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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by 박경현

겨울이 다가오면 세상은 조용히 숨을 죽입니다. 바람이 뼈를 스치며 지나갈 때마다 인간의 마음도 얼어붙은 호수처럼 고요해지죠. 그 고요 속에서야 비로소 우리는 스스로를 마주하게 됩니다. 여름의 요란함이 사라진 자리에는 차가운 공기만이 남아 과거의 잔해를 덮어주는데 그 덮임이 얼마나 잔인한지 모릅니다. 눈이 내리면 모든 상처가 하얗게 변하고 잊힌 듯 보이지만 봄이 오면 다시 드러나 녹아내리며 아픔을 새삼 깨닫게 되니까요.

나는 겨울을 사랑합니다.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계절은 거짓을 용납하지 않으니까요. 따스한 불빛 뒤에 숨은 외로움도 차가운 바람 앞에 숨은 두려움도 모두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사람들은 두꺼운 외투를 껴입고 서로의 체온을 나누려 애쓰지만 결국 각자의 추위는 각자가 안고 가야만 합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부터 겨울은 더 이상 적이 아니라 스승이 되었습니다. 나를 단단하게 만들고 불필요한 것을 떨구게 하는 스승 말입니다.

눈 덮인 길을 걸을 때마다 떠오르는 생각이 있습니다. 인간은 왜 이렇게도 따뜻함을 갈망할까요. 불 앞에 모여 앉아 손을 녹이며 웃던 옛날처럼 지금도 우리는 무언가에 기대어 살아가려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따뜻함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태우는 불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겨울은 가르쳐줍니다. 자신의 심장을 불사르며 빛을 내는 자만이 진정한 온기를 가질 수 있습니다. 나머지는 그저 남의 불빛에 기대어 잠시 몸을 녹일 뿐 결국 다시 추위 속으로 돌아가야 하죠.

때로 눈보라가 몰아치는 밤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수많은 별들이 차갑게 빛나는데 그 빛은 수억 년 전의 것이라고 합니다. 이미 죽은 별의 잔광이 지금 내 눈에 닿는다니 얼마나 허망한 일인지. 우리의 사랑도 우리의 꿈도 언젠가 그렇게 될 테지요.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만 희미하게 빛나다 사라질. 그럼에도 우리는 오늘도 불을 피우고 서로를 안으려 합니다. 겨울이 깊을수록 그 갈망은 더 뜨거워지니까요.

눈이 쌓인 산을 바라보며 문득 깨닫습니다. 인간의 고독이란 원래부터 존재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홀로 이 세상에 던져졌고 죽을 때도 홀로 떠나야 하니까요. 겨울은 그 사실을 숨기지 않습니다. 나무는 잎을 떨구고 동물은 땅속으로 숨으며 사람마저 집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그죠. 그러나 그 고독 속에서야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맛봅니다. 누구의 기대도 누구의 평가도 없는 순수한 나 자신만이 남으니까요.

나는 매년 겨울이 오면 한 그루의 나무가 됩니다. 바람에 흔들리며 가지를 부러뜨리고 눈에 짓눌려도 뿌리는 땅을 놓지 않습니다. 봄이 오면 다시 싹을 틔울 것을 알기에 지금의 추위는 견딜 만합니다. 인간도 그렇습니다. 지금의 고통이 언젠가 녹아내릴 것을 알기에 우리는 버틸 수 있습니다. 겨울이 없었다면 봄의 소중함도 알지 못했을 테죠.

그러니 부디 겨울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이 계절은 우리에게 가장 솔직한 거울입니다. 얼어붙은 호수 위에 서서 자신의 모습을 똑바로 바라보는 용기만 있다면 말입니다. 그 용기가 있다면 봄은 반드시 옵니다. 그리고 그 봄은 이전보다 더 깊고 더 따뜻할 테니까요.

겨울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모든 것이 죽은 듯 보이는 이 순간이야말로 새로운 생명이 잉태되는 때니까요. 차가운 땅속에서 뿌리가 깊어지고 얼어붙은 마음속에서 새로운 꿈이 싹트는 때 말입니다. 우리는 그저 기다리면 됩니다. 자신의 불을 꺼뜨리지 않고 기다리면 됩니다.

그리하여 겨울은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듭니다. 더 깊이 사랑할 수 있게 만듭니다. 더 자유롭게 놓아줄 수 있게 만듭니다. 그래서 나는 겨울을 사랑합니다. 이 차가운 계절이야말로 인간의 본질을 가장 아름답게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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