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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정 Jul 05. 2024

부모님 지원 없이 어떻게 결혼을 해요?

약혼이란 케이스를 씌우지 않은 핸드폰 액정 같은 것

내가 회사로 출근하면 세희는 카페에서 일을 했다. 결혼을 한다고 하자 혹여 그만둘까 봐 불안했는지 사장이 허둥지둥 시급을 500원 인상해 주었다. 


세희는 특유의 밝고 당당한 기운과 밉지 않은 빠른 계산과 야무지고 친근한 웃음으로 벌써  꽤나 확보한 것 같았다. 대학교에 다닐 때 교내 카페에서 꾸준히 아르바이트를 했다고 했고, 실제로도 커피에 관심이 많아 바리스타 자격증을 가지고 있었으며, 조만간 자기 카페를 차리겠다는 야심 찬 꿈도 꾸고 있었다.


워낙 다부지게 일을 해서 나는 세희의 직장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줄 알았다. 어느 날 세희가 이러다가 돌아버릴 것 같다고 악을 쓰고 나서야 나는 그 카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알게 되었다.


세희를 미치게 하는 것은 직장인들의 아침 회의나 점심 식이 오후 환기를 위한 수백 잔의 아메리카노 제조가 아니라 같이 근무하는 남자 매니저였다.


그는 처음부터 세희를 싫어했다고 했다. 세희가 초반에 했던 몇 개의 실수들이 그에게 세희에 대한 선입견을 심어준 것 같았다.


그는 세희를 '일을 못하는 사람'이라고 했고, '아무리 가르쳐도 알아듣지 못한다'라고 했으며, '자기가 사장이었으면 진작에 잘랐다'라고 큰소리로 말하고 다닌다고 했다. 세희가 커피를 내리는 방식, 영수증을 구겨 버리는 습관까지도 못마땅해하며 세희가 보는 앞에서 한숨을 크게 쉬거나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는 것이었다.


세희는 그 매니저 때문에 출근을 점점 고통스러워했고, 그 남자의 비웃음 섞인 혼잣말이며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향해 푸리는 미간이 명백한 폭력이라고 나에게 하소연했다.


상황을 알고 나니 세희가 여간 걱정되는 이 아니었다. 업무가 아니라 사람 때문에 괴로운 미친 직장이라니,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만둬버려요."

"강아지! 결혼을 해야 하는데 어떻게 일을 그만둬요?" 세희가 꾸짖었다.


도대체 이 여자는 어떻게 이런 책임감을 가지고 있는 걸까?

나는 이 귀여운 가장을 돕기 위해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 보았다. 그러나 나 역시 이런 경우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나는 언제나 하급자였고, 관리자가 나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은 내게 숨 쉬듯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세희가 그런 취급을 받는 것은 부당했으므로, 나는 세희의 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심했다.


이것이 화근이었다.


나는 세희에게 초반에 했던 실수가 어떤 것이었는지 물어보았다. 그리고 과일이 갈리지 않아 세희가 믹서기에 물을 약간  매니저가 가정교육 운운했다는 대목에서, 세상에는 참 다양한 종류의 하찮은 인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외에 내가 알게 된 몇 가지 소소한 사실은, 매니저의 시선을 느끼고 긴장한 세희가 자기도 모르게 같은 실수를 반복하거나, 이제 일이 익숙해졌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여유를 부리다가 실수를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세희가 잘못한 두어 가지 짚었다. 그리고 매니저를 직급으로 누를 수도 없고 직장을 그만둘 수도 없으니, 그에게 수긍하는 척해서 관계를 회복하는 성숙한 방법을 사용해 보자고 제안했다.


그것이 우리의 첫 싸움이었다. 세희는 내가 제시한 방법을 오하는데 그치지 않고 내 태도를 끔찍하다고 표현했다.


"엄마랑 언니들은 내 편을 들어주고 그 사람을 욕했어. 그런데 당신은 지금 나를 탓하고 있잖아. 잘못이라고? 이게 내 잘못이라고?" 세희가 눈물을 흘리며 나를 노려보았다.


뒤통수에 을용타를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세희 씨, 나는 이걸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나를 내몰았잖아요! 내가 수그리는 척도 못하고, 윗사람 기분도 못 맞추고, 대놓고 불평불만이나 해대는, 생각 없고 한심한 요즘 애들인 것처럼 말했잖아요!" 세희가 악착같이 짚어댔다.

"난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내 목소리가 덩달아 높아졌다.

"난 당신에게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것 같은 무조건적인 애정을 달라는 게 아니에요!" 세희가 펑펑 울며 소리를 질렀다. "나는 그냥 당신이 내 편이라는 느낌이 필요하단 말이야!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잖아..."




그날 이후로 나는 세희가 말하는 '내 편'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세희는 그날의 싸움이 없었던 일인 양 그 뒤로 한 번도 그 이야기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세희는 평소처럼 바지런하게 반지하 원룸을 쓸고 닦았고, 자기가 좋아하는 갈색 앞치마 차림으로 나무도마 위에서 양파나 감자를 썰었다.


그 일뿐 아니라 세희가 다니는 카페의 매니저 또한 우리에게 무언의 금기어가 되었다. 나는 다시는 세희가 그날처럼 분노하는 일이 없도록 극도로 조심하는 중이었고, 세희는 다정한 말투로 내게 고맙다거나 고생했다는 말을 자주 했다.


살림을 합치고 동거를 시작했으니 다퉜다고 기분대로 싸우거나 내킬 때까지 서로를 차단할 수 없었다. 


우리는 결혼을 약속한 사이였고, 약혼이란 마치 케이스를 씌우지 않은 핸드폰 액정처럼 극도로 연약하여, 떨어뜨리는 순간 처참하게 깨져버리는 형태의 것이었다. 우리는 관계가 박살 나지 않도록 조심하고 있었으나 한번 떨어진 액정에는 지울 수 없는 선명한 금이 가 있었다.


나에게 주어진 임무인 화장실 청소를 끝내고 막 거실에 앉아 세희가 알려준 방식대로 수건을 엉망진창으로 접고 있던 때였다.


"강아지." 세희가 감자를 썰며 불쑥 말했다.

"응?" 나는 화장실 청소에 대한 칭찬을 기대하며 얼른 뒤를 돌았다.

"얼마나 지원해 주실 수 있는지 부모님께 여쭤 봤어요?" 세희가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지원이라니요?" 내가 멍하니 물었다.

"우리 결혼에 얼마나 도움 주실 수 있는지 각자 집에 이야기해 보기로 했잖아요." 세희가 부드럽게 말했다.

"이야기를 하기가 좀... 우리 집은 나에게 주실 수 있는 게 없어서..." 내가 어색하게 말했다.

"그래도 받을 수 있으면 받아야지요. 부모님 지원 없이 결혼을 어떻게 해요?" 세희가 눈을 깜박거렸다.

"우리가 각자 모은 돈으로..."

"당신은 오천만 원도 못 모았잖아요." 세희가 거침없이 말했다.

"그렇긴 한데..."

"결혼식장과 내 드레스와 당신 예복과 반지만 해도 벌써 몇 백이에요. 그래서 내 친구들은 전셋집이나 차는 양가 부모님이 조금씩 도와주셨대요."


내 부모가 돈이 없다는 말이 도저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강아지, 부모님께 말씀드리면 어떻게든 우리를 도와주려 하실 거예요.  부모님은 세도 많으시고 진작에 은퇴하셔서 소득이 없지만, 언니들에게 해 주셨듯이 내가 결혼할 때도 예단이랑 당신 시계는 꼭 해주신다고 했어요. 그리고 언니들도 우리에게 돈을 보태주려고 알아보고 있대요." 세희가 상기된 얼굴로 눈을 빛내며 말했다.

"우리 부모님은 도와주시기는 힘들 것 같아요." 내가 간신히 말했다.


세희가 나를 바라보았다.


"한 푼도요?" 세희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나도 다 컸고 직장도 있는데 결혼하겠다고 부모님에게 돈을 달라고 하는 게 불편해요. 게다가 내 동생은 아직 학교를 마치지도 않아서..."

"그럼 우린 양가 지원 없는 걸로 해요." 세희가 빠르게 말했다.


나는 미안하면서도 조금 후련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세희는 다시 감자를 썰기 시작했다.


세희의 큰언니에게서 전화가 걸려온 것이 그즈음이었다.



* 커버이미지 : https://www.tiffany.kr/engagement/engagement-r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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