칠흑 같은 어둠으로부터 대명천지로 솟아오르는 할머니의 내밀한 이야기가 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깊은 샘에서 길어 올리는 샘물같이 청량하고 신선한 이야기였다. 당시의 암울하고 절박했던 기억을 되살려내는 할머니는 괴로우셨을 것이다. 그러나 의외로 물레에서 실을 뽑아 올리듯 무념무상의 표정으로 담담하게 이야기를 이어 가셨다. 밀려오는 옛날의 감정을 힘들게 억누르고 계셨으리라. 그만큼 상처가 아팠을 것이고, 그 상처가 아물어 만들어진 굳은살도 크고 단단했을 것이다. 해방되고 20년이 가까웠지만, 여전히 몸서리쳐지는 그때의 이야기를 꺼내시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밤이 깊어 가면서 할머니의 이야기도 깊어 갔다.
할머님과 나눈 이야기를 그대로 여기 옮긴다.
“내가 고생을 했던 것은 너희 할아버지가 만세를 불렀을 때나, 징역살이할 때보다, 감옥에서 나오고 나서가 참으로 고생이었다. 할아버지께서는 대전과 대구 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시다가 1921년 6월 27일 출소를 하셨다. 2년 남짓의 옥살이를 하신 게지. 그런데 무엇이 고생이었냐 하면, 하나뿐인 동생이셨던 너희 작은할아버지가 감옥에서부터 매를 많이 맞아, 병이 들어 형기(刑期)보다 일찍 출소하셨다.”
“왜 작은할아버지만 매를 많이 맞으셨대요?”
“음!! 작은할아버지는 “왜놈들아 물러가라”며 취조 중에도 악을 악을 썼다더라. 그래서 많이 맞았단다. 아직은 젊은 나이인데 일을 할 수 없는 지경으로 불구자가 되어 있었다. 작은할아버지네 식구로는 작은할머니, 당고모 셋에 당숙이 한 분이 있었다. 우리 식구는 할아버지와 나 그리고 고모 둘에 너희 아버지 이렇게 열 식구였다. 그래도 논마지기라도 지었으니까 입에 풀칠이야 하겠지만, 이렇게 된 상황을 너희 할아버지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단다. 가슴 저 밑으로부터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울분을 못 견뎌하셨다. 며칠에 한 번씩 불쑥 주재소 순사가 와서 인사를 하고 갔다. 감시하는 것이었다. 왜정 때는 불령선인(不逞鮮人)이라며 일본국의 말을 안 듣는 사람이라고 낙인을 찍어 감시를 하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맨 날 논으로 밭으로 돌아다녔지만, 항상 기운이 없어하셨다. 그러다가 한 번 누우면 며칠씩 못 일어나고 점점 기력을 잃어갔다. “이러다가 이 양반이 죽는 것 아니여?”라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나는 눈물이 나려는 것을 참으며 “그래서요!” 하며 할머니에게 더욱 다가앉았다.
“정말로 큰일이었다. 이 양반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없을까 혼자서 궁리에 궁리를 했었다. 울분으로 생긴 화병이니까 어디 아무도 없는 데 가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면 병이 나을 것 같은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래서 어느 날 밤에 할아버지와 둘이 앉았다. “당신 병이 화병잉개 화를 풀어야 허겄시요. 내가 이걸 드릴 테니 화가 나고 분이 나서 못 견디겄으먼 이걸 들고 계룡산에 올라가 아무도 없는 곳에서 만세라도 실컷 부르고 내려오시오. 그러면 속이 풀릴랑가 누가 아요?”라고 했다. 도장의 쌀 궤 속에 꼭꼭 숨겨두었던 태극기를 할아버지에게 건넸다. 그때 할아버지의 눈에는 이슬이 맺히고 입술은 굳게 다물어져 있었다. 희미한 호롱불에도 할아버지 눈에서 반짝이는 이슬은 빛나고 있었다.”
“그래서 할머니도 울었어?”
“하먼, 나도 울었쟈. 울고 싶었쟈. 소리 내어 통곡하고 싶었쟈. 그래도 소리 내어 울 수도 없는 세상이었다”
나는 참지 못하고 울어버렸다.
“할아버지는 다음 날부터 태극기를 품에 안고 매안(전북 남원시 사매면 대신리 상신) 마을을 나서서 바로 웃골로 향하셨다. 따라오는 사람은 없나 주위를 살피고 품 안에 숨겨온 태극기를 손으로 더듬으며 가슴을 두근거리셨다. 자그마한 저수지를 오른쪽으로 두고, 통시밭 골을 지나서 사모바위 숲을 벗어나면 범데미 고개에 이르게 된다. 고개를 넘어 바로 가면 보절면으로 가는 길이고, 왼쪽 날을 따라 조금 오르면 계룡산 정상이다. 사오 십 분 걸려 계룡산에 오르면 400년 동안 전주 이 씨가 살아온 매안 마을이 손에 잡힐 듯 보인다. 기미년 4월 9일 남원 장날의 만세를 위해서 태극기를 만들고 플래카드를 썼던 사랑방이 소리를 지르면 들릴 듯 가까웠다. 뒤쪽으로는 보절면과 팔공산이 보이고, 남원 시내는 보이지 않아도 교룡산성은 손을 뻗으면 잡힐 듯했단다. 사매면 소재지와 오수 산서까지도 보인다. 해발 391.2m의 높지 않은 산이지만 목청껏 만세를 부른다 해도, 누구 한 사람 들을 사람 없는 높고 한적한 숲이었다. 나는 정상에는 가 본 적도 없다”
“범데미 고개, 나도 가 봤어. 할머니랑 보절 갈 때 갔었지? 할머니?”
“그래 네가 중학교 합격하고 우리 손자 자랑하러 갔었지. 그랬었구나.”
“할아버지는 첫날 산에 오르시어, 품 안의 태극기를 꺼내어 바람에 펼쳤다는구나. 두 손에 쥐어진 태극기는 계룡산의 바람을 받으며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펄럭였지. 태극기를 제작해서도 안 되고, 소지해서도 안 되는 세상에 살고 있던 젊은 청년이었던 할아버지 맘이 어떠했겠느냐! 독립만세를 부르고 감옥살이를 했기에, 2년이 넘는 동안 함께하지 못했던 태극기를 손에 들고 바라보는 독립운동가 할아버지의 심정이 어땠을까? 두 손을 높이 들어 태극기를 우러렀단다. 파란 하늘에 펄럭이는 태극기를 향한 채로 오랫동안 서 있으니 뜨거운 눈물이 끊임없이 흘렀다는구나. 결국에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대. 대한 독립만세! 대한 독립만세!!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며 내 동생을 살려내라!!! 내 동생을 살려 내!!!! 아니 악을 썼단다. 분노와 울분을 토해 냈겠지. 얼굴에는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되었고, 목은 쉬어 지쳤단다. 처음 한 열흘은 아침에 일찍 올라 점심 전에 내려오셨다. 그리고는 이틀에 한 번, 사흘에 한 번 그렇게 반년쯤 다니시니 건강이 좋아져 일을 할 수 있게까지 되었다.”
할아버지에 대한 깊은 사랑과 만세운동에 대한 마음으로부터의 뜨거운 지지와 이해를 짐작하게 하는 이야기였다. 할아버지가 만세를 불렀지만, 할머니도 함께 만세를 불렀음을 알게 해주는 대목이었다. 만세를 부른 할아버지는 한 분이시지만, 가족 친족 친구가 모두 곤욕을 당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 왜정에 대한 저항의식을 가진 삼천만의 만세운동이었음을 알게 해 주는 이야기였다.
“할머니 그 태극기는 지금 어디 있어?”라고 묻자,
“저기 어디 있을 거이다.”라고 하셨다.
말씀을 다 마치신 할머니는 먼 하늘을 바라보고 깊은 한숨을 쉬셨다. 할머니를 위로하듯 별똥별 하나가 어두운 밤하늘을 가로질러 사라졌다.
오랜 세월이 흘렀다. 한동안 그 태극기 찾는 것을 잊고 있었다. 서울로 이사를 올 적에 집안 살림 정리를 하면서 놋그릇 담긴 궤를 열어보았는데, 좀이 슬고 오래된 태극기가 할아버지가 쓰셨던 볼록렌즈 함에 소중하게 담겨있었다.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라서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계룡산에서 목이 터져라 만세 불렀던 그 태극기가 아닐까 혼자 상상을 해 보곤 했다.
여름밤 할머니께서 손자에게 들려주셨던 이야기를 나의 손자 손녀에게 전하기 위하여 이 글을 쓴다. 숙연해지는 밤이었다. -끝-
본문에 나오는 매안 마을에 관하여 네이버에서 제공하는 내용을 요약한다. 본래 남원군(南原郡) 매내면(梅內面) 대산리 지역으로 큰 산이 많다 하여 고산동 또는 대산이라 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대산리와 상신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대산과 상신의 이름을 따서 대신리라 하고 사매면에 편입되었다. 1995년 1월 1일 남원읍과 남원군이 통합됨에 따라 남원시 사매면 대신리가 되었다.
상신마을은 1590년경 탐진최 씨·협계태 씨·청주한씨가 살아 마을을 형성하였으나, 현재는 협계태 씨 1호만 있다. 오히려 나중에 들어온 세종대왕의 증손인 전주이 씨 이정숙의 자손들이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전주이 씨는 기묘사화 때인 1519년(중종 14)에 이정숙이 난을 피하여 외숙 청주한씨 직장공 한응(韓應)을 찾아오면서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 후 선조대왕 때인 1593년 신설(伸雪)을 베풀어 벼슬과 문민공(文愍公) 시호(諡號)를 내려 지금의 매계서원(梅溪書院)에 형배(亨配)하였다.
상신마을은 계룡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으며, 마을 앞에는 대신천이 흐르는 평지이다. 마을 앞동산에는 몇 백 년 된 아름드리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뒤로는 계룡산이 마을을 에워싸고 있다. 이 마을은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그 여의주에 해당한다 하여 여의터라 불리어 왔다. 문민공 시호를 내린 선조대왕 교지(敎旨)는 매계서원에 보관되어 있다.
또 하나 1930년대의 양반가의 몰락을 그린 최명희의 대하소설 ‘혼불’의 주인공 ‘이강모’를 비롯한 등장인물의 대부분이 매안이 씨 즉 여의터이씨이며 청암부인은 종손 집안의 종부였다. 등장인물의 주인공이 대부분 이 동네 사람임을 밝힌다.
대산마을은 세조 병자년 이후 진주형 씨가 정착하게 되었다. 1456년 형근(邢瑾)이 단종 복위 운동 때 순절한 사육신과 함께 절개를 지키다 죽게 되자, 그의 아들 형계선(邢繼善)이 난을 피해 주생면 영천리에서 이곳 대산마을로 온 것이다. 현재 진주형 씨가 마을을 형성하여 살고 있다. 대산마을은 마을 뒤가 온통 높은 산으로 되어 있으며, 마을 옆은 대신천이 흐르고 있는 구릉 지대이다. 일명 고산굴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