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이데이 No. 50 (2003년 8월 15일)
어려서부터 혼자 지도를 그리며 노는 것을 즐겨했던 내겐 큰 불만이 하나 있었다. 지도에서 적군과 아군을 나눈 뒤에 땅따먹기 놀이를 하려고 하면 공정한 룰이 적용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주사위도 굴려보고 스스로 적군이 되었다 아군이 되었다 정신분열을 시도해 보기도 했지만 마땅한 해결책을 찾지 못했던 내게 인공 지능이 적재된 컴퓨터 게임은 신이 내린 축복이었다. 컴퓨터와 땅따먹기 게임을 하다 보면 밤을 새우기 일쑤였고,하루 종일 컴퓨터와 씨름하는 것을 열심히 공부하는 것인 줄 아신 할머니는 ‘좀 쉬어가면서 공부해라’하시며 건강을 걱정해 주시기까지 하셨다.
'세계 정복’이란 상상은 좁은 땅덩어리에서 외세에 시달려 온 역사를 가진 우리나라 머스마들이 대체로 가지고 있는 판타지 기도하다. 이러한 상상을 조금이나마 만족시켜 주는 수단이 바로 컴퓨터 게임. 상상 속에서만 가능했던 대체 역사를 가능하게 만들어 준다. 놀랍지 않은가? 내 손가락으로 세계를 정복할 수 있다니!
수많은세계 정복류 게임 중에 시드 마이어(Sid Mier)라는 사람이 만든 '문명’이라는 게임이 있다. 왜 하필 '문명’이라는 게임을 추천하는 것일까? 이 게임은 ‘철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이라 하니 고대 그리스의 철학과 중국의 제자백가를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런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니 긴장하지 말자.
기원전 4000 년부터 기원후 2050 년까지 하나의 민족을 이끌며 자신의 통치 철학에 따라 승리 조건을 선택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 게임의 특징은 승리를 하기 위한 조건의 다양함에 있다. 말 그대로 힘으로 점령하는 ‘정복 승리,’ 높은 문화 수준을 통해 일궈내는 문화의 승리’,정치력을 이용한 ‘정치의 승리’등 다양하다. 어떤 승리의 조건이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과학 기술’이라는 중요한 요소를 관리해야 한다. 과학기술에 소홀하다면 남들은 기차 타고 다닐 때 열심히 말을 달려야 할지 모른다 이 외에 ‘경제력'과 ‘국민의 행복도’ 등도 중요한 척도가 된다. 마치 실제 국가를 경영하는 것 같지 않은가?
게임을 더욱 깊고 맛깔스럽게 즐기기 위해서 두 권의 책을 읽어보는 게 좋다. 역사적으로 과학기술의 발전이 치명적인 무기 개발에 반영되어 인류 역사에 미친 영향을 조목조목 밝혀낸 <전쟁과 과학, 그 야합의 역사>와 결정적인 역사의 한 순간이 달랐다면 세상이 어떻게 달라졌을까를 추측하게 해주는 <만약에 1:군사 역사 편>이다. 책에서 말하는 과학 기술의 발전이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는지를 우리는 게임을 통해 바로바로 확인해 볼 수 있다 또한 책에 소개된 결정적인 역사의 순간을 게임 속에서 재현해 결과를 뒤집어 보는 짜릿한 지적 호기심도 충족할 수 있다.
한민족이 고대에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한 후 전 세계를 문화적으로 선도하는 게임과 이러한 재미를 지적으로 뒷받침해주는 책들. 바로 철학이 담긴 세계 정복의 즐거움이며,밤을 새우게 만드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① 문명 3 : 플레이 더 월드
문명 시리즈는 역사책 속에서나 만날 수 있었던 인류 전쟁사를 온라인상에 재현한 교육적인 게임이다. 플레이어가 한 문명을 경영한다는 웅장한 게임 진행 방식으로 10년 넘게 인기를 끌고 있는 PC용 게임.
(시뮬레이션/시드 마이어/파락시스사(社) 제작/2만 5000원/2003년 1월)
② 전쟁과 과학, 그 야합의 역사
문명이 시작된 이래 인류가 끊임없이 꾀해 온 전쟁에 대한 철학서. 어두운 전쟁의 역사를 흥미롭게 재해석한 책이다.
(어니스트 볼크먼, 석기용 역/이마고/ 510쪽/ 2만 3000원/ 2003년 6월)
③만약에 1 : 군사 역사 편
계간지 <군사 저널 MHG(The quarterly Jornal of Millitary History> 10주년 기념호에서 역사가들에게 '전쟁사에서 '그렇게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로는 어떤 것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중 가장 뛰어난 것들을 모아 엮은 책. 세계사에 자취를 남긴 20개의 전쟁에 대한 기발한 가정과 해답이 있다.
(스티븐 앰브로스, 이종민 역/ 세종연구원/ 508쪽/1만 6000원, 2003년 3월)
왜 '혼자놀기'가 사회 초년생 재테크에 나오는지 모르는 분들을 위해 설명 드리면 '혼자 놀아야 돈을 모은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여럿이 같이 놀면 재미는 있지만 아무래도 돈을 쓸 가능성이 높아지죠.
'문명'3을 소개했는데, 현재까지 문명 6가 나와 있습니다. 이 게임을 한번 시작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고 해서 '운명하셨습니다'를 패러디한 '문명 하셨습니다'란 인사를 주고받기도 합니다. 저는 문명 5까지 해본 것 같네요. 어지간해서는 요즘 게임을 하지 않는데 '문명'은 유혹을 떨치기 매우 어려운 게임입니다.
'전쟁과 과학, 그 야합의 역사'는 절판된 것 같네요.
만약 1:군사 역사 편 역시 새 책은 구할 수 없다고 Yes24에 나옵니다. 2003년 제1회 올해의 책 후보도서이기도 한데 말이죠.
역시 이 잡지는 시대를 너무 앞서갔어요. 조금만 천천히 갔으면 성공했을지도 모르는데.. 하긴 요즘 잡지를 구매해서 보는 사람 자체가 적으니 지금까지 살아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좋은 기회를 준 잡지사와 에디터와 소개해 주신 분께 또 감사드립니다. (매회 이야기하려고 합니다-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