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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수영 Oct 21. 2021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영화 '쿠오바디스, 아이다' 리뷰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가 전쟁을 다루는 방식은 확실히 달라지고 있다. 과거 ‘전쟁영화’가 전투를, 총탄이 날아다니는 현장을 주로 묘사했다면 최근 개봉하는 영화들은 전투 그 자체에 집중하지 않는 듯하다.(전쟁이라는 거대한 비극을 하나의 장르로 만들어 엔터테인먼트로 소비한다는 측면에서 ‘전쟁영화’라는 표현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전쟁터에서의 하루를 구체적으로 묘사하거나 참전군인의 후유증을 고발하는 식으로 전쟁을 다시 보도록 만든다. 그러나 이런 변화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영화의 중심인물일 것이다.


 전쟁영화의 중심에는 늘 남성이 있었다. 대부분의 영화에서 여성은 보이지 않거나, 보인다 해도 주변 인물에 그칠 뿐이었다. 그러나 우리 모두 알고 있듯 전쟁은 성별을 가리지 않으며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적용되는 재난이다. ‘쿠오바디스, 아이다’는 이 점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영화는 전쟁을 맞닥뜨린 여성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다시 쓴다.


 영화의 배경은 1992~1995년 보스니아전쟁이다. 이 전쟁 이후 스레브레니차 지역은 유엔 안전지대로 선언됐다. 그러나 세르비아군이 1995년 7월 불법 점령하면서 사람들은 신변에 위협을 느끼기 시작한다. 주민 수천 명은 결국 살던 곳을 떠나 유엔이 설치한 캠프로 피신해야 했는데, ‘쿠오바디스, 아이다’는 이 피신 이후를 다루고 있다.


 스레브레니차 시장은 세르비아군에 강력 대응해 줄 것을 유엔에 당부하지만 유엔은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 사실상 손을 놓고 있다. 캠프의 환경은 너무도 열악하다. 음식과 물이 제대로 공급되긴커녕 책임자가 누구인지조차 알 수 없다. 모두가 상급자의 지시만 기다리고 있는 상황에서 난민들이 제대로 된 생활을 보장받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 심각한 문제는 캠프 밖에도 수많은 사람이 있다는 것. 수용 가능 인원이 적은 탓에 대부분의 주민들은 캠프 밖에서 오매불망 안으로 들어가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언제 세르비아군의 공격을 받을지 모른다는 불안에 떨며.


 아이다는 여기서 유엔군 통역관으로 일한다. 그에게는 남편과 두 아들이 있는데, 이들 역시 캠프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가기를 기다리는 처지다. 아이다는 장교에게 여러 차례 부탁한 끝에 마침내 가족을 데리고 들어오는 데 성공하지만, 곧 캠프 역시 안전한 곳이 못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영화는 시종 아이다의 움직임을 바쁘게 쫓는데, 그는 통역관의 임무와 엄마(아내)로서의 책무를 모두 완벽하게 수행해내기 위해 내내 분투한다. 통역관으로서 그는 유엔군의 말을 옮기는 데 최대한의 신중함을 발휘하는 직업인이며, 아내이자 엄마로서 그는 가족의 정신적 기둥이다. 동시에 캠프 안팎에서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지원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아이다의 두 가지 얼굴’, 즉 중재하는 자로서의 아이다와 돌보는 자로서의 아이다이다.


중재하는 자


 유엔의 미온적 태도에 스레브레니차 시장은 분노한다. 그는 유엔을 더이상 믿지 못하겠다며 화를 내지만, 그럼에도 희망을 걸어볼 수 있는 대상은 유엔뿐이다. 통역관으로서 아이다의 소임은 분노한 시장과, 자신도 그저 하수인일 뿐이라 말하는 유엔군 장교 사이에서 중심을 잡는 것이다. 여기에서 모든 것은 ‘아이다의 언어’에 달려 있다. 영화는 전쟁의 판을 움직이는 당사자들 사이에 있는 아이다에게 주목한다. 그대로 전달된다면 파장이 클 발언은 아이다를 거치면 한 차례 순화되고 느려진다. 그의 언어는 힘을 힘으로, 응징을 응징으로 즉각적으로 받는 것과 거리가 멀다.


 과거 전쟁은 남성의 전유물로 통했다. 힘과 정복, 지배와 억압으로 움직이는 세계, 승패가 명확한 그 세계에서 약자는 강자에 의해 억압받고 착취당했다. 그리고 이런 역사에서 여성들은 배제되어 왔다. 그러나 이제는 조금 다른 가치를 말할 때가 되었다. 전쟁과 정복이 아닌 중재와 평화가 그것이다. 또 한 가지. 영화 안에서 언어와 언어 사이에 서 있는 아이다는, 영화 바깥에선 과거의 상황을 현재에 전달하는 자로서 존재한다. 영화가 아이다의 직업을 ‘전달과 중재를 주로 하는’ 통역관으로 설정한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돌보는 자


 유엔군 통역관인 아이다에겐 캠프의 내부 사정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아이다는 그곳이 돌아가는 사정을 누구보다 빨리 알지만, 그 앎은 역설적으로 그를 더 힘들게 한다. 아이다가 가족을 어떻게 지켜야 할지 고심하는 사이 세르비아군은 유엔 캠프까지 뚫고 들어온다. 그들은 민간인들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켜 주겠다며 사람들을 버스로 실어나른다. 그러나 아이다는 그렇게 떠난 사람들이 희생당하고 있음을 곧바로 짐작한다. 그는 유엔 장교에게 자신의 남편과 두 아들 역시 유엔군과 함께 있을 수 있게 해달라고 사정하지만, 유엔 측은 ‘공정’을 이유로 들어 기각한다.


 이때 시선을 끄는 것은 남편과 두 아들의 모습이다. 이들은 아이다의 분투를 지켜보면서도 그의 부담을 덜어주려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다.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전쟁이 무사히 끝날 거라는 헛된 믿음을 가지는가 하면(남편), 자력으로 대피하려는 별다른 의지도 내보이지 않는다(두 아들). 그저 멍하니 아내와 엄마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이다에게 기댈 뿐이다. 영화의 오프닝은 이런 가족의 상황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카메라는 아이다의 두 아들 중 둘째 아들을 먼저 비추고, 이어 아이다의 남편을 비춘다. 다음으로는 첫째 아들의 얼굴이 화면에 나타난다. 이들은 모두 한곳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 대상은 아이다이다. 모두가 ‘해결사’ 아이다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감독 야스밀라 즈바니치는 아마도 전쟁의 한복판에서 당사자로 존재했을 여성, 그리고 전쟁이 끝난 이후 가족들을 다독이고 가정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존재로서의 여성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동안 대부분의 전쟁 서사에서 여성의 역할은 이상하리만치 조명되지 않았으니. 영화 속 등장인물들이 아이다를 쳐다볼 때, 아이다는 작정한 것처럼 관객을 바라본다. 아니, 정면으로 응시한다. 1995년의 그는 2021년의 관객에게 이렇게 질문을 던진다. 지금도 지구 곳곳에서 반복되고 있는 이 비극을 어떻게 할 것이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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