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왕자
요즘도 이 책을 사람들이 많이 읽는지는 모르겠다. 분량이 짧고, 그림 예쁘고, 내용도 어렵지 않아 지적인 남자 티를 내는 도구로 딱 좋았다. 어린 왕자에 등장하는 여러 가지 에피소드 중 많이 알려진 것이 아래 그림이다. 혹시, 어린 왕자를 읽지 않았다면 아래 내용은 스포가 되니 책을 읽고(읽을 시간 없다고 핑계대기엔 책 분량이 짧다) 나서 내 글을 읽는 게 좋겠다. 스포일러에 대한 사회의 암묵적 규범이 점점 강화되는 추세에 편승해 보기로 했다.
이 그림이 무섭지 않냐고 묻는 어렸을 적 작가의 질문에 어른들은 모자가 왜 무섭냐고 대답을 한다. 이 그림은 모자가 아니라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이라는 설명을 듣고 나면 '아'하게 된다. 이 책을 처음 읽을 때는 '아! 그럴 수도 있겠네'라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한참 지난 지금은 그림을 보고 '보아뱀이 삼킨 코끼리'를 연상하지 못하는 이유가 어른들이 동심을 가지지 못했다는 것보다 소설가의 말발에 설득당했다고 생각한다. 백과사전을 뒤져보면 보아뱀은 거주지역이 중남미란다. 내가 아는 한 코끼리는 인도와 아프리카에 산다... 입을 다물 시간이다.
표준정규분포
보아뱀이 삼킨 코끼리 그림을 가져온 것은 표준정규분포라는 곡선을 가지고 이야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통계학에 나오는 '표준 정규분포 곡선'이란 것을 놓고 아는 척하며 이야기를 풀고 싶었지만 포기했다. 통계라는 세상의 문턱 앞마당 정도에 해당하는 '확률'이란 낮은 계단에서 수학을 포기한 내 지식수준으론 불가능하다. 하긴, 표준정규분포곡선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면서도 인용해서 말하겠다는 것이 뻔뻔하긴 하다. 무식하면서 뻔뻔한 이야기를 계속해봐야겠다.
표준정규분포곡선은 키나 몸무게처럼 하나의 요소를 가지고 한 집단의 범주를 측정해 보면 비슷한 모양(마치, 보아뱀을 삼킨 코끼리 같은)을 보인다는 것이 내가 겨우 이해한 사실 중 하나다. 이 곡선을 가우스라는 사람이 처음 발견했는지 체계화시켰는지 모르겠지만 그 사람의 이름을 따 '가우스 곡선'이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가우스라고는 웹툰으로 한참 유행하던 '가우스 전자'와 수학학원에 가우스가 들어 있다는 것 정도만 안다.
코끼리에 이야기를 덧대 보자
모자이자 보아뱀이 삼킨 코끼리 그림을 그래프라 생각해 보기로 한다. 해당 그래프의 가로축은 연소득 또는 자산, 세로축은 해당 소득이나 자산에 해당하는 우리나라 개인의 숫자라고 해보자. 그럼 코끼리 코가 위치한 곳은 돈을 아주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위치할 것이고, 코끼리 꼬리에는 돈이 아주 적은 사람들이 위치할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나,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의 상당수는 코끼리의 코와 꼬리를 제외한 머리부터 엉덩이 어딘가에 위치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나의 자산과 소득을 객관적으로 보면 그래도 코끼리 목 정도에 있을 것 같다. 잘하면 코끼리 머리 정도까지 갈 수도 있을 것 같다. 고기 부위로 얘기하면 목심 정도.
코끼리식 기사 읽기
내가 코끼리의 어느 부위에 있는지 알고 나야 어떤 기사를 볼지, 기사를 보더라도 어떻게 봐야 할지 기준을 잡을 수 있다. 세상 쓸모없는 걱정이 재벌 걱정과 연예인 걱정이란 말을 코끼리에 대입해 보면, 재벌과 (잘 나가는) 연예인은 코끼리 코 중에서도 콧구멍 쪽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걱정하는 사람들은 잘해야 코끼리 머리, 대부분 몸통, 아니면 꼬리 쪽에 있다. 몸통과 꼬리가 콧구멍 걱정을 하는 것이니 세상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한다.
콧구멍을 전혀 무시할 필요는 없다. 싫든 좋든 코끼리는 부위가 다를 뿐 엮여 있는 존재기 때문에 완전히 담쌓고 무시하는 것은 도움 될 것 없다. 관심을 넘어서 걱정까지 할 필요가 없지.
종부세는 전형적인 '코끼리 코'에 해당하는 기사다. 내가 몸통이라면 종부세 기사에 크게 반응하거나 민감하게 굴 필요는 없다. 뉴스를 만드는 사람들도 안다. 그래서, 코가 아프거나 막히면 몸통은 무사할 것 같아?라는 뉘앙스 또는 코를 차별하는 것은 코끼리를 차별하는 것과 같다는 식의 논리가 흐른다. 콧구멍이 커져서 숨을 잘 쉬면 몸통에도 도움이 될 거라는 말은 사실이겠지만 몸통이 체감할지는 모르겠다.
사회 약자를 위한 정책 관련 뉴스는 대표적인 '코끼리 꼬리'에 해당하는 기사다. 꼬리에 있는 사람들은 '이게 무슨 퍼주기냐'라고 댓글 달기 전에 '내가 해당되는지 따져보는 게' 천배는 낫다. 몸통에 있다면 빠르게 지원책 기준에 부합되는지 체크한 후 아니라면 쿨하게 넘기면 된다. 기준에 부합되면 정부를 욕하더라도 지원책을 고맙게 받으면 된다. 기사에서는 '퍼주기', '포퓰리즘', '모럴 해저드'라는 키워드를 섞어 사람들의 관심을 유도하는 경우가 많다. 진짜 그런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쿨하게 넘겨도 된다.
몸통이 읽을 만한 기사
넓은 의미의 '시장'과 관련된 기사가 바로 몸통이다. 금리, 환율, 유가, 주요 산업, 무역수지, 주식시장, 부동산 시장 등의 흐름을 다루는 것들이 우선 봐야 할 기사다. 코끼리 코나 꼬리와 관련된 기사는 신기하고, 부럽고, 화가 나고, 깊은 인상을 줄 수는 있지만 내 삶과는 거리가 좀 있다.
덜 자극적이고 밋밋한 기사들이 오히려 나에게 필요하고 현실적인 기사다. 그러고 나서 관심 있는 분야로 들어가야 한다. 몸통에 있는 사람들은 특정 섹터의 움직임보다 전체적으로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아야 하는 것이 먼저다. 마치, 지금 봄인지 여름인지, 가을인지 부터 알아야 하는 것과 같다. 내가 아무리 우리나라에서 가장 더운 곳에 살고 있더라도 겨울에 반팔을 입고 지낼 수는 없다. 몸통에 있는 사람은 우선 '계절'구분을 할 줄 알아야 한다. 계절을 아는 것이 철드는 거다. 그리고, 철을 파악하는 것이 기사를 읽는 첫 번째 목적이 되어야 한다.
심심하고 별 특별한 게 없는 것이 몸통
보통 사람들의 삶은 지루하고 특별하지 않고 반복되며, 대단한 것이 없어 눈에 띄지 않는 삶이다. 괜찮다. 눈에 안 띈다고, 특별하지 않아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몸통에 있는 사람들은 평범해도 불필요하거나 무가치하지 않다. 코끼리 코와 꼬리가 눈에 띈다고 둘만 똑 떼어 놓으면 코끼리는 죽는다. 코끼리가 살아 있고, 코와 꼬리가 돋보이는 것은 평범한 몸통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 몸통이라고 계속 몸통으로 살아야 한다고 정해진 것은 없다. 나이를 많이 먹은 나는 현실적으로 코끼리 코의 삶을 살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지만, 젊은 사람들은 적어도 나보다 훨씬 높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또 하나. 굳이 코끼리 코나 꼬리가 돼야 할 이유가 있을까? 난 코끼리 코나 상아가 되고 싶은 욕구는 없다. 굳이 정하라면 코끼리 볼살? 그냥 코끼리 볼살은 좀 더 부드러울 것 같고 남들이 잘 모르는 흥미로운 부위기 때문이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모습보단 내가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는 게 인생 사는게 더 재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