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상

by 간질간질

오랜만에 쌀을 샀다. 아이를 키우는 집에서는 유기농 쌀을 사먹인다고 하던데 수제비와 돌멩이에겐 1초의 고민거리도 되지 않는다. 쌀은 자고로 적당히 찐득하고 맛있으면 된다. 유기농 쌀을 먹은들 똥도 유기농 일리 없다는 그들만의 철학이다. 돌멩이는 한 때 유기농 쌀과 반찬만 먹고 싼 똥으로 키운 채소는 유기농이 아니겠냐는 고민으로 한참을 보냈다. 수제비에겐 깔끔하게 정리된 문제다.

"유기농이 아닐까? 아니야 이미 우리 몸은 환경호르몬에 오염됐기 때문에 유기농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아. 수제비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식탁에서 들을 만한 얘기가 아니지만, 그런 눈치라도 있으면 돌멩이가 아니다.

"유기농이든 농약에 절인 거든 니 똥 뭍은 음식을 먹고 싶은 생각은 반톨만큼도 없으니 닥쳐!"


언컨택트 시대에 맞게 온라인으로 주문했다. 쌀을 옮기는 아저씨들에게 미안했지만 무거운 쌀을 현관에서 베란다까지 옮기는 만큼의 힘만 쓰고 나면 어느새 미안함은 사라지고 '또 온라인으로 주문해야겠다'는 생각만 든다. 사람은 간사하다. 인정하면 편하다.


"이거 임금님에게 진상하던 쌀 이래. 그래서 이름도 진상미야"

"그렇구나"

수제비는 무관심하다. 쌀 포대 옮기는 것이나 도와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돌멩이는 여전히 쌀 포대 앞에 앉아서는 구시렁 거린다.

"얼마나 많은 쌀이 이천에서 나길래 쌀 포대에는 죄다 임금님 얼굴이 들어가 있는 걸까?"

수제비는 얼굴이 벌게지고 근육이 튀어나오고 있다.

쌀 포대 포장은 신기하다. 여전히 수제비는 쌀 포대 뜯는 법을 모른다. 굵은 실로 묶여 있지만, 익숙한 사람은 한 곳만 툭 뜯고는 주욱 당긴다. 그러면 드르륵 소리와 함께 쌀포대가 열린다. 수제비는 그 방법을 몰라서 언제나 힘겹게 모든 실 묶음을 칼이나 가위로 뜯어내야 한다. 지금도 그러고 있다.

"여기 쌀을 보면 품종이란 것이 있거든, 실수하지 않게 맛있는 쌀을 먹으려면 등급도 중요하지만, 품종도 단일 품종을 골라야 해. 옛날에 일본 쌀이 맛있다고 했던 고시히까리라는 거였어. 우리나라는 추청이란 품종이 많고"


뜯은 쌀 포대를 들고 보관함에 옮겨 담는다. 여전히 돌멩이는 재잘거리는 중이다. 재잘거리는 아이들은 귀엽다. 재잘거리는 돌멩이는 때때로 죽이고 싶다. 지금도 그렇다.

"또 농협에서 인증한 제도로 해썹이라는 것도 있어. 물론 영어지 스펠링은 몰라. 여기 녹색으로 쓰여 있는 거야. 이게 뭐냐면 생산부터 유통하는 과정에서 어떤 위해한 요소도 들어가지 않게 관리했다는 거야. 이런 걸 먹어야 안전하다는 뜻이지"


수제비는 쌀 통에 쌀을 다 부었다. 옛날에야 쌀 한 가마니, 반 가마니 식으로 얘기했지만 식구가 작은 집은 20kg도 버겁다. 수제비네는 10kg을 주문했다. 10kg은 들기 버겁지만 바닥에 질질 끌 정도는 아니다. 10kg 쌀 포대를 들고 쌀통에 다 부은 수제비는 슬슬 열이 올랐다. 조금 더 열 받으면 쌀통의 쌀이 모두 튀밥으로 변할 정도였다.

"언제 생산한 쌀 인지도 중요한 거야. 가끔 싸게 파는 쌀이 있는데 그런 쌀은 오래된 거지. 옛날에는 그런 쌀을 퉁 쳐서 정부미라고 불렀어. 정부에서 보관하던 쌀이고 오래돼서 맛이 없는 거니까"


수제비가 쌀통을 옮기고 돌멩이에게 물었다.

"우리가 산 쌀이 뭐라고?"

"진상미!"

"넌 뭐지?"

"나?"

"그래. 너. 넌 진상이야"


돌멩이는 말을 못 하다가 이내 '진상미'와 '진상'에 쓰인 단어가 같은 단어인지 아닌지 고민에 빠졌다. 수제비는 돌멩이를 똥물에 튀겨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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