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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정 Jul 12. 2024

불행한 예비부부들을 보며 느끼는 안도감

나는 원하지 않는 일로 나를 소진하고 있어

결혼 날짜가 가까워지고 있었고 세희는 어느 때보다도 내게 헌신했다.


세희는 새벽 여섯 시에 일어나 정성스럽게 내 점심과 저녁 도시락을 쌌다. 점심은 회사 사람들과 사 먹으면 된다고 했지만 세희는 엄한 얼굴로 종로의 식당 밥값과 도시락에 들어간 식재료값을 비교했다. 그러면서 내 부서에 있는 어린 여직원 두 명이 도시락을 싸 오지 않고 사람들과 나가서 함께 점심을 사 먹는다는 것도 재차 확인했다.


나는 내가 점심에 밥을 사 먹으면서 지출하는 만 원을 세희의 귀한 아침잠, 그리고 둘이 다 먹지 못해 버리는 식재료값과 비교하자고 했지만 세희는 거절했고 하는 수 없이 나는 도시락을 싸 다녔다.


세희는 큼지막한 텀블러도 사 주었다. 회사 탕비실에 있는 커피를 텀블러에 담아 마셔 커피값을 아끼라는 것이었다. 큰맘 먹고 좋은 텀블러를 사주는 것이라고 했으나 텀블러는 디자인부터 색상까지 완전한 세희의 취향이었다. 크림색 말고 혹시 파란색은 안되냐고 물었지만 세희는 역시 거절했고 나는 군말 없이 텀블러를 가지고 다녔다.


세희는 여전히 결혼준비 카페에서 틈틈이 혼수와 살림을 공부했으며, 각종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의 신혼식탁에 올라오는 예쁜 요리들을 섭렵하고 있었다.


세희는 날마다 할 일이 너무 많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고, 친구들과 자주 통화를 하며 하소연을 했으나, 거기에는 결혼을 하게 되어 안도하는 사람 특유의 자랑이 깔려 있었다.


세희의 악착같은 생활력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본인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카페에서 육체노동을 하고 퇴근하면서 언제나 욕실에 수건이 떨어지지 않도록 칼같이 빨래를 했고, 어떻게든 식재료로 직접 음식을 요리해 집밥 사진을 매일 기록했다.


내 도시락에 넣을 반찬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새벽에 처음부터 음식을 다시 만들었고, 내가 항상 세탁소에 맡기던 셔츠를 기어코 직접 다렸으며, 아침마다 악착같이 내게 정장 마이를 입혀주었다.


세희는 벌써부터 자기가 아기를 낳으면 봐 줄 사람이 없어서 걱정된다며 내 어머니가 서울로 올라오시면 안 되겠냐고 시어머니를 전혀 불편해하지 않는 기특한 며느리처럼 물었고, 결혼한 언니들에게서 아기 옷과 장난감을 모조리 중고로 얻어올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했다.


세희는 오로지 이 헌신을 위해 사는 사람 같았고, 가정을 위해 희생하는 스스로에 대한 집착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였다.  


어느 날 밥을 먹으며 핸드폰을 만지는 세희를 흘끗 보다가 세희가 결혼준비 카페에서 누른 게시글들의 제목을 보게 되었다.


그제야 세희가 결혼준비 카페에서 정독하는 글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세희는 힘들어하는 예비부부들이 쓴 글만 골라서 보고 있었다. 파혼에 대한 고민, 상대의 거짓말과 외도, 부족한 돈과 폭력의 징후, 연락에 집착하는 시댁으로 인한 괴로움 같은 것들이었다.


나는 세희가 핸드폰을 내려놓고 반찬을 더 가져오기 위해 일어나는 동안 식탁에서 고개를 들지 않고 밥만 먹었다.


많은 것들이 세탁기 속 빨래처럼 뒤엉켜 돌아갔다. 나는 빨래가 끝나는 순간만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매일 파인애플을 잘랐다. 마지막으로 글을 쓴 지 거의 반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야근은 정신적으로 힘들지는 않았다. 그저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공정의 반복일 뿐이었다. 생각하지 않고 사고하지 않고 정해진 대로 손을 놀리기만 하면 되었다. 나는 오히려 편안함을 느껴버렸다. 뇌를 빼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세희와의 예비 결혼생활처럼.


문득 불안이 차오를 때마다 나는 지하 휴게실에서 차갑게 식은 도시락을 먹으며 생각했다. 지금이 아니면, 세희가 아니면 나는 영영 결혼을 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나 같은 것과 누가 결혼을 해주려 하겠는가. 나는 돈도 없고 차도 없고 집도 없었다. 


언제까지고 이렇게 살겠다는 것도 아니었다. 다시 돌아갈 것이다. 다시 공모전에 응모하고 출판사에 투고할 것이다. 바빠서 글을 쓰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그날도 그렇게 차가운 도시락의 뚜껑을 닫았다. 퍼진 파인애플이 되어 막차를 타고 막 눈을 감을 때였다.


무언가 꿈틀거렸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더욱 세게 감았다.


오지 말아야 할 것이 오고 있었다. 


나는 그 불쾌한 태동을 억누르기 위해 지하철 안에서 계속 눈을 감고 있었다. 집으로 가는 길이 평소보다 오래 걸리기를 바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나는 그때 이미 끝을 짐작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지하철에서 내리자마자 차가운 밤공기를 맞으며 달렸다. 파인애플로 절여진 넥타이가 세희가 좋아하는 드레스의 베일처럼 뒤로 흩날렸다.


나는 현관문을 벌컥 열고, 내가 올 때까지 졸음을 꾸역꾸역 참아가며 기다린 세희를 와락 끌어안았다.


바로 그 순간, 사랑하는 세희를 안는 순간, 아버지의 생존 제2원칙이 내 머리 위에서 불꽃놀이처럼 터졌다.


"나는 더는 못하겠어." 내가 작게 말했다.

"응?" 세희가 잠결에 눈을 떴다.

"나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어. 나는 원하지 않는 것에 나를 소진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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