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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광석 Sep 15. 2023

아홉 살의 향기

발가벗고 다슬기 잡기

       

  둘이서 걷기에는 좁은 논둑이었다. 소년 둘이서 다슬기를 담은 양동이를 앞뒤에서 들고 논둑길을 위태롭게 걷고 있었다. 아홉 살의 아이들에게는 무거웠으며, 칠월의 논둑은 물기를 잔뜩 머금어 미끄러웠다. 좋은 길도 있었으나 호기심 많은 아이들이라 어렵지만 가까운 논둑길을 선택했다. 비틀비틀, 아슬아슬. 뒤에 가던 내가 미끄러졌다. 넘어지면서도 다슬기가 엎질러지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소리를 지르며 양동이를 놓고 물이 찰랑찰랑한 진흙 논으로 나동그라졌다. 손과 발을 하늘로 하고 넘어지는 꼴이 우스웠던지 친구 광복이는 배꼽을 잡고 웃어댔다. 웃는 광복이에게 눈을 흘겨주며 나도 함께 웃었다. 하늘이 도왔던지 양동이의 다슬기는 엎질러지지 않았다.  


  언제 적 일인지 가물가물하다. 초등학교 3학년쯤 되었을 때이니까 1955년 경이다. 앞집에는 전주로 유학 온 광복이라는 친구가 외할아버지의 집에서 기거하며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는 시골집과 동네 자랑을 자주 하였다. 다니러 오셨던 광복이 어머니께서 한 번은, “방학이니 함께 놀러 가자”라고 하셨다. 할아버지의 허락을 받아 버스를 타고 완주군 동상면으로 갔다. 학교 다닐 때 입던 교복에 교모를 쓰고 손에는 아무것도 들지 않은 채 광복 어머니를 따라나섰다. 그때는 모두 그랬지만, 교복이 외출복이었다.  


  친구가 자랑하던 동네에 들어서자 온 동네 매미가 나와 환영을 해 주었다. 우리 동네 전주 서낭댕이 매미와는 규모나 수준에서 격이 달랐다. 전주 매미가 피아노 사중주라면 동상면 매미는 심포니 오케스트라였다. 가까이에 경관 좋고 시원한 ‘위봉폭포’라는 곳도 있었다. 공기와 물이 맑고 풍광이 수려하여 요즈음도 피서객으로 붐빈다고 한다. 몇십 길을 떨어지는 폭포 소리 웅장하여 아름다움보다 무서움이 더 컸다. 폭포 아래의 검은 바위 틈새에는 하얗고 파랗게 피어 있는 산수국이 물안개에 젖어 산뜻했다. 지금도 그 색깔 기억이 또렷하다.


  교과서에 실릴 만큼 감(柿) 생산지로 유명한 완주군 고산면과 인접한 곳이었다. 곶감을 깎은 후의 부산물인 감 껍질을 그늘에서 잘 말리면 하얗게 분이 나와 달고 맛있는 겨울철 주전부리가 되었다. 광복이가 가끔 주어서 그 단맛을 기억하고 있다. 동네에는 역시 감나무가 많았다. 고종시(高宗柿 보통 감보다 잘며 씨가 없고 맛이 단 감의 품종)의 시조목(始祖木)도 동상면에 있다고 한다. 

 

  광복이 집에 도착하자마자 동네 앞으로 흐르는 내(川)로 미역을 감으러 갔다. 검정 고무신과 교복을 벗어 바위 위에 가지런히 놓았다. 그 밑에다 팬티와 셔츠도 비밀스레 숨기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광복이와 나는 동네 다른 아이들과 함께 발가벗은 몸으로 맑은 물에서 즐겁고 신나게 물장구를 치며 놀았다.

 

  한참을 놀다 보니, 물속에는 물고기도 많았지만, 큰 돌에 다슬기가 새카맣게 붙어있었다. “야 우리 대수리(다슬기) 잡자”라고 말하자, 광복이는 바로 집에 가서 양철로 만든 수대(양동이의 사투리)를 들고 왔다. 작은 손이지만 한번 훑으면 한 움큼씩 잡히는 게 재미있었다. 손질 한 번에 주먹에서 삐져나올 만큼 잡히었다. 즐겁고 신이 났다. 순식간에 작은 양동이에 반쯤 잡은 다슬기를 둘이서 무겁게 들고 집으로 왔다. 광복이 어머니께서 다슬기국을 끓이고 밥을 해 주시어 맛있게 배불리 먹었다. 논에 빠진 나의 무용담이 화제에 올랐다. “네가 양동이를 붙들지 않고 혼자 넘어져서 맛있는 다슬기국을 먹고 있다”라고 칭찬해 주시었다. 부끄러웠으나 조금은 으쓱했다. 


  마당에 멍석을 깔고 앉아, 얘기도 하고 학교에서 배운 동요를 부르며 밤늦게까지 놀았다. 하늘의 별이 쏟아질 듯 가까이 내려와 소곤거리고 있었다. 어머니께서 삶은 다슬기를 내오셨다. 그리고 바늘을 하나씩 주셨다. 우리는 광복이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동네 다른 아이들과 둘러앉아 다슬기를 빼먹었다. 다슬기 주둥이 쪽에 바늘을 깊이 넣어, 살짝 돌리면 통통하게 살이 찐 다슬기가 뾰족이 나왔다. 바늘 끝에 매달린 다슬기는 입으로 ‘쏘옥’, 껍질은 양은 대야에 ‘쨍그랑’, 다슬기의 얇은 뚜껑(흡착판)은 고개를 외로 돌리고 ‘퉤’. 다음의 다슬기를 붙잡아 또 ‘쏘옥, 쨍그랑. 퉤’ 세 박자의 밤은 이렇게 깊어 갔다. 


  이튿날 아침, 밥 먹으라고 부르실 때까지 잤다. 정성 들여 차려 주시는 아침밥이 달아 배불리 먹었다. 반찬이 무엇이었던지 기억이 없다. 어머니께서 “반찬은 없지만, 많이 먹어라”하시며 ‘이뻐 죽겠다’는 듯이 웃으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숟가락을 놓자마자 내(川)로 나갔다. 차가운 냇물로 세수를 하고 이를 닦았다. 광복이는 미세한 모래를 왼손에 올리고 오른손 가운뎃손가락에 찍어 이를 문질렀다. 그러고 나서 풀이름은 모르지만 줄기가 가늘고 질긴 사초를 뽑아 손가락에 돌돌 말아 그걸로 이를 닦았다. 냇물을 두 손으로 떠서 입을 두어 번 헹구고 ‘아! 개운하다’라는 듯이 일어나며 웃었다. 신기했다. 나도 따라 해 봤다. 입안이 상쾌하고 시원했다. 


  생각만 해도 미소가 지어지는 천금 같은 추억이다. 아홉 살 때의 추억이 이토록 향기로울 줄은 아홉 살 적에는 몰랐다. 여름에 피는 위봉폭포의 산수국처럼 기억 속에 선명하다. 해마다 매미가 우는 때이면 산수국이 현란했던 그날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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