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만하지 말고 알차고 여문 소강국이 되자>
여행사에서 일을 하고 싶어서, 1973년 말부터 일본어 ‘아 이 우 에 오’를 배우기 시작했다. 1977년 일본어관광통역안내원 자격증을 취득, 여행사에 취직을 했다. 여행이라는 문화가 막 시작되는 시점이었기에, 허가받은 여행사는 24개밖에 없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허가번호 제2호 ㈜한아여행사에 취직을 했다. 31살의 늦깎이 신입 직원이었다. 나보다 나이 적은 선배들도 많았다. 일이 재미있기도 하여 열심히 하였다.
그 점을 인정받아 공무원 일본시찰단의 인솔자를 보조하는 역할로 일본여행을 하게 되었다. 1981년이었다. 비행기를 타고 외국에 간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밤늦게까지 설렜다. 처음 타는 비행기는 이륙과 착륙 시에 귀가 많이 아팠다. 코와 입을 막고 바람을 불면 귀가 뻥 뚫리는 것이 참 신기했다. 당시 칸사이 지방의 국제공항이었던 이따미(伊丹)공항에 도착, 관광버스로 이동한 곳은 일본의 1000년의 왕도 교토였다. 숙소 이름은 잊었지만 시내 중심부의 일류 호텔이었다. 체크인 후 인솔자에게 허락을 받고 혼자서 외출을 했다.
낯선 외국의 도시를, 밤에 혼자서 걷는다는 것은 흥분되고 가슴뛰는 매력 있는 모험이었다. 네온사인이 화려하게 빛나는 시내를 두리번거리며 걸었다. 교토는 일본 최고의 문화와 교양을 자랑하는 역사도시이다. 사람들이 체면을 중시하고, 깐깐하게 예의를 지켜 상대방을 곤혹스럽게 한다는 평판을 받는 도시였다. 인구가 100만이 넘는 대도시로, 보도를 걷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세련돼 보이고, 잘 사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와 너무나 차이가 나는 것에 속이 많이 상했다.
시내버스를 탔다. 일본어를 조금 안다는 자만심에 거리낌이 없었다. 버스 안 풍경은 차분하며 조용했고, 퇴근시간이 조금 지난 즈음이라서 깔끔한 복장의 젊은 여성과 남성들이 작은 소리로 웃으며 대화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버스 안도 깨끗하게 청소와 정리가 되어 쾌적하였다. 게다가 사람도 많지 않아 빈자리에 앉을 수가 있었다. 서울의 시내버스는 콩나물시루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붐비었고, 여자 차장이 있던 시절이었기에 조금은 생경했다. 모두가 부유해 보였다. 차창으로 보이는 교토 시내는 잘 정돈되어 있었고, 무엇보다 청결해 보였다. 한참을 가다 보니 다리가 보이고 제법 큰 내가 흐르고 있었다. 깨끗한 물이 흐르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신기해서 바로 버스에서 내렸다.
조금 되돌아가 다리 위에서 내려다보니, 산골짝의 좁은 계곡을 흐르는 물같이 맑고 투명하였다. 인구 100만 도시의 중심을 흐르는 강물이 이렇게 맑을 수가 있을까? 서울의 청계천과 자꾸만 대비되어 무너지는 자존심에 견딜 수가 없었다. 청계천은 73년도에 동대문구 용두동에 살았던 적이 있어 복개공사 이전의 실상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판잣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공중화장실 앞에는 항상 줄이 길었다. 집집마다 버리는 요강의 오수와 쓰레기로 강물은 썩어 악취가 진동하였다. 교토의 맑은 강물이 너무나도 부러웠다. 버드나무와 벚나무가 심어져 있고 제방은 공사가 깔끔하게 되어 있었다. 다리 아래로 내려가 물속을 들여다보니, 제법 커다란 잉어가 유유히 헤엄치고 있었다.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절망감을 안고, 호텔로 돌아가는 버스에 올랐다. 자리가 비어 있어서 앉았다. 그런데 젊은 세 명의 여성이 좌석이 있는데도 앉지 않고 서서 대화를 하고 있었다. 조금 후에 나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여기저기 둘러보니 내가 앉은자리의 창 위에 ‘신체장애자석’이라고 쓰여 있었다. 서울에는 없었던 장애자 보호석이었던 것이다. 낯이 뜨거워 견딜 수가 없었다. 장애자 보호석이라 할지라도 자리가 비어 있으면 앉아도 되는 것 아닌가. 하지만 너무나 창피했다.
여행 삼일 째는 자유 시간이었다. 일본에서 유명한 미쓰코시 백화점엘 가보았다. 거리에서 담배를 피우며 걸었다. 일본 사람들도 담배를 피우며 걷는 사람들이 많았다. 피우던 담배를 손에 든 채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2층에서 내렸다. 백화점 직원이 재떨이를 들고 쫓아와 내 앞에 내밀었다. “점내에서는 금연입니다.”라고 하면서. 나는 얼굴이 벌게졌다. 내민 재떨이에 담배를 끄고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당시는 일본도 그랬겠지만 우리나라는 사무실에서 담배를 피웠었다. 아침이면 여직원들이 책상마다 놓인 재떨이를 비우고 닦아주는 서비스를 하던 때였다. 아내가 좋아할 것 같은 생활용 도자기와 액세서리 몇 점을 샀다.
도자기접시가 무겁고 깨질까 염려되어 정류장에서 택시를 탔다. 뒷문이 열려 있었다. 타고나서 문을 닫았다. 출발하고 조금 후에 운전기사가 “어디서 오셨습니까?”라고 물었다. “한국 서울에서 왔습니다”, “아! 그러세요?” 또 조금 달리다가 “죄송하지만, 한 말씀드려도 될까요?”라고 했다.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나 생각하며 “아! 네.” 하였다. “택시의 문을 열고 닫는 것은 운전수가 하게 되어 있습니다. 손님께서 문을 닫아 깜짝 놀랐습니다.” 또 얼굴이 벌게졌다. “아 미안합니다. 몰랐습니다.”라며 사과를 했다. 운전수는 “아닙니다. 별말씀을요” 라며 겸손하게 웃었다. 호텔에 도착하여 택시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잡았다가 운전수가 열어줄 때까지 기다렸다. 그 시간이 참 길었다.
택시에서 내려 짐을 들고 호텔 현관문을 들어서니, 벨 데스크 직원이 짐을 들어주겠다고 하였다. 괜찮다고 해도 들어주겠다며 호텔 내에서만 사용하는 짐수레에 실었다. 방까지 옮겨주고 돌아서는 직원에게 100엥(¥)짜리 동전 두 개를 받으라며 내밀었다. 당시 환율로 한화 이천 원이 조금 더 되는 금액이었다. 서울 호텔의 벨 데스크 직원들은 팁을 받는 것이 상례화 되어 있었고, 팁을 안 주면 요구까지 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이 직원은 두 손을 저으며 극구 사양하였다. “팁은 받지 않게 되어있습니다.”라면서.
벨 보이는 돌아가고, 짐과 동전 두 개를 탁자에 둔 채 침대에 벌렁 누웠다. 천장에는 세련된 실내 등이 도마뱀처럼 찰싹 붙어있다. 피곤했지만 이번 여행기간 동안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을 스쳐갔다. 저지른 실수들이 아직까지도 부끄럽다. 미쓰코시 백화점에서 재떨이를 들고 나와 미소 짓던 아가씨는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여기서는 금연입니다.”라고 하면 될 일 아닌가? 재떨이까지 들고 나와서 나를 이렇게 무색하게 하다니. 그런데 곰곰 생각해 보니 나 같은 사람이 많았던 것 같다. 그렇게 빨리 재떨이를 준비하여 들고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사람들을 위한 준비와 교육이 되어 있었던 것 같다.
친절하고 청결하여 부러웠고, 우리를 침략했으며 패전국인 나라가 이렇게 잘 살아도 되는가 하는 울분을 견디느라 괴로웠던 여행이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잘 살 수가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일본보다 더 잘 살아, 일본사람들이 지금의 나와 같이 배 아파하는 것을 볼 수 있을까 하는 편협한 생각도 했다. 선진화된 유럽의 나라를 배우려면 거리도 멀고, 문화적 차이도 많아 어렵지만, 그 유럽을 일찍 배워온 일본을 벤치마킹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우리나라 대학생들이 1박 2일이라도 일본여행을 많이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많이 흘러, 나의 경륜도 조금은 쌓였을 즈음에 깨닫게 되었다. 일본인은 매뉴얼이라는 것을 만드는 교육이 되어 있었다. 간단한 일이라도 매뉴얼을 기록하여 모두가 공유하는 습관 말이다. 매뉴얼을 실무자에게 철저하게 교육시킨 후, 실행하면서 개선해 가는 것이다. 실무자들은 자기가 외운 매뉴얼을 철저히 지키려고 애를 쓴다. 매뉴얼 외의 상황이 발생하면 어떻게 해야 할 줄 몰라 쩔쩔매는 것은 매뉴얼의 맹점이지만.
인천공항이 개항하기 전에는, 지금의 김포 국내선 공항을 국제선 공항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일본을 다녀오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의 코끼리표 밥통을 세 개씩이나 사서, 양손에 하나씩 들고 하나는 발로 밀고 나오는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있었다. 당시에는 공항 내에서 사용하는 카트가 없었다. 일제 가전제품이 세계를 제패하던 시절이었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오늘날은 우리의 가전제품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전자, 조선, IT, 영화, 스포츠 등 많은 부문에서 일본을 능가하고 있다. 무엇보다 자존심을 회복하게 된 것은, 서울의 청계천에도 교토의 강물처럼 맑은 물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버드나무와 벚나무 등으로 녹음이 우거졌고, 맑은 물에 잿빛 왜가리가 외 발로 서서 물고기와 눈싸움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자부심을 느낀다.
노인의 노파심이라 해도 좋다. 모쪼록 자만하지 말고 알차고 여문 소강국이 되도록 노력하기를 소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