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수와 결혼해 줘
나는 새벽에 글을 쓰기 위해 늘 4시에 알람을 맞췄지만 새벽 기상에 성공한 적은 거의 없었다. 내 생각에 새벽에 일어나는 사람들은 어디가 아파서 잠에서 깨는 것이다.
나는 4시부터 오분 간격으로 울리는 알람에 눈을 뜨고 까무러치기를 반복하다가 8시가 다 되어서야 간신히 일어나곤 했다. 정말 미라클 모닝이었다. 그리고는 나라는 인간에 넌더리를 내며 출근했다.
아침에는 초점 없는 눈으로 엑셀을 보며 점심시간에 글을 쓰자고 생각하고, 점심에는 순댓국집으로 신나며 달려가며 퇴근하고 쓰면 된다고 다짐하고, 저녁에는 퇴근하고 노트북 앞에 앉아 새하얀 한글 화면을 뚫어져라 보다가 대뜸 유튜브를 틀어버리는 것이 나의 평온한 루틴이었다.
오늘부터 주말 동안 열심히 써서 만회하자고 마음먹은 금요일이 되면 더 심각해졌다. 금요일에 퇴근하고 나면 이순신도 아니고 나에게는 아직 토요일이 남아있다는 비장한 생각이 들어 또다시 한글 문서 대신 '영광의 시절 메시가 바르셀로나에서...'로 시작하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동영상을 눌러버리곤 했다.
주말이 되면 맹세코 새벽부터 글을 쓰겠다고 결심하고는 해가 중천에 뜬 뒤에야 좀비처럼 일어나 세 시간 정도 소설을 쓰고 나머지 마흔 시간은 넷플릭스를 보며 맥주를 마셨다.
그렇게 해서 지금까지 꾸역꾸역 써 온 소설이라고는, 중간중간 힘에 부쳐 "그래서~ 이렇게 됐다고 치자!"라고 써버린 탓에 퇴고할 엄두도 나지 않는 SF소설 1편, 연재를 하다가 자신감을 잃고 때려치워버려 내가 성장을 못하게 된 성장소설 2편, 요즘 유행하는 허무주의적 에세이 1편('앞으로는 대충 살겠습니다' 어쩌고), 출판사에 투고했으나 대남 방송 확성기처럼 아무도 반응이 없는 스릴러 소설 3편, 어느 공모전의 최종심까지 갔다가 떨어진 덕분에 아직도 놓지 못하고 있는 저주받은 동화 1편, 10년째 신춘문예에 내느라 10년 동안 유행했던 온갖 냉소적인 작풍으로 범벅이 되어 다시 쳐다보기도 창피한 단편소설 8편이 전부였다.
나도 처음에는 내가 쓰고 싶은 글만 썼다. 동태눈깔로 마우스를 딸깍거리며 결재버튼만 누르는 동사무소 동장에게도 처음에는 야심 찬 정열이 있었을 것이다. 나 역시 내가 쓰고 싶었던 우주인의 지구 정복기나 연쇄살인범을 연쇄살인하는 추리소설만 쓸 줄 알았다. 그러나 내 예상과 달리 걷잡을 수 없이 많은 공모전에 떨어지게 되면서, 공모전에서 요구하는 주제대로 울며 겨자 먹기로 써내는 소설이 훨씬 많아졌다.
그중 최악은 어느 대형 웹소설 공모전에 내기 위해 연애소설을 써야 했을 때였다. 나는 그 공모전이 주로 어떤 소설을 선호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처음으로 해당 웹소설 사이트에 들어가 보았다가 크게 후회하고 말았다. 당시 그 사이트에서 인기 있는 글들은 '너만 없으면 내가 왕세자비', '형수와 결혼해 줘' 같은 것들이었다.
그때 내가 겪었던 고통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다. 형사취수제도 아니고 나는 그와 비슷한 부류의 연애소설을 써내느라 거의 울어버리고 말았다. 내 고난과 맞바꾼 그 소설에는 스포츠카 타는 키 190cm에 차은우와 박보검 섞어놓은 재벌, 그 재벌이 질색하지만 이상하게 '신경 쓰이는' 덜렁대는 여주인공, 갑자기 옛 감상에 빠져 비합리적인 선택을 하는 재벌가 조부모("이 할아비의 절친한 친구와 서로 손주가 태어나면 결혼을 시키기로 월남에서 약속을...")로 인한 정략결혼, 이기적 유전자도 울고 갈 출생의 비밀, 모두가 경선 탈락하자마자 신당 창당 해버리는 것 같은 후계구도, 인수대비도 이렇게는 안 시켰을 것 같은 시집살이, 정략결혼을 거스르고 뛰는 심장("어머니 저희 그냥 사랑하게 해 주세요 제발 이 여자 그만 괴롭히시라고요!") 같은 것들이 들어갔다.
그 모든 고초를 겪는 동안 나는 식음을 전폐했고 몸무게가 7kg이나 빠졌다. 그렇게 해서 그 공모전에서 당선됐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아닌 정도가 아니라 나 같은 가짜는 가당치도 않았다. '너만 없으면 내가 왕세자비'는 진정으로 돌아버린 재능이었다.
온갖 핑계와 나태의 벽에 숨어 하루에 한 장도 쓰지 못하는 날이 수두룩했으니 작가라고 하기는 좀 낯부끄러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언젠가는 당연히 내가 글로 잘 될 줄 알았다.
그래서 그 개 같은 회사를 나와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고, 술을 마실 시간에 글을 쓰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여 친구들이 불러도 잘 나가지 않았으며, 월급 240만 원으로 하루 세끼 밥 먹기도 빠듯해 연애를 하지도 못했다. 그러니까 나는 사실상 제대로 된 영장류와의 교류가 끊어진 상태였다.
나는 언제나 가정법을 달고 살았다. 이번 소설만 완결한다면, 이번 공모전만 합격한다면, 이번 책만 출판한다면, 그러면 회사를 그만둘 수 있을 것이다, 대출을 갚을 수 있을 것이다, 시골의 부모님이 드디어 "김 씨 아들이 공무원? 거 우리 아들은 말여!" 하며 허리에 손을 얹을 수 있을 것이다, 가끔 시동이 꺼지는 중고차라도 한 대 뽑을 수 있을 것이다, 바퀴벌레와 곰팡이와 거미로 분열되어 삼국이 세력 다툼을 하고 있는 내 반지하 원룸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온통 내 안의 힘에 집중하고 있었고, 수많은 공모전과 출판사에 셀 수 없이 많은 글을 투고하고 있었다. 그래서 잘됐냐 하면 이백 번 정도 떨어졌다. 내 실패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고 정말로 이백일 개 정도의 공모전과 문학상과 신춘문예와 각종 플랫폼의 창작 지원 프로젝트에서 떨어졌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출판사에 직접 글을 투고하자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출판사가 나를 거절했다.
결국 나는 한 권의 책도 내지 못했다. 출판사들은 잊을만하면 '선생님의 원고는 훌륭하나 저희 출판사와는 방향이 맞지 않아...'로 시작하는 메일을 보내왔다. 내가 보낸 원고에 짱돌보다도 반응을 하지 않아 나조차도 투고한 사실을 잊어버렸는데 갑자기 대뜸 '검토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린 점 죄송하게 생각하나 선생님의 소설은 구리고...' 같은 정성스러운 거절을 해와서 시도 때도 없이 울화통이 치밀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이상한 일이지만 하필 그때였다. 그 시기에 갑자기 길에서 사람들이 여자친구가 있느냐고 물어오는 기이한 사고가 발생했다. 여자친구가 있느냐 뿐 아니라 남자친구가 있느냐고 물어오는 배달사고도 심심찮게 일어났다. 간혹 내 껍데기만 보고 내가 멀쩡한 인간인 줄 알고 처음 보는 여자(나 남자)들이 덜컥 번호를 물어오는 일이 있었는데, 그 무렵이 그런 날들의 연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