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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정 Jul 04. 2024

혼전 동거의 모든 것

나는 당신에게 실망할 거고 당신은 내가 지루해질 테니까

"결혼하지 않을 거면 그만 만나는 게 좋겠어요." 세희가 결연하게 말했다.


"갑자기?" 내가 당황해서 더듬거렸다.

"나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이렇게 계속 기다릴 수는 없어요." 세희가 냉정하게 말했다.

"나이가 있다니요?" 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곧 서른 살이 돼요." 세희가 심각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건 나도 마찬가지인데..."

"서른이 넘도록 결혼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어차피 헤어지게 될 거예요. 나는 당신에게 실망할 거고 당신은 내가 지루해질 테니까요. 나는 서른이 넘어서 다시 결혼할 사람을 찾아 헤매겠죠. 간신히 새로운 연애를 시작하면 금방 서른셋이 될 거예요. 그 사람과도 결혼하지 못하고 헤어지면 눈 깜짝할 사이에 마흔이 되겠죠." 세희가 요목조목 따졌다.

"아니 서른셋에서 왜 갑자기 마흔,"

"결혼하지 않을 거라면 헤어져요. 나는 결혼할 사람을 찾겠어요." 세희는 내가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다부지게 말했다.


최후통첩이었다.


나는 즉시 머릿속으로 아버지의 생존 제2원칙('못하는 것은 못한다고 해라')을 떠올렸다. 그러나 저히 그것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다. 생존 제1원칙('튀지 마라') 벽하게 위배되기 때문이었다. 너무나 과분한 세희를 만나는 주제에 감히 세희의 청혼을 거절하는 미친놈이 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세희를 향해 팔을 벌렸다. 팔짱을 끼고 서 있던 세희는 그제야 얼굴이 환해져서 내 품으로 뛰어들었다. 새하얘진 머릿속에서 아버지의 얼굴('야 이 멍청한...')이 천둥처럼 울렸다. 어떡하라고요, 몰라요, 식장에 들어가는 미래의 내가 알아서 하겠지...


세희는 즉시 결혼에 대한 환상들을 내비쳤다. 프러포즈는 너무 공개적인 장소가 아니어야 하고, 결혼식은 4월이나 9월에 올려야 하고, 드레스는 어깨가 드러나며 치마가 풍성한 것이어야 하고, 예식장에는 은은한 자연광이 들어야 하고, 신혼집은 이십 평대의 새 인테리어에 가전은 우드톤이야 하고, 아이를 낳으면 돗자리와 라탄백을 들고 흰 모자에 원피스 자락을 날리며 피크닉을 간다는 것까지 세분화되어 있는 정교한 묘사였다. 내 생각에 작가를 해야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세희 쪽이었다.


결혼 준비를 시작한 세희는 매일같이 인테리어 어플과 결혼준비 카페를 신문처럼 정독했다. 세희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을 야무지게 챙겨나갔고, 나는 이 관계와 우리의 약혼을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하게 여기는 그 여자를 죽도록 사랑했다.


그렇게 세희는 내가 자취하던 전셋집으로 들어왔다. 결혼을 하게 될 줄 꿈에도 몰랐던 나 이미 전세계약을 연장한 , 당장 신혼집을 구할 수  때문이었다.


"여기 살면서 돈을 모으고, 다음 집은 평수를 넓혀서 방  칸짜리 아파트로 가면 돼요." 세희가 알토란같이 말했다.

"둘이 사는데  칸씩이나?" 내가 영문을 모르고 물었다.

"우리도 얼른 아기를 낳아야지요." 세희가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나는 놀라서 세희의 어깨를 잡았다. 이렇게 작고 가냘프고 연약한 세희가 어떻게 아기를 낳는단 말인가? 온 세상에 기가 막힌 일만 일어나고 있지만 이것은 도저히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세희는 토끼처럼 동그란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아, 그 순간은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반지하 자취방에는 갑자기 커튼이 달렸다. 세희는 집에 있는 모든 공간에 아기토끼가 드나드는 문 같은 아기자기한 헝겊달아놓았다. 바닥에 굴러다니던 잡동사니들은 충전기 하나까지 서랍장에 일렬종대로 수납되었다. 세희는 나에게 베개를 마지막으로 언제 빨았느냐고 물었다.


"베개를 빨다니?" 내가 어리둥절하게 되물었다.


내 대답과 동시에 내 오래된 베개는 집에서 즉시 퇴출되었다. 사를 다닐 때마다 피난민처럼 등에 지고 군대 모피보다 해진 뽀로로 이 역시 세희에게 갱생 불능 판정을 받았다. 음 날, 호텔서나  것 같은 흰 침구가 집으로 배송되었다.


세희는 앞치마도 새것, 도마도 새것, 냄비도 새것, 하다못해 뒤집개까지 전부 새것으로 장만했다. 그리고는 그 좁은 원룸 부엌에서 달걀이나 스팸을 열심히 구웠다.


세희는 당근과 양파를 썰어 어찌어찌 카레를 만들어냈고, 시판 육수와 된장으로 긴가민가하며 첫 된장찌개도 끓여냈다. 사우나처럼 익어버린 콩나물에 고춧가루를 들이부어 무치고, 생양파와 소시지를 탈 때까지 볶아댔다. 큰언니가 담근 김치로 간이 되지 않은 김치볶음밥을 하고, 마늘과 새우와 페퍼로치노로 설익은 파스타도 만들었다. 세희는 요리에 필요하다며 기름까지도 올리브유인지 아보카도유인지 하는 새것으로 장만했고, 나는 신이 나서 위를 새것으로 장만했다.


세희가 만든 계란말이는 새카맸고 된장찌개는 싱거웠고 파스타는 언제나 양조절에 실패에 끝없이 증식했지만 나는 날마다 식탁에 얼굴을 박고 밥을 두 그릇씩 먹었다.


자취만 년을 하다가 집밥을 먹자 눈이 돌 것도 있었고, 구슬땀을 흘려가며 정직한 음식을 만드는 세희가 귀엽고 고마워서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 밥이 정말로 말도 안 되게 맛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식사시간마다 세희의 반찬 옆에 즉석밥을 쌓아놓고 먹었다. 둘이서 앞치마를 매고 소꿉놀이를 하는 것이 월드컵 토너먼트보다 재미있던 날들이었다. 다만 세희는 밥솥에 밥을 짓는 로망을 아직 실현하지 못했기 때문에 즉석밥은 약간 탐탁지 않아 했다.


화장실에 있던 누구 돌잔치며 어디 체육대회가 수 놓인 원색 수건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수납장에는 푹신한 흰색 타월 스무 장이 차곡차곡 쌓였다. 세희는 아이깨끗해를 참을 수 없었는지 고급 핸드워시도 가져다 놓았다.


집에서 언제나 좋은 향기가 났고 귀여운 사람의 온기가 느껴졌다. 동거를 시작하자 팔리지도 않는 글 같은 것은 더욱 쓰기 싫어졌다. 원룸 반지하에서 세희와 맨몸으로 끌어안고 있는 것만이 행복이고 경이였다.


처음으로 내 삶이 안정된 궤도에 올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한 사람들이 이런 감정을 매일 낀다고 생각하자 절로 탄성이 나왔고, 내가 기혼의 계단에 선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나는 가정을 꾸려 남들처럼 살게 된다는 것에 크게 동요했고 세희는 자기 혼자 결혼준비를 하는 것 같다며 나를 타박했다.


그런데 아주 이상한 감정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왔다. 세희와 넷플릭스를 보며 저녁을 먹고, 침대에 누워서 각자 핸드폰으로 유튜브를 보다가 잠들면 몹시 편안했으나, 무언가 기묘하게 뒤틀린 것 같았다. 나는 섬뜩한 불안을 느꼈다. 


'이렇게 보통의 인간으로 끝나는 것인가?'


이게 무슨 생각인가. 얼마나 분에 겨운 소리인가. 내 운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만날 수 없는 여자가 나를 이렇게나 귀여워하는데 이 얼마나 배은망덕한 사고인가. 저녁마다 집에서 찌개를 끓이고 사랑하는 사람의 냄새가 나는데  무슨 괘씸한 작태인가.


'언제 마지막으로 글을 썼던가?'


글로 나를 알리겠다는 열망, 글로 먹고살겠다는 소망은 여전하다. 그저 다시 글을 쓰기만 하면 지 않은가?


'이토록 편안한데 왜 글을 쓰려 하는가?'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세희는 등을 돌리고 곤히 잠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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