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순정 Jul 11. 2024

회사에서 파인애플로 불리게 되었다

삼국지의 동탁도 이렇게 잔혹하지는 않았을 거야

나는 예비 신부인 세희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 그리고 해주어야 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세희의 큰언니는 내게 무례하게 굴지 않았고, 세희 역시 내게 여전히 다정했다. 야무진 자매들이었다. 자기 것을 챙기려는, 실속 있는, 똑 부러지는, 그런데도 그 모습이 밉지 않은 것이 그 집안의 내력인 모양이었다. 하기야 나는 그런 점 때문에, 내게 없는 그런 면 때문에 세희와의 결혼을 선택하지 않았나.


나는 결국 회사의 야간 업무를 지원했다. 퇴근하고 지하로 내려가 타 부서의 메뉴개발팀을 지원하는 일이었다. 머리가 하얗게 센 부모님이 내 결혼식 때문에 대출을 받고 다달이 이자를 갚느니,  내가 글 쓰는 것을 포기하고 밤에 일하는  백번 옳았다.


그렇게 나는 정장 차림으로 밤 일곱 시부터 열한 시까지 개 같은 파인애플을 썰기 시작했다.


나는 파인애플이 그렇게 지독한 과일인 줄 몰랐다. 파인애플을 손질하려면 먼저 쑥대머리 같은 대가리를 잘라내야 한다. 그리고 대머리가 된 파인애 세로로 세워 네 면의 가시 돋친 껍질을 잘라내고 가차 없이 무장해제를 시켜야 한다. 잔혹하기 그지없다. 국지의 탁도 이렇게까지는 안 했을 것이다.


알맹이만 덩그러니 남은 파인애플을 사등분으로 면 달고 상큼한 즙이 최후의 일격을 뿜어낸다. 어디 서인도제도에서 태어나 기를 쓰고 살아온 파인애플의 일생이 고작 내 결혼식에서 내 얼굴에 30분 동안 칠해질 물감놀이를 위해 마다. 


넥타이와 셔츠 위로 파인애플즙을 살포당한 나는 항상 손이 끈적한 여섯 살짜리 남자애가 된 기분으로 손에 줄줄 흐르는 진득한 즙을 털어낸다. 가끔 머리카락까지 젖으면 여기가 회사인지 파인애플 워터밤인지 헷갈린다.


몸통을 자른 뒤에는 가장 안에 있는 단단한 심을 제거해 파인애플의 남아 있는 정신머리를 뽑아버린다. 그러면 파인애플은 (나처럼) 심심 미약 상태가 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파인애플을 완전히 조사버리기 위해서는 그 부드러운 과육을 또 십육등분 인가로 낱낱이 잘라내야 다.


네 시간 동안 파인애플 백 통을 잘라야 지옥의 야근이 끝났다. 왜 메뉴개발팀 여사님들이 매일같이 손목보호대를 하고 다는지 알 것 같았다. 여사님들은 자식들이 전화를 통 안 한다고 내게 푸념을 하곤 했는데 그 새끼들은 잡아다 밤새 파인애플을 자르게 해야 한다. 


나는 회사에서 날마다 파인애플 냄새를 풍기는 천연 파인애플이 되었다. 사무실 직원들 뿐 아니라 다른 사무실의 과장들까지 가 지나가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인애플 냄새의 어디가 그렇게 기쁜지 여직원들은 대놓고 깔깔거렸고 신규 직원들은 나를 '파 대리'라고 .


나중에는 부장이 나에게 도대체 무슨 병할 향수를 쓰길래 회사를 근본 없는 윌리 웡카네 공장처럼 만들어놓냐고 호통쳤고, 나는 하는 수 없이 결혼할 돈을 벌고 있다고 실토했다. 그러자 최 부장은 약간 미안해졌는지 얼른 돈을 모으도록 도와주겠다며 매장 팀의 파인애플까지 모두 내게 넘기라고 지시했다. 개 같은 거...


여사님들은 넥타이를 뒤로 넘기고 셔츠 소매를 걷어올린 채 파인애플을 자르는 나에게 왜인지 자꾸만 결혼을 했냐고 물었다. 결혼을 하기 위해 경이 되었다고 하자 또 아기는 언제 가질 거냐고 두더지잡기에 나오는 두더지처럼 여기저기서 물어왔다. 혼이 나간 나는 아기를 가질 때 반드시 보고하겠다고 약속했고 여사님들은 만족스럽게 파인애플 기차를  도마 위에 올려놓았다.


아무튼 나는 그렇게 해서 야근 수당으로 한 달에 50만 원씩을 더 벌었고, 내 월급은 290만 원이 되었다.


세희는 내 야근 수당에 반색을 하며 감격스러운 듯 내게 저녁 도시락을 싸 주었다. 그러나 세희는 그 50만 원에 만족하지는 않았다. 만족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나를 북돋아주고 격려해 주는 것은 잊지 않았다. 정말로 헤어 나올 수 없는 여자였다.


나는 밤마다 파인애플과 사투를 벌이며 지하 휴게실에 혼자 앉아 차갑게 식은 도시락을 꾸역꾸역 먹었다.


보기 드문 사람이다, 세희가 매일 싸주는 도시락을 먹으며 나는 생각했다.


갑자기 어떤 책임감이 타의로 생겨버린 것 같았다. 이 가정만이 나에게 오롯이 중요한 것 같았다. 그러니 이렇게 글도 쓰지 않고 밤마다 파인애플을 썰고 있는 것일 터였다. 육체는 죽도록 피곤했고 도무지 다른 생각을 할 정신이 없었다. 오로지 이번 달 부업으로 더 벌 40만 원, 50만 원 같은 것들이 인생의 전부가 되었다. 


나는 날마다 좀비처럼 막차를 타고 집으로 갔고, 베개에 머리만 대면 물속으로 가라앉듯 잠에 빠졌으며, 주말에도 새벽에 나를 깨우는 세희의 따뜻하고 작은 손길에 소스라치게 놀라 허둥지둥 넥타이를 매고 주말 수당 5만 원을 벌기 위해 회사로 뛰어갔다.


비틀거리면서도 나는 내가 결혼으로 가는 열차에 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파혼으로 가는 KTX인 줄 내가 어떻게 알았겠는가.



* 커버이미지 : https://m.blog.naver.com/qw2558/223468736814

이전 09화 사랑만으로 결혼하면 죽을 것 같은 후회가 올 텐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