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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riteller 토리텔러 Jan 31. 2017

종이책 개혁

단순한 일을 할 때의 명분

'내가 왜 이런 일을 하지? 뭐 때문에?' 마라토너들은 42.195km를 달리는 도중에 이런 생각을 할 것이라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멈추는 것은 상상도 못한 채 계속해서 앞으로 발을 내딛고, 발바닥에 중력이 실린 몸무게를 견뎌야 하고, 손은 앞뒤로 흔들어야겠지. 숨은 가빠 오르면서 주위는 희미해지지만 목표는 잊지 못할 것이다. 달리기는 커녕 집에서 편의점이나 동네 시장에 갈 때도 걷기보다 차에 의존하는 사람이 떠 올리기 쉽지 않은 일이다. 그만큼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하소연하고 싶은 마음이기도 한다. 몸이 내뿜는 고통의 신호를 애써 타이르면서 계속해서 달리는 마라토너가 된 냥 스스로에게 되 묻는 일을 하는 중이다.   

 

손목이 뻐근하고 시리도록 자발적인 반복 단순작업을 하고 있다. 반복적인 단순작업이라 부르면 가치가 없어 보인다. 몸을 불편함 없이 움직일 수 있는 정도라면 학벌이나 수입에 상관없이 누구나 할 수 있는 그저 그런 일이 생각난다. 쉽게 폄하할 일이 아니라는 것은 단순 반복 작업을 해 본 사람만 안다. 하지만, 작업을 끝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또 낮잡아 보는 일이기도 한다. 사회에서 은연 중에 낮춰 보는 또 다른 일이 있다. 청소하는 일. 요즘이야 로봇청소기가 일을 한다고 하지만, 옛날에는 살림살이하는 사람들의 몫이었다. 잘해도 티가 나지 않고, 조금만 마음을 놓으면 허술함이 그대로 드러나는 일. 돈을 벌어 온다는 명분으로 아버지들은 회사에서 당한 스트레스를 먼지 한 톨, 머리카락 한 올을 끄집어 내선 티 나지 않는 일을 하는 어머님들에게 시비를 걸며 풀었다. 나이가 들어 회사에서 '돈 벌어 오는 일'을 끝내고 쫓겨난 남성들이 구박을 받는 상황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조그마한 티끌 하나를 드러내서 시비를 거는 것 밖에 할 줄 아는 게 없는 늙은 남자 노인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버럭 소리 지르거나 조용히 방으로 들어가는 것 말고는 없다. 


새벽에 형광빛 안전 조끼에 의지해 거리를 청소하는 분들이 하는 일을 '새벽 길거리 청소'라 규정지으면 그냥 '청소일'이 된다. 남과 비교하는 것에 익숙한 우리나라 사람들은 '공부를 하지 않으면, 추운 날 새벽에 거리에서 청소하는 사람'이 될거라는 식으로 아이들을 겁준다. 그 아이들에게 '청소'는 부모님께 인정받지 못하는 허드렛일이 되고, 사회에서 뒤쳐진 사람들이 하는 일로 마음에 새겨진다. 청소가 되지 않은 거리나 세상이 얼마나 견디기 힘든 것인지는 '쓰레기 대란' 뉴스를 보면 알 수 있다. 평소에는 깨끗한 거리가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지만, 그 당연한 익숙함을 만들기 위해 새벽부터 고생하는 청소 노동자들의 일은 아이들에게 겁주려 이야기하는 허드레 일이 아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도 하기 싫고, 허드렛 일이 아니라고 주장하려면 적당한 포장이 필요하다. 더 어려운 말로는 '명분'이라고도 한다. 다른 사람들이 낮잡아 보거나 오해하지 않도록 내가 하는 일에 의미를 더하는 일이 그래서 필요하다. 가장 포장에 능한 사람들을 마케터라고 부르지만 그보다 더 오래된 직업으로 기자가 있다. 누군가의 행동에 '딱지'를 붙여서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일. 기자들이 하는 일은 저널리즘이라기보다는 남에게 '딱지'를 붙이는 일이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단순 반복 작업' 대신 '교정작업'이라 한 번 덧칠해 본다. 좀 약하다. '인류의 지적 농축물을 디지털로 변환하는 프로젝트'라 불러볼까 생각해봤다. 있어보이긴 하지만 놀지 않고 중요한 일을 하면서 월급을 축내지 않겠다고 보고서를 쓰는 직장인 냄새만 난다.  


책꽂이에 가득한 책

책이 가득한 책꽂이는 나 혼자 즐기는 허세다. 남에게 일부러 보여주거나 사진을 찍어 보내지는 않지만, 우연히 내 공간에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책이 가득한 책장을 보일 때 뿌듯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허세. 보물창고를 열어서 슬쩍 부를 자랑하는 일이 책꽂이에 책을 가득 두고 슬쩍 구경시키는 일이다. 돈이 없는 사람일수록, 어렸을 때 공부 잘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사람일수록 책을 많이 읽었다는 증거로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은 욕먹지 않을 자랑이며, 배웠다는 사람들 사이에서 고고한 존재임을 드러낼 수 있는 행위다. 머리속 지적 축적물을 꺼내서 비교해 볼 수 없기에 쌓여 있는 책은 나의 지적 능력을 드러내는 물리적 증명서다. 희귀한 아이템을 모으듯 책을 사 모았다. 


이런 허세 때문에 책을 없애는 것은 내 지식을 없애는 일과 동일시 된다. 뇌를 잘라내는 짓을 내 스스로 할 수는 없다. 같이 사는 가족들은 책의 분량이 사람의 성품이나 지식에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고고하기는 커녕 신경질적이고 옹졸한 사람이 책을 쌓아두는 것은 궁상맞게 먼지 나는 덩어리들을 끌어안고 사는 진상일 뿐이다. 다시 같은 책을 읽을 리 없어 보여 버리려 해도 굳이 버티는 사람과 말싸움을 하는 것은 남의 주차장 앞에 차를 세워두고 차를 미음대로 빼다가 흠집이라도 생기면 가만 두지 않겠다고 윽박지르는 무례한 행동과 같다. 계속해서 읽지 않는 책을 치워버리라는 압박에 잠시만 시간을 주면 해결하겠다는 약자의 얼굴도 했다가, 무뢰한의 얼굴도 했다가 하며 책을 지키려 필사적이 된다.  


온라인에는 이미 한 사람의 뇌에 다 들어갈 수 없을 만큼의 정보가 흘러넘치고 있다. 게다가 책과 달리 새로운 내용으로 업데이트도 된다. 지식이 필요한 것이라면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는 망과 망에 연결해 읽을 수 있는 디바이스 하나면 된다. 모르는 게 아니라 그냥 옛날 책을 버리기 싫은 것.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을 인터넷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을 주장하는 것이 마지막 논리적 보루다. 죽기 전에 다시 읽어볼 책이 몇 권이나 될까마는 낡은 이불을 버리기 싫어하는 아이처럼 온갖 핑계를 대며 버틸 뿐이다. 


그랬던 것 같다. 익숙한 것에서 내 기억을 버리기 싫은 것. 아이가 인형이나 오래된 이불, 낡은 장난감을 다시 놀지 않더라도 동생이나 남에게 주기 싫어했던 마음. 딱 거기까지인 듯하다. 이제 놀지도 않는 장난감이 아니냐고 말하면 아이는 갑자기 먼지 쌓인 장난감을 마루에 쏟아내고는 얼마나 재밌게 노는지를 증명하려 한다. 아이처럼 나도 그냥 싫었나 보다. 장난감이 없으면 추억이 사라질지 모른다는 마음인지, 그저 눈에 보여야 내 것이라고 안심이 되는 DNA에 새겨진 본능인지 모르겠지만 주기 싫어하고 버리기 싫어한다.  


구한말 지식인의 마음으로

옛날 철도를 놓는 기계가 발명되었을 때 그 기계보다 철도 노동자의 근육이 훨씬 낫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기계와 경쟁하다 장렬히 산화했다는 철도 노동자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그 전에는 '양이 사람을 먹는다'는 산업혁명 시대를 장식한 기사를 수백 년이 지나 다시 재생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위의 이야기가 진짜로 그 당시에 있었던 일인지, 아니면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전해 내려온 만들어진 구전동화인지 모르겠다. 어느 것이든 상관없다. 구름 속 전자기의 충돌 때문에 발생하는 천둥소리와 번개를 여전히 '신이 만들어 낸 신호'로 해석하는 옛 이야기를 믿지 않지만 아이들에게 전하는 것처럼 사람과 기계가 싸우는 이야기가 사실인지는 전혀 상관없다. 사실이 아니더라도 여전히 그 이야기를 전달하면서 기계에게 밀리는 사람의 노동력을 신성시하고 지켜야 할 거룩한 것으로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숭고한 척 하지만 더 깊은 속내에는 그냥 싫어서 내가 가지고 왔던 것을 버리기 싫은 아이의 마음일지라도 여전히 다른 이야기와 명분을 갖다 붙이며 저항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다 결국 타협했다. '나는 구한말의 지식인처럼 과거와 현대를 잇는 작업을 하는 사람이다' 스스로 만족스러운 대답을 찾아냈기에 이제 내가 하는 일은 역사적인 사건이 되었다. 모두가 역사책의 한 페이지에 근거를 남기지는 못하지만 역사적인 일에 참여할 수 있다. 내가 하는 이 일은 역사책에 남지 않더라도 역사적인 사건이 되어 서버 어딘가에 몇 K바이트의 흔적을 남길 것이다. 이 흔적은 과업의 발자국을 정리하는 일이며 내가 하는 일에 정당성을 부여해서 누구에게 보여도 가슴에 힘이 들어가 고개를 꼿꼿이 세우게 되는 일이 된다. 


시대적인 사명을 다해 사라질 위기에 처한 책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넣어주는 일. 요즘의 언어로 바꾸면 아날로그의 유물을 현대적 디지털 보고로 만드는 일. 명화를 복원하듯 한 땀 한 땀 시린 눈을 비비고, 시큰한 손목을 주물러가며 만들어내는 일. 종이책을 e-book으로 바꾸는 작업은 이제야 부끄럽지 않은 이름표를 하나 얻게 되었다. 


내가 e-book 단말기를 사면서부터이다. 

왜 사게 되었을까? 남들이 말하는 아이패드나 갤럭시 탭 같은 태블릿 PC도 아닌, e-book 전용 단말기를 샀다. 나이 먹을수록 쓸모가 흐릿해지는 자연의 법칙에 조금이나마 악다구니 쓰면서 버티고 싶었던 것일지, 아니면 고루한 취미를 첨단의 끝에 있는 새삥한 취미로 바꾸고 싶었는지, 아니면 그냥 회사의 업무와 관련되어 있기에 회사에서의 생명을 연장시키고 싶은 발작이었는지, 그냥 쇼핑이 하고 싶었던 것인지 알 수는 없다. 나를 찾아오는 가장 반가운 사람이 '택배원'이 되었듯이 누군가 나를 찾는 것을 원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우리나라에서 제일 잘 나가는 인터넷서점의 고위 간부가 자랑스레 흘린 말에 홀딱 넘어간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번에 나오는 제품은 그동안의 실패에서 배운 노하우가 집약된 제품으로 가격경쟁력도 충분합니다" 


술을 마시면서 업무 이야기를 쏟아내는 그 였지만 술을 마시는 것은 '일'때문만이 아니다. 유명한 대학을 나왔고 집이 가까웁고, 주로 그 사람이 계산을 하기 때문도 아니다. 그 사람이 쏟아내는 의도하지 못했던 이야기에 빠져 이야기를 듣다 보면 늘 시간을 흐르고, 빈병이 쌓여있다. 거의 매번 계산을 하는 그 사람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내가 당신네 회사 제품을 샀다고!'라고 자랑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당신네 회사 물건을 샀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그 사람은 티 나게 좋아하는 것 없이 원래 하던대로 '의도하지 못한 대화'로 나를 끌어들인다. 


e-book단말기가 들어온 날, 책을 좋아한다고 이야기하면서도 책을 사는 것에 인색한 성품인 나는 e-book을 구매하지 않았다. 하지만, 속 좁은 인간이 그렇듯 어떻게 비싸게 산 기기를 써먹을 수 있을지 고민했다. 공짜로 넣을 수 있는 PDF 파일을 집어넣어봤지만 화면에 'PDF 파일이 보인다'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PDF 파일이 화면에 보이는 것은 분명하지만 읽을 수는 없다. A4 사이즈의 절반만한 화면으론 PDF 파일을 100% 담기 위해 글자 크기가 절반으로 줄여야 한다는 당연한 자연법칙이 적용되었다. e-book 단말기의 몇 곱절되는 돈을 지불하고 사는 태블릿은 글자 크기를 늘이고 줄일 때 돈 값을 하듯 자연스럽다. 일고의 머뭇거림도 없이 주인님의 손가락이 벌리는 만큼 글자를 키우고 줄인다. 책을 만드는 고집쟁이들의 영혼이 들어가 있는 e-book단말기는 아무리 손가락을 벌려도 '깜빡'이며 한 박자 쉽고 반응한다. 아무리 돈주고 샀더라도 자고로 책을 만드는 사람들의 자존심이 들어 있는 것이 분명하다. 고분고분하지 않다. 


돈을 지불했더라도 수청을 거부하는 옛날 기생의 자존심일지 모르지만, 나는 돈 몇 푼 쥐어주고 어떻게든 가슴이라도 한번 움켜쥐려는 저렴한 인간이기에 뭔가 띄워보고 싶었다. 돈을 더 내면 될 일이건만 돈이 없지도 않건만 어떻게든 옆으로 피해가고, 개구멍을 파고, 뒷거래를 하듯 돈을 들이지 않고 해결해 보고 싶었다. 사기도 머리가 좋아야 친다고 머리가 아둔한 사람이 돈을 쓰지 않으면 할 수 있는 일은 결국 몸으로 때우는 것 밖에 없다. 


좁은 방에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중고로 책을 많이 팔아 버렸지만 그래도 버리기 아까워 묵혀둔 책들이 책장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저것들을 없애면 나는 얼마의 경제적 효용이 있을까?'라는 계산도 하기 전에 아이의 책이 밀려 들어왔다. 내 추억을 밀어내면서 대신 아이의 미래를 담보한다는 책들이 들어온다는데 어설픈 가장의 권위를 내세워 거부할 수는 없다. 잠시 지나가는 말로 '방이 좁은데...'라고 말을 했지만, 나에게도 같이 사는 사람들에게도 그 말은 부엌의 생선구이 냄새 빠지듯 서둘러 사라져 버렸다. 좁은 책꽂이에 더 많은 공간을 만들어야 했고, 배가 불러 목구멍에까지 찬 사람에게 억지로 남은 음식을 먹으라고 윽박지르듯 책을 욱여넣었지만 책꽂이는 모자랐다. 게워낸 음식물처럼 책꽂이 옆에 아이의 책이 몇 무더기 쌓여있다. 전세로 살고 있지만 1년 치 전세금을 예금에 넣어두면 받을 수 있는 이자로만 생각해도 책이 차지하고 있는 면적은 너무 비쌌다. 내가 차지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 해 봐야 한껏 벌린 몸뚱이만큼 밖에 되지 않을 텐데 책은 나 몸뚱아리보다 넓은 면적을 24시간 하루 종일 차지하고 있다. 불쾌했다. 종이에 쓰인 활자 주제에 사람이 머리에 집어넣어주지 않고 찾지 않으면 종이와 잉크 밖에 안 되는 것이 나보다 더 비싼 공간을 안정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싫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나의 동지

그래 '개혁'이다. 오랜 직장생활의 버릇인지 급변하는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생김새로 태어나 것인지 혁명을 할 만큼 과감하진 못했고 '개혁'을 선택했다. 나름 '갑오개혁'에 버금가는 과감한 방법이라고 믿었다. 조선의 쓰러져가는 왕실을 부활시킬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지만 적어도 일본에게 나라를 쉽게 넘겨주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는 만큼의 강한 의지. 청나라의 개혁도 우리나라의 개혁도 많은 개혁들은 거대한 흐름에 반짝 '놀라움'을 줄지언정 세상을 뒤엎은 사례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혁명을 두려워하고 기피하는 사람들은 곧잘 '개혁'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종이책의 시대를 빠르게 정리하고, 사회의 묵은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해 방 안의 공간을 확보하면서 책에 담긴 얼을 도도히 이어낼 수 있는 방법. 개혁을 시작했다. 이 글을 읽는 사람은 나보다 더 나은 사회적 지위와 이력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여전히 나와 같은 구조적인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이런 류의 글을 뒤적이고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동지여. 피는 나지 않지만 피가 날만큼, 눈알이 빠질 만큼, 손 모가지가 뽑혀 나올 만큼의 고통의 시간이 만들어 낸 이 글을 읽고 난다면 


e-book 단말기에 대해서

북스캔에 대해서

PDFepub이라는 파일 형식에 대해서

OCR레티나라는 것에 대해서

sigil이란 오픈소스에 대해서 

도서 저작권유통 시장에 대해서도 


전혀 전문적이지 않고 뚜렷한 한계를 지닌 나름의 잡 지식을 얻게 될 것이다. 개혁이란 그런 것이 아닌가. 완벽하게 변할 수 있다면 그건 혁명이지 개혁이 아니다. 개혁은 분명한 한계를 지닌 일이다. 그렇기에 실패한 개혁은 없다. 성공한 개혁도 없다. 개혁은 시도 자체로 인정받을 만한 것이다. 성공한 개혁은 혁명이다. 혁명만큼 달라지지 않았다면 성공한 개혁이라 불러선 안된다. 그건 개선이다. 그리고 동지가 나의 개혁안을 보고 실행하게 된다면 당신만의 멋진 디지털 책을 갖게 된다. 그리고 넓어진 공간도 갖게 된다. 더불어 개혁에 따른 후유증으로 손목터널 증후군과 안구건조증과 수면부족을 얻게 되고 부스러기 이득으로는 자아성찰, 인생무상에 대해서 깊이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러니, e-book. 아니 '책'이라는 것 자체에 관심이 없다면 절대 읽을 필요 없는 내용이다. 이 글은 활자와 옛것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을 위한 글이다. 이미 현대에 넘어왔지만 아직도 머릿속은 유구한 전통을 지키면서 이상을 꿈꾸는 구한말 지식인의 눈물겨운 분투기이다. 글자(활자)를 좋아하는가? 옛날 책을 버리기 싫은가? 집에 공간이 필요한가? 위의 질문에 모두 '그렇다'라고 대답하지 않는 이상 사람이 할 짓은 아니고 읽을 필요도 없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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