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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정 Jun 20. 2024

프롤로그. 파혼한 약혼녀에게

한때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기를 바랐습니다.

세희 씨, 한때 나는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기를 바랐습니다. 아름다운 당신의 안녕을 빌지는 못할망정 불운을 기도했습니다. 나 자신의 운명이 순조롭지 못하여 어리석은 생각을 하였던 것이 진실로 부끄럽습니다. 


약속장소에 나오지 않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당신이 소망했던 것들을 뒤늦게 알아차리면서, 당신과 있던 공간을 홀로 버텨내면서, 나는 이 사태를 야기한 나를 증오하는 것이 두려워 도리어 당신을 원망했습니다. 미안합니다.


세희 씨, 당신이 떠난 뒤 나는 오랫동안 당신을 찾아 헤맸습니다. 길에서 가지런한 긴 머리를 늘어뜨린 뒷모습만 보아도 당신인 줄 알고, 당신이 오는 줄 알고, 휘청거리며 당신을 맞이하기 위해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돌아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당신은 이미 나에게 많은 기회를 주었고, 나는 당신이 베푼 그 무수한 관용을 배반하였습니다. 내가 당신을 돌아오지 못하게 한 줄도 모르고 당신이 반드시 올 것이라는 소망으로 겨울을 살았습니다. 당신이 없는 서울에는 바람이 여러 번 불었습니다. 남쪽은 평안했기를 바랍니다.


세희 씨, 이 편지와 당신의 소지품을 보내는 것이 당신을 영영 잘라내는 것이 아님을 알아주길 바랍니다. 내가 당신의 옷가지를 돌려주는 이유는 당신과 내가 살았던 집을 처분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돌려받은 보증금 중 당신의 몫이어야 마땅한 돈은 계좌로 이체하였습니다. 


이 돈으로 당신이 그토록 소망했던 것들을 조금이나마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당신의 연인과 함께 살 집을 구하는 데 보탤 수도 있을 것이고, 그 사람과의 결혼식에 쓸 수도 있을 것이고, 아이를 낳고 기르는 데 쓸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내가 해주지 못한 것들을 당신의 그 사람이 해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미안합니다.


당신은 내가 이사를 간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새 집을 구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거주지가 불명한 사람이 되었고, 당신이 혹여라도 내게 보내는 것들은 모두 수취인이 불명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내가 원래 있어야 할 상태, 즉 거의 대부분의 소유와 안정을 상실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나에게는 표류와 방황만 남았습니다만, 세희 씨, 이상하게도 나는 이제야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세희 씨, 당신의 마지막 비명처럼, 나는 어느 곳에도 정착하지 못하는 인간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당신을 사랑했던 마음에는 한 순간의 허위도 없었습니다. 당신을 향한 애정은 모두 진실이었고, 당신에게 바친 순애는 언제나 신실했습니다. 당신이 말하는 것은 내게 전부 교리가 되었고, 당신이 원하는 것은 내 필생의 목표가 되었습니다. 당신은 나에게 살아갈 결의를 주었고, 찬란한 세계를 주었고, 무수한 경이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세희 씨, 나는 나를 기만하였습니다. 나는 당신을 잃을 것이 두려워 그만 나를 저버리고 말았습니다. 나는 단 한순간도 나에게 정직하지 못했습니다. 결혼하려 하였던 것이 거짓이었냐고 물으신다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워하였던 것이 거짓이었냐고 물으신다면 한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나에게, 당신 옆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나에게 진실하지 못하였습니다. 나는 내가 어떠한 사람인지 알지 않으려 했고, 나의 불안을 내 것이 아닌 척 외면하려 했습니다. 오로지 당신만 있으면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안온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함께 했던 시간 동안 당신에게 많은 혼란과 소란을 준 것에 대해 진실로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세희 씨, 연애시절처럼 당신의 편지에 답신을 적어 보냅니다. 당신이 물어오신 대로, 나는 당신이 나를 떠나기 며칠 전, 그러니까 결혼을 앞둔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와, 어떻게 지금의 나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소상히 밝히고자 합니다.


아직 날이 풀리지 않았으니 며칠 더 봄이불을 덮기를 바랍니다. 물론 나는 이불이 없습니다. 나는 집이 없으니까요.


남쪽은 무탈합니까? 나는 얼마 전에 제비를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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