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하려면 돈 많이 들어요."
한밤중에 전화를 한 것치고 세희의 큰언니는 고요하고 침착했다. 카랑카랑한 세희와는 정반대였으나, 왠지 세희가 열 살 정도 나이가 더 들면 꼭 이런 어른이 될 것 같았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세희가 시키는 대로 화장실 청소나 할 줄 알지 내가 결혼이라는 번잡하고 치열한 세리머니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단 말인가?
"혹시 우리 세희가 웨딩드레스니 웨딩사진이니 결혼식장이니 하는 것들을 비싼 것으로 하고 싶어 하나요?" 세희의 언니가 조용히 물었다.
"세희 씨를 모르십니까?" 내가 순간 욱해서 받아쳤다.
세희의 큰언니가 침묵했다. 그제야 열 살 많은 어른이라는 생각에 아차 싶어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왜인지 저쪽은 기분이 미묘하게 풀어진 기색이었다.
애인의 가족과 통화하는 것은 난생처음이었다. 어떻게 전화를 받아야 하는지는커녕 뭐라도 불러야 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나는 불현듯 내게 세희의 가족에게 잘 보이고 싶은 은밀한 소망이 있었음을 깨달았다.
"결혼식에 드는 비용을 줄인다고 하더라도, 둘이 살 집은 구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세희의 언니가 차분하게 물었다.
"안 그래도 그렇게 하려고..."
"집을 구하려면 돈이 있어야 하잖아요?"
"그..."
"그런데도 다른 일을 더 하지도 않고 여섯 시에 칼같이 퇴근한다면서요."
이 사람은 뒷구르기를 하면서 봐도 세희의 언니가 맞다.
"제가 퇴근 후에는 개인적으로 하는 것이 있어서..." 내가 말끝을 흐렸다.
"책을 쓴다고 말만 하고 거의 안 쓴다던데." 못마땅한 목소리였다.
아니 서로 이런 것까지 이야기한단 말인가?
"... 다른 일이나... 안 되면 이직이라도 알아보겠습니다." 내가 엉겁결에 말했다.
"그럼 계속 이백만 원 주는 그 회사에 있으려고 했어요?" 그가 언짢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세희의 큰언니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결혼은 애들 장난이 아니에요. 부모님께 다시 한번 말씀드려 봐요."
"저희는 부모님 지원 없이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내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여기서 물러나면 끝장이다. 마치 내 조상이 남긴 생존의 DNA가 부르짖는 것 같았다. 거란이니 몽골이니 하는 잡것들이 침략해 올 때도 이 DNA는 '배우자의 가족에게 선 긋기'라는 직무를 맡아, "처형, 몽골의 살리타가 쳐들어오고 있기는 하나 초가삼간은 저희 스스로 마련하기로 말을 끝냈으니..." 같은 자기 소임을 다해서 후손의 후손의 후손의 후손인 나까지 살아남게 만든 것이다.
"제부, 나는 남자가 집을 해와야 한다는 주의가 아니에요. 설령 해온다고 한들 요즘 누가, 어떻게 서울에 집을 구하겠어요?" 세희의 큰언니의 목소리가 나를 구슬리듯 부드러워졌다.
"저는 세희와 이야기하겠습니다." 마음이 약해졌지만 다시 한번 밀고 나갔다.
"그 세희가 제부와 이야기가 안 통한다고 오늘 울면서 전화했어요. 내가 속에 천불이 나서 도저히 잘 수가 없던데요."
윤 씨 자매들을 리자몽과 파이리로 만드는 나...
"제부, 나는 남편과 아무것도 없이 결혼했어요." 세희의 큰언니가 가만히 말했다.
"사랑만으로 결혼하면 살 수 없습니까?" 내가 문득 물었다.
"아뇨, 죽을 것 같은 후회가 올 뿐이에요." 그가 속삭였다.
나와 세희의 언니는 서로 수화기를 붙잡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있었다. 불현듯 내가 세희와 통하듯이 세희의 언니와도 어느 방면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부, 그래서 하는 말이에요. 몇 억까지는 우리도 없어요. 다만 몇 천만 원 정도는 각자 어른들께 말씀드릴 수 있잖아요."
내 부모님은 대출을 받지 않고서는 당장 그 몇 천만 원을 구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말이 없자 세희의 큰언니는 점점 단단하게 성을 쌓아갔다.
"서울 근교로 빠져서 작은 아파트 전세라도 들어가야지요. 아무리 그래도 신혼을 6평짜리 반지하 원룸에서 시작하는 것은 말이 안 돼요. 우리 부모님도 굉장히 속상해하세요."
세희의 부모님 이야기에 갑자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에게는 세희의 가족에게 잘 보이고 싶은 소망뿐 아니라 세희의 부모님이 귀여워하는 사위가 되고 싶은 바람도 있었던 모양이었다. 가슴 언저리가 핀으로 찔린 것처럼 따가워졌다. 이미 시작부터 망쳤다는 울적함, 나에 대한 실망과 원망을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 그리고 망가진 관계를 회복할 수 없을 것이라는 무서운 절망이 몰아쳤다.
"워낙 옛날 분들이기도 하고, 얼굴도 안 보고 데려간다는 셋째 딸이라 늦게 결혼했으면 싶은 마음도 있으실 거예요. 나도 마찬가지예요. 세희가 결혼해서 나처럼 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저렇게까지 좋다는데 어떡하겠어요. 좋아서 눈물이 난다는데 어떻게 해요. 나랑 둘째도 세희 결혼에 어떻게든 보태려고 적금도 깨고 여기저기 알아보는 중이니까 제부도 부모님께 잘 말씀드려 줘요."
나 스스로에게 자괴감이 들었다. 천만 원, 아니 오백만 원이라도 더 있다면. 그래서 세희가 나 몰래 찾아보던 화려한 웨딩드레스라도 마음껏 고르게 해 줄 수 있다면...
"내가 이런 얘기했다고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아 줘요." 그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제가 면목이 없습니다." 내가 솔직하게 중얼거렸다.
"늦은 시간에 전화해서 미안합니다. 쉬어요." 그는 덤덤하게 말하고 정말로 전화를 뚝 끊었다.
나는 밤새 잠들지 못하고 뒤척였다. 희미하게 동이 틀 무렵, 울적하게 패배를 곱씹던 내 생존의 DNA가 다시 우뚝 일어났다. 이렇게 된 이상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돈, 돈이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