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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광석 Oct 13. 2023

젖지 않고 가는 삶은 없다

실패에 좌절하지 말자


  잠을 못 자는 날이 며칠째 계속되었다. 요즈음은 잠자리에 들어도 바로 잠에 들지 못하고,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다 다시 일어나 책을 읽는다. 잠이 모자라면 몸 상태가 나빠지고, 기분이 우울해진다.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아내는 다른 약속으로 외출하고, 나만 혼자 집에 덩그러니 남았다. 자꾸만 기분이 내려간다. 책도 손에 안 잡히고, 음악도 번거로워 싫다. 목욕탕이라도 다녀오면 기분이 바뀔까. 우산을 받쳐 들고 밖으로 나갔다. 


 가벼운 바람이 기분을 상쾌하게 해 주었다. 목욕탕으로 가다가, 산책을 하기로 마음을 바꿨다. 비도 오고 평일이라서 사람도 적을 것 같은 인왕산 자락길로 정하였다. 큰 우산을 받고 걸으니 비도 맞지 않고 좋았다. 


 자주 들르는 단군성전의 단군 할아버지 앞에 가서 섰다. 교과서에 나오는 단군 할아버지의 소상(塑像)이 모셔져 있다. 단군 할아버지와 나를 키워 주셨던 할아버지의 수염이 닮아 단군성전 앞을 지날 때면 꼭 들르고 있다. “할아버지 저 왔어요. 잘 계셨어요. 쓸데없는 잡념으로 제가 요즈음 우울해요. 편안한 마음이 되도록 도와주세요.” 그러고는 고개를 깊이 숙여 절을 하고 “저 가요” 하고 돌아섰다. 조금은 편안해진 기분이다.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마치 모래를 뿌리 듯 소록소록 발걸음을 가볍게 돕는다. 벚나무가 무성한 길로 들어서니 투둑투둑 굵은 소리로 바뀐다. 이 소리도 나쁘지 않다. 우산을 두드리는 빗소리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는, 우울하고 답답했던 기분을 밝고 명랑하게 해 주었다. 작은 파문을 사선(斜線)으로 그리며 아스팔트 길 위를 빗물이 흐른다. 계속되는 파문의 파장이 일정하여 한참을 쳐다보았다.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는 연주자 손가락 같아 재미있었다. 가끔 지나가는 자동차 바퀴의 마찰음도 차르르르 듣기 좋았다. 비 오는 날 풍경은 아름답다. 


 빗물을 머금은 달개비도 고개를 숙인 모습이 힘들어 보였다. 강아지풀의 이삭도 빗물이 버거워 합장하는 스님의 모습이다. 이파리에는 물방울이 방울방울 구슬처럼 빛난다. 옥잠화도 무거움에 고개를 떨궜다. 넓은 잎은 지혜롭게, 작은 빗물을 품고 있다가 보듬기 힘 들만큼 큰 물이 되면, 어깨를 한쪽으로 기울여 모두 비워버린다. 팥배나무 가는 줄기에 맺힌 물방울은 방울마다 색깔이 다르다. 가까이 들여다보니 벌써 물들기 시작한 다른 팥배나무의 노란 잎과 초록 잎들이 투사되어 물방울의 색깔이 다르게 보였다. 이런 것도 비 오는 날 산책의 재미다.  


 종로구청이 사직단(社稷壇)에서 윤동주시인의 언덕까지 조성한 인왕산자락길 도중에 서울 시내를 조망할 수 있는 무무대(無無臺)라는 전망대를 세웠다. 무무대는 아름다운 옛 도성(都城)을 바라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서울의 명소이다. 비가 개인 다음 날 여기에 서면, 경복궁, 창덕궁, 종묘, 창경궁과 청와대가 바로 눈앞으로 손에 잡힐 듯 보인다. 종로 중구의 빌딩들이 가까이 보이고, 남산타워, 롯데타워, 멀리 아차산, 관악산까지 보이는 매우 경관이 아름다운 곳이다. 오늘은 안개가 짙게 내려 경복궁의 검은 기와만 가물거린다. 발아래 서촌에는 고단한 몸을 뉠 수 있는 여러 색의 오래된 집들이 무심히 비를 맞고 있다. 하지만 운무를 바라보는 운치도 각별하다. 비는 멈추고 먼 하늘에는 가끔 파란 하늘이 보였다 숨었다 한다.

  

 젖은 모래가 많은 흙 길을 걷는 맛도 색다르다. 걸음걸음마다 일어나는 발걸음소리는 장병들의 군화 소리를 닮아 힘과 용기를 북돋운다. 차락차락 차락차락 내 발걸음 소리에 박자를 맞추며 가볍게 걸었다.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지만, 너와 나 나라 지키는 영광에 살았다’ 군가를 흥얼거리며 유쾌한 기분으로 자락길을 내려왔다. 


 부지런한 호랑나비 한 마리가 어디서 비를 피하다가 이렇게 빨리도 먹이 벌이를 나왔는지 바삐 숲 속으로 날아간다. 비 오는 날의 산책은 해가 쨍쨍한 날보다 걷기 편해서 좋고,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이 새로워 더 좋다.


 세상은 비에 젖어 무거운데, 한살이를 사는 동안 비 한번 맞지 않고, 바람 한번 맞지 않는 삶이 있겠는가. 모든 초목은 빗물에 젖으며 살아갈 힘을 얻는다. 단군 할아버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숲 속을 걷고 온 나에게 “비가 개면 해가 나고, 해가 나면 꽃도 핀다. 젖지 않고 피는 꽃은 없다”라고 위로해 주셨다. 


 매일이 맑으면, 사막으로 변한다 하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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