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무엇을 놓치고 있는가
나는 당시에 너무 돈이 없었기 때문에 여자들의 얼굴을 거의 쳐다보지도 못했다. 간혹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어도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내 처지를 생각하면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무렵에 길에서 나를 불러 세웠던 여자(와 남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나를 지나쳐갔다가 다시 돌아와서는 만나는 사람이 없다면 연락하고 싶다고 말을 걸어왔고(거짓말처럼 모두가 똑같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어색한 웃음으로 말끝을 잔뜩 흐린 거절을 하고 돌아섰다.
그런데 그 시기에 그렇게 몇 명을 돌려보내고 나니 불현듯 무언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이상한 것이 발목에서부터 타고 올라와 덩굴처럼 내 몸을 끈질기게 잡아당겼다.
나는 지금 무엇을 놓치고 있는가?
나는 끝없는 실패로 정신이 혼미해진 데다 온 세상이 나에게 행하는 거부에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나에게는 실체적이고 현실적이며 달성 가능한 과제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것이다.
내 박살 난 인생이 맞춰질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진작에 이랬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사람과 연결되어야 한다. 연애는 적어도 지금 같은 무응답이나 거절만 반복되지는 않을 것 같았다. 하여튼 사람이 잘못된 선택 속에 있다 보면 이렇게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초조하게 불안했고 과도하게 울적했다. 무엇 하나는 갖추어야 할 것 같았고, 어느 것 하나는 사람처럼 살아야 할 것 같았다.
연애는 물과 피처럼 인간을 이루는 필수적인 요소가 아니다. 모든 사람이 혼인이라는 법적 요건을 구비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이 살을 맞대고 서로의 어깨에 이마를 비비는 행위에는 연애와 결혼을 넘어선 무언가, 그러니까 경이로운 유대와 다정한 안식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는 그 조각이 빠져 있었다.
그때는 이러다가 연애도, 결혼도, 소설도, 아무것도 성공하지 못한 채 파삭 늙어버릴 것 같았다. 나는 이 나라에서 그 정도로 눈에 띄는 사람이 될 자신이 없었다. 그 자체가 아버지의 생존 제1원칙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중년의 위기는 받고 결혼의 기회는 희미해질 억울함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무렵에 고등학교 동창들이 줄줄이 결혼을 했고, 입사동기들이 차례차례 결혼식장으로 떠나갔다. 나는 조급해졌고 주변에 소개팅을 졸랐으나, 이미 되지도 않는 소설을 쓴다고 인간관계가 모조리 파탄난 후라 소개를 부탁할만한 사람도 거의 없었다. 결국 거의 유일하게 남은 친구 태원에게 다급하게 연락을 했다.
"요즘 남자친구 없는 여자가 어디 있어?" 태원이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모조리 없어졌을까?" 내가 멍하니 말했다.
"공룡이냐." 태원이 심드렁하게 말하고는 잠시 뜸을 들였다. "한 명 정도 생각난다."
"나 소개해줘." 내가 즉시 말했다.
"제정신이야? 부모의 원수에게도 너는 소개 안 시켜줘." 태원이 꾸짖었다. "남의 집 딸한테 그게 할 짓이야?"
"그럼 다른 여자 찾아줘."
"내가?"
"응."
"그냥 그 애 소개해줄게, 내 인생도 아닌데..."
그렇게 해서 태원의 이기적인 성정 덕분에 천만다행으로 소개팅 자리가 마련되었고, 나는 카페에 미리 나와 앉아 있는 세희를 보자마자 짐작할 수 있었다.
내 운으로는 만날 수 없는 여자였다.
세희는 아주 미인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눈이 토끼처럼 맑았고 코와 입은 오밀조밀하고 동그란 데다 얼굴이 작고 갸름하여 귀여웠다. 나보다 세 살 어리고, 학교를 졸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며, 지금은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고 했다.
세희는 첫 만남에서부터 대놓고 내 외모가 마음에 든다고 했다. 나는 세희와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고맙다고 중얼거렸다. 세희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내 얼굴이 왜 마음에 드는지 대뜸 프레젠테이션을 하기 시작했다.
"이마가 고원 같고 눈썹뼈가 입체적이에요." 세희가 또박또박 말했다.
"... 고원... 눈썹, 뭐라고요...?" 내가 더듬거렸다.
"이마에서 눈썹뼈를 지나서 코로 떨어지는 선이요. 뭔지 모르세요?"
"네..."
"저는 코가 예쁜 사람을 좋아해요. 제 코가 별로거든요." 세희가 단칼에 말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세희 씨 코 예뻐요." 내가 로봇처럼 즉시 말했다.
"이거 제 코 아니에요." 세희가 당당하게 말했다.
"아유, 얼굴에 붙어있기만 하면 되지 누구 코인지가 중요한가요." 내가 혼이 나가서 지껄였다.
"저는 얼굴만 봐요." 세희가 눈 하나 깜짝 않고 말했다. "잘생기기만 하면 돼요. 쉽죠?"
세희는 당돌하게 두 번째 만남의 장소를 정해주었다. 무슨 프랑스 가정식 레스토랑이었는데 어느 집구석인지 가정식이 8만 원씩 했다. 한 젓가락에 거의 4천 원씩인 파스타를 먹으며 세희는 계속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세 번째로 만났을 때 남들 다 가는 한강에 갔고, 그날 저녁에 손을 잡고 내 자취방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