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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정 Jun 25. 2024

글 쓰는 사람이 사는 지옥

고장 난 비디오처럼 실패와 희망이 무한으로 반복되는 바다

사실 나는 제주도도 가본 적이 없던 사람이었다. 


내가 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수학여행을 대부분 경주로 갔기 때문에 나는 제주도가 당연한 세대가 아니었다. 그때만 해도 나라가 지금처럼 여행에 미치기 전이었고, 방학 때 가족과 여행을 다녀오는 집이 흔치 않았다. 나는 그런 화초 같은 애들과는 친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내 친구들은 아침부터 밤까지 엄마가 게임 그만하라고 익룡처럼 득음을 하는 동안 집에 하나 있는 컴퓨터를 차지해 크레이지 아케이드를 하기 위해 형제와 개처럼 싸워대는 애들이었다.


그러므로 그 일이 발생하기 전까지 내 인생은 지극히 평범하게 흘러갔다. 혼자는 물론이거니와 가족끼리 해외여행을 가본 적도 없었다. 내 부모님은 만화영화에 나오는 '행복한 벽지 같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아니었다. 이번 여름방학은 런던에서 보내자며 건치를 드러내고 여의도로 출근하는 금융권 아버지도 아니었고, 주말마다 미술관을 사뿐사뿐 다니고 학벌만큼 긴 진주 목걸이를 하고 다니는 어머니도 아니었다. 우리는 평일에 몸을 써서 돈을 벌고 주말에 전국노래자랑이나 동물농장 앞에서 기절하는 보통 가족이었다.


아버지는 당시 군 입대를 앞둔 나에게 단 두 가지만을 가르쳤다. 첫 번째는 '튀지 마라'였고, 두 번째는 '못하는 것은 못한다고 해라'였다. 이 두 가지 생존원칙 덕분에 나는 전쟁에서 만나면 적보다 무섭다는 무능한 상관 밑에서도 운 좋게 죽지 않았고, 거의 철학자가 된 채로 전역했다.


물론 사회에 나오자마자 다시 하루종일 버스와 지하철이 싸우면 누가 이기는지만 생각하며 살긴 했지만, 아버지의 생존 제1원칙인 '튀지 마라'는 언제나 군번줄처럼 머리에 차고 다녔다.


내가 얼마나 성실한 아들이었냐 하면, "어쩌고 할 사람 앞으로 나와" 할 때면 할 줄 알아도 언제나 먼산을 보았고, "어쩌고 아는 사람 대답해 봐" 할 때면 알고 있어도 즉시 입을 다물었다. 남들처럼 살아야 안전해 보이던 날들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생존 제2원칙인 '못하는 것은 못한다고 해라'는 가슴에만 간절히 품을 뿐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나는 언제나 우물쭈물했다. 이 나라만큼 못하는 것을 못한다고 말하는 즉시 튀는 사람이 되는 곳도 없었다. 그러니까 생존 제2원칙은 생존 제1원칙에 전적으로 위배되는 일이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두 가지 생존 원칙에는 중대한 모순이 존재했던 셈이었다. 그러나 내가 알 바인가. 아버지의 일은 아버지가 해결해야 한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군대, 직장에 이르기까지, 높지도 낮지도 않은 성적과 뛰어나지도 형편없지도 않은 능력 덕에, 나는 언제나 얌전히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사람으로 살았다. 그러니까 나는 책상 앞에 앉아서 교과서를 펴놓고 버스와 지하철이 싸우면 누가 이기는지 상상하며 이십 년을 버린 것이었다. 그때는 그렇게 가만히 앉아 있어야 하는 줄 알았다. 나의 온 생애가 얼음처럼 단단한 틀에 박혀 있었다. 


나는 비행기를 타본 적도 없었고, 엄마 손 붙잡고 발리로 여름휴가를 가는 대치동 초등학생보다도 출국 절차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대한민국의 광역시를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고, KTX를 혼자 타 본 적도 없었으며, 학교나 회사로 가는 노선이 아닌 다른 색깔의 지하철은 쳐다본 적도 없었다.


나는 죽도록 평범하다 못해 지긋지긋할 정도로 원칙과 경계를 고수했다. 쉬는 날이면 당연히 자취방에 틀어박혀 라면을 먹고 콜라를 마시고 토할 때까지 인터넷을 했다. 퇴근하면 무조건 집에서 쉬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금요일 저녁이 되면 일요일 밤까지 절대로 침대에서 나오지 않았다. 유일하게 현관문 근처로 갈 때는 배달시킨 매운 것을 받아야 할 때였다. 아주 매운 음식도 아니고, 약간 매운 떡볶이, 약간 매운 냉면, 약간 매운 치킨 같은 것이었다. 주말에 먹는 매운 것마저 없었다면 나는 도저히 회사를 다니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다니던 회사는 가정집 같은 건물 하나만 달랑 있는 주제에 어디서 본 것은 있어서 늘 정장과 넥타이를 강요했다. 사장은 인간의 마음가짐이란 옷차림에서 나오는 것이라며 언제나 잘 닦은 구두를 신고 출근하라고 온화하게 훈계를 하고는 정작 자기 구두는 신입이던 나에게 닦게 했다. 나는 결혼식장의 신랑보다 더한 정장 차림으로 날마다 그 큰아빠 집 같이 생긴 회사로 출근했고, 네모난 구식 모니터를 뚫어져라 보다가 매일 똑같은 지하철을 타고 퇴근했다.


당시에 나는 사무직으로 근무했고 월 240만 원 정도를 받고 있었다. 내가 회사에서 하는 일이라고는, 대기업에서 만든 서식 똑같이 따라 만들기, 옆 사람이 하기 싫어하는 엑셀 정리하기("이 대리, 지금 할 거 없지?"), 전화로 "그런데 저희 팀에서 할 일은 아닌 것 같아요..." 하기, 정기적으로 복사기 걷어차기, 작년에 죽어버린 화분에 물 주기 같은 것이 전부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사장부터 복사기까지 정신 나간 그런 회사는 그만두는 것이 옳지만 그때는 그런 것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잘못된 선택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은 자기가 지금 뭘 잘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 인생은 왜 이렇게 개 같고 주변에는 왜 이리 개 같은 자들만 있는가 불평만 하는 것이다.


그 시기의 나는 어떤 것도 성취하지 못했고 사실상 시간을 쓰레기통에 내다 버린 격이었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내 인생이 패망한 요인이었다. 나는 내가 회사에서 대충 살아도 되는 인간이라고 자신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스스로를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 사람의 자존감이란 실로 무서운 것이다. 내 생각에는 갑자기 마주치는 바퀴벌레보다 더 무서운 몇 안 되는 것들 중 하나다. 글을 쓰는 사람들은 온갖 병에 걸려 있는데, 가난해병(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며 글을 쓰면서 자신이 가난에 시달린다고 생각), 아직병(아직 알려지지 않았을 뿐 자신의 작품을 넷플릭스에 팔기만 하면 더 글로리 정도로 성공한다는 생각), 나만병(자신이 세상 그 누구도 생각한 적 없는 소재의 글을 쓰고 있다는 생각), 서글퍼병(자신이 누구보다 재능 있으나 삶과 타협하느라 마트 전단지 문구 같은 글을 쓰며 생계를 연명하는 서글프고 처연한 예술가라는 생각) 등이다.


나 역시 이 병들로 오랜 기간 고통받았다. 누가 글을 쓰라고 시킨 것도 아니라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다. 글을 쓴다는 것은 고장 난 비디오처럼 실패와 희망이 무한으로 반복되는 고요한 지옥에 멍하니 서 있는 것과 같다. 그 지옥에 다녀와 보면 염라대왕도 "아, 이건 좀..." 하면서 아마 월세를 안 받을 것이다.


글 쓰는 자들의 지옥에서는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아무런 티가 나지 않고 아무런 돈도 벌지 못하고 아무런 반응도 얻지 못한다. 마치 모든 것이 운으로 결정되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들과의 관계는 어려워지고 서서히 고립되기 시작하며 점점 냉소적으로 변하고 결국 자신이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하는 방구석 제갈량이 되어버린다.


내가 어쩌다가 그런 절망의 구렁텅이로 이사하게 되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자신이 언제부터 불행했는지 알고 싶어서 불운의 늪을 더듬어보는 것은 솔직히 멍청한 짓이다.


나도 글을 쓰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럭저럭 만족하며 살 수 있었을 것이다. 내 월급이면 PC방도 매일 갈 수 있고 갈 때마다 소떡소떡을 사 먹을 수도 있다. 그러면 적어도 행복하기라도 했을 것이다. 글이 나에게 남겨 준 것은 정말이지 반지하와 바퀴벌레와 나에 대한 끝없는 실망밖에 없었다. 그러나 고장 난 시계처럼 하루에 두 번은 찾아오는 희망과, 그 희망이 연달아 붙어 있을 때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환희 때문에 도저히 그 지옥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쓴다는 것, 그것은 크레이지 아케이드를 하며 터트리는 물풍선보다도 더 강렬한 것이었다. 글을 쓰며 나는 일생에서 몇 안 되는 살아있음의 너울을 느꼈고, 그것을 인지한 순간부터는 파도에 올라탄 것처럼 쓰는 것을 중단할 수 없어졌다.


머리가 굵어진 내가 물풍선을 터트리는 것보다 글 쓰는 것을 선택하자 친구들은 어리둥절해하더니 내가 제정신으로 돌아올 때까지 자기들끼리 게임을 하고 있겠다고 했다. 돌이켜보면 나의 선택은 친구들과 나를 차별화하는 행위였다. 그러니까 나는 남들과 죽을 만큼 똑같아지려 하면서 남들과 죽을 만큼 다르고 싶어 했던 것이다.


나는 친구들의 위로에도 회복하지 못했다. 쓰는 행위에 대한 나의 분명하고 뚜렷한 중독증세는 나아지지 않았고, 그 뒤로 나의 지난하고 고통스러운 인생은 오직 글을 쓸 수 있는 시간과 장소를 찾아 헤매는 것이 전부가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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