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멩이 심기에 뭔가 불편한 티가 역력하다. 자기는 모르겠지만 수제비는 안다. 평소에 진상 짓과는 거리가 먼 돌멩이지만 가끔씩 말도 안 되는 꼬투리를 잡고서 불편해 어쩔 줄 몰라한다. 실밥 터진 야구공이라고 할까, 매끈한 초콜릿 케이크 속에 쉬어버린 과일이라고 할까. 만만한 사람으로 위장하고 살아가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생존 방식의 부작용이겠거니 하고 수제비는 넘겨버린다.
"이제 곧 설이야"
"쉬고 좋겠네"
"쉬는 거야 좋지. 그런데 또 인사해야 하잖아"
돌멩이는 반복해서 하는 일을 매우 능숙하게 잘 하지만 누구보다 반복해서 하는 일을 혐오한다. 돌멩이의 글 쓰기 중에 가장 훈련이 잘 되어 있는 것 역시 반복되는 단어들을 새로운 말로 대체하는 일이다. 편집광처럼 돌멩이는 하나의 문장에서 같은 단어가 나타나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한다. 아니 혐오한다. 요즘 돌멩이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중국인들이 김치를 자신들의 전통음식이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고, 한일 해저터널을 뚫으면 일본보다 우리나라에 더 큰 이익인 양 떠드는 정치인들 때문도 아니었다. 새해 인사 때문이다. 1월 1일에 동해에 일출을 보러 간다는 둥, 보신각에 타종행사를 간다는 둥, 밤늦게 까지 잠을 안자다 12시가 넘어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카톡을 남기는 둥 온갖 부산을 떨던 사람들이 설날이 되면 또 인사를 하기 때문이다. 돌멩이 입장에서는 새해를 두 번씩이나 맞이하는 상황이 어색하고 싫은 것이다.
어른들은 천지인 자판을 쓰지만, 아이들은 쿼티 자판을 쓴다. 누군가에게는 당연하고 편안한 일이 누군가에게는 못 견디게 불편한 일이 있다. 돌멩이는 새해 인사를 하기 싫어 안절부절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있다. 그럼 아무에게도 인사를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인사를 받지 않겠다고 생각하면 쉬울터인데 소심한 돌멩이는 인사를 무시하는 행위 역시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만큼이나 견디기 힘든 일이다.
그렇다고 수제비는 도움 줄 생각이 없다. 정신병이라고 병원에 치료를 보낼 수도 없고, 제시할 해법도 없다. 돌멩이가 불편해하는 것은 몸에 익숙해질 때까지 새 신발이 길들여지기를 기다리는 것 처럼 기다리는 것 말고 없다. 수제비가 신을 신고 길들이는 수고를 한들 돌멩이에게 만족스러울 리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자기가 해결할 수 없는 일을 대하는 수제비의 가장 기본적이고 원론적인 방안은 무시와 방관이다. 굶주리는 아이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것은 분명 아이들의 생존에 일시적인 보탬이 되겠지만 궁극적인 해결책은 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굶주리는 전 세계의 아이들에게 한 방울의 금액을 더하는 것만으로는 천국에 들어갈 면죄부가 될 수 없다. 그렇다고 한 푼의 돈도 내지 않는 것 역시 지옥에 들어가야 할 증거가 되지 못한다.
새해뿐만 아니라 온갖 것들이 흑과 백 사이 회색에 위치한다. 누군가 당신은 우리보다 까맣다고 욕하는 것이나, 좀 더 어두운 쪽에 있는 사람이 당신이 선명하지 못하다고 욕하는 것이나 다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저 그 사람들의 기준에 맞춰야 한다는 생각만 벗어나면 자유로워진다. 수제비는 그래서 돌멩이를 쳐다만 보고 있다. 경기장에서 직접 뛰지 않는 관중처럼 경기를 보는 즐거움을 누리면 될 일이지, 선수에게 감정 이입되어 선수의 느낌을 고스란히 받아들일 생각은 없다. 돌멩이의 불편함은 알겠지만 같이 겪을 생각은 없다. 수제비는 새해를 두 번 축하하든 세 번 축하하든 별 일이 아니다. 어차피 사람의 인생은 매일이 새로운 것이고 새해라고 해봤자 구분하기 위한 나눔이지 어제와 내일이 특별하게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왜 우리나라에서는 새해 인사를 두 번이나 할까?"
수제비는 보던 넷플릭스 승리호의 볼륨을 올렸다. 돌멩이의 이야기에 말려 들어가고 싶지 않다는 의지의 표현이자 후시녹음을 제대로 하지 못한 우리나라 영화의 음질 때문이기도 했다.
"신정과 구정이란 말이 있었고, 이제 구정이란 말을 쓰지 않는데. 왜 우리는 반복해서 인사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정말 모르겠어. 1월 1일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인사를 했으면 설날에는 똑같이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를 하지 말아야 할 거잖아. 1월 1일이 신년이고, 설날은 새해인가? 그럼 1월 1일과 설날 사이의 날들은 중간계에 속한 날들인가? 2021년도 아니고 2020년도 아닌가? 정말 이해할 수 없어"
수제비는 자막을 켰다. 넷플릭스에서는 자막이 지원된다. 음성을 듣지 않아도 외국어 영화를 보듯이 한국어로 만들어진 영화도 한국어 자막을 켜면 음성이 잘 들리지 않는 문제는 해결이 된다. 한국어 자막에서는 대사뿐만 아니라 박동수가 들린다든지, 비장한 음악이 커진다라는 감정의 영역에 속한 내용까지 참견을 하는 것이 거슬렀다.
"원래는 설을 쇠다가 일제강점기 때 양력이 도입이 되었다는 거야. 알지? 일본은 1월 1일이 새해야. 거긴 설날이란 개념이 없다고. 중국에서는 춘절이라고 해서 쇠긴 하지만. 아무튼 우리나라에서는 일제시대에 1월 1일을 새해로 하는 게 익숙하지 않았던 거지. 그러다 광복을 맞이했고, 사람들은 다시 설날을 기념하게 된 거야. 그래서 나온 웃긴 말이 신정과 구정. 이게 무슨 새 거와 헌 거의 차이가 있냐고. 뉴스에서도 엄청나게 뭐라 했지. 미디어들의 특징이잖아. 이상한 거 지적질하기. 거기서 끝나. 미디어는 해법을 제시하지 않아도 돼. 세상에서 제일 쉬운 것 중에 하나가 지적질 하기야. 그래서 나 평론가를 별로 안 좋아해. 자기들은 만들지도 못하면서 무슨 지적질을 하냐고"
돌멩이의 독백은 방백이 되어 마루를 울린다. 수제비는 거슬리는 자막이 고마워졌다. 청각이 훼손돼도 시각이 이를 도울 수 있다니 고맙지 아니한가.
"이중과세라고 들어봤어?"
한참 꽃님이의 생명이 달려 있는 장면인데 이중과세든 삼중 과세든 알바 아니다. 사실 삼중수소가 유출되었다고 해도 별 일 아닌냥 살아가는 나라에서 이중과세쯤이야 별 대수인가?
"여기서 이중과세는 세금이 두 번 매겨졌다는 뜻이 아니고, 설을 중복으로 쇠는 것을 말하는 거야. 그러다 1985년에 민속의 날로 바꿔서 지금까지 오게 된 거래"
돌멩이는 과거의 일을 마치 경험한 것처럼 얘기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1985년이라면 돌멩이의 나이가 몇 살이었을까 궁금해졌다. 사실 돌멩이가 이렇게 민감하게 된 것은 카톡 때문이다. 평소에 말도 잘 안 하고 문안전화도 하지 않던 사람들이 페북이 퍼지면서 SNS상에서 인사를 남기게 됐다. 그것까지야 참을 수 있었지만 카톡은 상대방의 입장이나 상황과 상관없이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발송한다. 게다가 '1'이라는 족쇄를 채워서 읽었는지 읽지 않았는지 확인한다. 확인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1'이 사라졌는데 아무런 답이 없으면 상대방에게 온갖 험담을 들어야 한다. 친한 사이라면 넘어갈 일이겠지만 친하지 않은 사람일수록 버릇이 없다는 둥, 무례하다는 둥, 예의가 없다는 둥 온갖 뒷담화를 만들어 낸다. 평소에 만나서 5분 이상 이야기할 것도 없으면서 문안인사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지 사람들은 새해만 되면 온갖 메시지를 온갖 이미지와 이모티콘을 뒤섞어 쏘아댄다.
승리호가 끝났다. 감상평을 적으려 했지만 '스포'네 '스포 아니네'에 시달리기 싫어 수제비는 혼자 생각을 간직하기로 했다. 돌멩이의 새해도 원하든 아니든 다가올 것이고 스트레스를 받든 아니든 인사가 난무할 것이고, 알아서 견딜 것이다.
아무튼 2021년이 시작된 것을 신년이든 새해든 부정하기 어려운 시간이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