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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랫폼

by 박경현
20250622_2119_여행 분위기의 화보_simple_compose_01jybs5kn3fyavnz5prct94cbm.png

플랫폼 위, 한 소녀가 서 있었다.

드러난 눈동자는 마치 오래된 필름처럼 희미하게 색이 빠져 있었다.

그 눈은 마치 세상의 절반만을 기억하는 듯, 이승과 저승 사이의 경계를 더듬고 있었다.


기차는 이미 멈춰 있었고, 그러나 그녀는 그곳에서 아직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곳은 도착인지, 출발인지 불분명한 장소였다.


가방은 묵직했고, 그 안에는 옷이나 책이 아닌, 이름 없는 것들의 잔해가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잊힌 편지, 말라붙은 손, 아무도 부르지 않는 이름, 그리고 녹슨 시곗바늘이 덜컥거렸다.


그녀는 말했다.

"열차는 분명 돌아온다고 들었어요. 하지만 저는, 어느 쪽으로 떠났는지를 기억하지 못해요."

기찻길 옆 수풀 속에서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고, 그 울음은 너무 오래되어 마치 누에의 숨소리처럼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가방의 손잡이를 더욱 세게 쥐었다.

그 손아귀의 힘만이, 지금 이곳이 현실이라는 유일한 증표였다.


곧 기차가 다시 출발할 것이다.

그러나 그 기차가 어디로 향하는지는,

그녀조차 알지 못했다.

그것은 ‘다녀온 적 없는 과거’로 가는 길일 수도,

‘이미 지나간 미래’로 가는 편도일 수도 있었다.


한쪽 눈으로만 본 세상은, 언제나 돌아오는 열차처럼 낯설고 기울어 있다.

가방 속에선 오래된 숨소리가 새어 나오고, 그녀는 아직 떠나지 않은 시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누구의 것도 아닌 플랫폼 위,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다.


단지 짐처럼 쥐어진 손잡이, 그리고 검은 눈가죽이 여름의 덧없는 껍질을 붙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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