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시여. 모든 준비는 다 되었습니다. 이제 곧 양들의 마을로 향하시고 통치하시면 됩니다"
늑대의 왕 이반은 아무말 없이 다리를 뻗어 알아들었다는 자신의 뜻을 보였다.
라훌은 납작 엎드려 이반의 날카로운 발톱이 자신의 심장쪽으로 다가오는지 살폈다. 늑대의 왕이라 불린 회색 늑대 이반은 질서의 혈통이다. 여러 혈통의 늑대무리들의 원로들이 모인 회의에서 이반을 왕으로 세운 이유이기도 하다. 질서의 혈통을 따르는 늑대들은 질서로 세상을 본다. 질서를 따르는 자에게는 관대하고, 질서에 반하는 자에게는 가혹하다. 질서를 거스르지 않는 한 오히려 개보다 자애롭다고 느낄만큼 늑대의 혈통 중에서도 온순한 편에 속한다. 늑대의 원로들이 이반을 왕으로 모시기로 한 이유도 대응할 방법이 단순하기 때문이다. 오직 질서.
라훌의 생각은 이미 정리되었다. 이반은 왕의 역할을 해주면 된다. 왕의 역할은 '명확한 질서의 수호자' 뿐이다. 질서를 바꾸려 해서도 안되고,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를 방기해서도 안된다. 이반이 질서의 의미를 할지 모르겠지만 라훌에게 질서의 의미는 명확하다. 질서는 오래된 늑대들이 세운 삶의 방식이다. 삶의 방식은 어그러져서도 안되고 흔들려서도 안된다. 삶의 방식을 지키면 늑대들은 살아남겠지만, 삶의 방식을 벗어나려는 순간 늑대들은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해야 한다.
오랜 늑대들이 세운 질서는 단순하지만 지키기 쉽지 않다. 늑대는 양을 먹어야 하고, 양은 늑대에게 먹혀야 한다. 이것이 질서다. 이 단순한 질서 하나를 지키기 위해 조율의 혈통을 가진 늑대들이 항상 늑대의 왕 뒤에 존재하게 된다. 라훌과 같은 조율의 혈통에 속한 늑대들은 드러나지 않는다. 조율의 혈통을 가진 늑대들이 드러나는 순간은 늑대들의 죽음의 골짜기에 들어선 순간이다. 죽음의 골짜기를 탈출하기 위해 앞에 나서야만 했던 이들이 이름이 남은 조율의 혈통에 속한 늑대들이다. 역할은 항상 바뀐다. 어린 왕에게는 섭정으로 젊은 왕에게는 재상으로 나이 든 왕에게는 충신으로 항상 2인자의 위치를 지킨다.
하나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 늑대는 모든 양을 잡아먹어서는 안된다. 내일 먹을만큼의 고기를 만들어낼 만큼의 양은 남겨둬야 한다. 농부들이 굶더라도 종자를 먹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하고 모든 양을 먹으려는 늑대는 제거해야 한다. 반대로 어떤 양도 먹지 못하게 막는 개 역시 제거해야 한다. 개가 무서워 싸움을 두려워 하다간 굶어죽게 된다. 늑대는 풀을 먹지 않는다. 늑대에게 개는 친구도 적도 아닌 공생관계가 된다. 모든 개를 물어 죽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면 양을 훔쳐가는 이리나 승냥이, 여우에게 양을 빼앗기게 된다. 늑대를 제외한 양을 노리는 것들로 부터 지켜줄 존재로 개는 적절하다. 양을 먹지 않지만, 양을 지키려는 충직한 개들은 없으면 좋지만, 없으면 불편하다.
라훌은 모든 것의 조율자다. 양들은 자신들이 먹힌 다는 것을 깊숙히 알아서는 안된다. 그건 어쩔 수 없는 희생이어야 하고, 개들의 동의가 필요하다. 실제로 노회한 양들의 지도자들은 잘 알고 있다. 양들의 지도자 역시 자신들의 안전을 담보로 다른 잉여 양들을 처리하는데 동의한다.
이런 안정적인 구조는 가끔 욕심이나 치기어린 자의식 때문에 위기를 맞이했다. 굶주림에 익숙하지 않은 혈기 왕성한 늑대들 중 일부가 선을 넘은적이 있다. 불필요하게 양을 도살했고, 먹어치웠다. 양들은 멍청하긴 해도 늑대의 입이 목을 향해 달려들때까지 가만히 있는 바보는 아니다. 어린 양의 시체가 발견되었고, 양들은 분노했다. 멍청하지만 영악한 양들의 지도자들은 늑대에 대항하기 위해 개들을 앞세워 늑대들을 몰아냈다.
그리고 그 양들의 지도자들이 다시 늑대를 찾아왔다. 노회한 양들의 지도자들은 개들의 무례함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질서를 세우기 위한 제안이다. 이 제안을 이반이 제대로 알고 있을지 모르겠다. 이반은 포악하고, 단순하기 때문이다.
선을 넘는다면 라훌이 나설 수 밖에 없다. 다시 양들의 언덕에서 쫓겨나느니 늑대 몇마리를 해치우는 것이 더 안정적인 늑대무리의 생존을 보장받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때를 위해서라도 개들은 필요했다. 라훌의 무리는 소수라 이반의 무리와 싸우려면 숫자가 필요했다. 라훌은 이틀 전에 만났던 마떼오, 그리고 어제 만났던 보리스의 얼굴을 떠 올렸다. 라훌의 조율판엔 두개의 장기말이 올라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