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순정 Jul 02. 2024

결혼하지 않을 거면 그만 만나는 게 좋겠어

괘씸함, 초조함, 그리고 비상대책

세희는 내 자취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걸터앉더니 할 말이 있다고 했다. 나는 더러운 바닥에 어색하게 앉았다.


"왜 바닥에 앉아요?" 세희가 대뜸 물었다.

"어... 글쎄요..." 내가 우물거렸다.


세희는 나를 뚫어져라 보더니 갑자기 자기 얼굴이 어떻냐고 물었다.


"떻긴요, 예쁘죠." 내가 신히 말했다.


세희는 못마땅한 기색으로 입술을 댓 발 내밀었다. 나는 신교대 입소 첫날처럼 긴장해서 등을 세워 앉았다. 세희는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팔짱을 꼈다.

 

"끝이에요?" 세희가 딱딱하게 말했다.

"좋아합니다." 내가 엉겁결에 말했다.


세희  순간 너그러워졌다. 카로웠던 눈매가 부드럽게 내려앉 얼굴에 온화한 빛이 감돌았다. 근하게 풀어진 어깨에는 내밀한 감정을 응답받은 사람 특유의 성취와 안도가 떠 있었다. 


그러니까 본인의 장황한 설명에 따르면 눈은 고등학교 때 쌍꺼풀 수술을 했고, 코는 취직하기 전에 간단한 시술인지를 했다는 것이었다. 얼굴에 무슨 그림을 그렸든 나는 잘 알지도 못했고, 솔직히 그 순간에는 눈이 세 개라고 했어도 상관이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그런 이야기를 심호흡을 하고 털어놓는 모습 때문에 나는 세희를 못 견디게 사랑하게 되었다.


세희는 고가의 명품은 아니지만 나름 가격이 나가는 액세서리와 옷, 가방과 구두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는데, 겉으로는 사치스럽게 보일지 몰라도 알고 보면 그렇게 야무지고 똑부러질 수가 없었다.


세희에게는 자기만의 분명한 가치와 기준이 있었다. 무조건 비싼 것을 찾거나 예쁜 것을 고르지 않았다. '무엇을 위해 소비하는가'라는 최종 목표를 언제나 생각했. 챔스 결승전에서의 케빈 데브라위너보다 넓은 시야였다. 


세희는 식빵 하나를 살 때도 실속 있는 것으로 마련했고, 은행에서 특판으로 나오는 다부진 적금은 죄다 꿰차고 있었으며, 이어리에 버스비 1,200원까지 기재하여 본인의 가계를 옹골차게 꾸려나갔다. 나 같은 놈에게 소개해주기 아까운 여자라고 태원이 투덜댄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세희는 세 딸 중 막내딸로, 무슨 일이 생기면 무조건 열 살 터울의 큰언니와 전화를 했다. 친구 관계도, 직장도, 연애도, 결혼도 모두 큰언니와 의논했다. 세희는 나와 다툴 때도 중간중간 큰언니와 전화를 하러 갔다. 전화를 끊고 나면 이제야 방법을 알았다는 의기양양하고 자신만만한 얼굴이 되어 큰언니가 말해준 논리로 나를 공격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렇게 허리춤에 손을 얹고 배를 내밀며 "우리 큰언니가!" 하는 것마저 우습고 귀여웠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 모든 콩깍지가 원기옥처럼 모여 소위 '결혼을 할 때'라는 순간이 나에게도 왔었던 것 같다


세희는 로망이 많았다. 사귈 때는 서로 존댓말을 사용하자고 했고, 둘이 공유하는 자물쇠 달린 비밀일기를 쓰자고 했다. 주말에는 지역 축제 같은 곳을 돌아다니되 가끔씩은 더현대도 가야 하며, 주기적으로 둘만의 사진을 찍어야 하고, 금요일 밤에는 유명한 칵테일바에 가서 친구들과 어울려 놀자고 했다. 이트 비용은 번갈아 내자고 했고, 평소에는 집에서 넷플릭스를 보며 놀아 기념일에는 좋은 호텔에서 잤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에게는 전부 낯선 것들이긴 했으나 그때는 어떻게 하면 세희와 사귈 수 있을지에 대해서만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세희의 로망을 모조리 수락했다. 하다 보니 사실 그렇게 어려운 것들도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세희와 사귀기 위해 수행해야 하는 게임 퀘스트 같은 것이었고, 무엇보다 달성하면 세희의 행복이라는 막대한 보상이 주어졌기에 나는 세희와 찍은 인생컷 사진을 날마다 분홍색 다이어리에 열심히 풀로 붙여댔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세희의 친언니나 친한 친구들이 하는 연애의 행동 양식을 똑같이 따라한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되자 나는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것이 세희의 당당한 주체성이나 반짝거리는 개성을 바래게 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세희가 그것들을 모방하여 궁극적으로 이르려하는, 미숙한 내가 가늠하지 못하는 어떤 목표의 고지가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연애의 종착지 무엇이 있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세희보다 나이만 두어 살 많았을 뿐, 나는 계산기로 우리 둘의 월급을 합쳐보는 세희의 옆에 얌전히 앉아("앉아, 강아지.") 아직도 고속버스와 1호선이 싸우면 누가 이길지만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나는 세희의 로망이 점점 구체적이고 담대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사귀고 시간이 조금 지나자 나는 세희의 얼굴과 몸에 익숙해졌고, 다시 집에 혼자 틀어박혀 나의 실패를 관찰하는 행위를 재개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여전히 모든 공모전에서 떨어졌고 출판사에서 실시간으로 거절당하고 있었다. 세희와 주말마다 놀러 다니느라 작품 노트는 두 달 전에 열어본 것이 마지막이었고, 통장에는 거의 돈이 남아있지 않았다. 세희도 나도 로망을 실현하는데 돈이 그렇게까지 많이 들어간다는 것은 몰랐기 때문에 우리는 어느새부터인가 암묵적으로 외출을 줄이고 있었다.


매일 만나던 세희를 일주일에 두  만나게 되자 나는 다시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변한 것이 아니라 원래의 나로 관성처럼 돌아가려는 것이었고, 어차피 세희는 나의 일부가 되었으니 다시 내 동굴로 들어가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것으로 세희가 느낄 괘씸함과 초조함, 그리고 내놓을 비상 대책에 대해서는 생각도 하지 못한 채였다.


그리하여 나 자신에게 다시 집중하려던 찰나, 세희는 공격하듯 나에게 이별과 결혼 중 하나를 택하라고 통보했다.




* 커버이미지 : https://naver.me/5nPr50d8

이전 05화 내 운으로는 만날 수 없는 여자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