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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부를 뽑을 순 없어

집. 자산이자 사는 곳 이야기 하나

by Toriteller 토리텔러

나이가 같은 사촌이 있다. 나보다 몇 년 늦게 사회생활을 시작했지만 안정적인 노후 설계가 가능한 공무원이라 늘 고용불안으로 고민하는 사기업 직장인보다 지금은 더 나아 보인다. 어릴 때부터 같이 놀며 자랐기에 우린 많은 기억을 공유하고 있다. 그래서,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각자의 가정을 꾸린 후 만나는 횟수는 줄었어도 다른 누구보다 서로의 인생사를 잘 알고 있다.


오랜만에 한 시간 가량 둘이서만 움직일 일이 생겼다. 둘이 같이 알고 있는 또 다른 오랜 친구의 아버님이 돌아가셔 상가를 방문하는 길. 누군가의 죽음으로 많은 만남이 이루어지는 곳이 장례식장이다. 어릴 때 만나면 뭐하고 놀지, 어떤 TV프로를 봤는지. 중고등학생 때는 어떤 여자를 좋아하는지, 성적은 잘 나오는지. 커서는 언제 군대 갈지, 사귀는 사람은 있는지 같은 이야기로 시작해 최근에 본 영화와 감독과 배우에 대한 평, 요즘 읽는 책의 내용과 저자와 유사한 책들, 최근 유행하는 음악과 가수와 장르 등으로 펼쳐졌다. 예술과 철학에 대한 각자의 정리되지 않은 생각과 주장의 줄기와 조각들을 검색 없이 머리에서 끄집어내며 이야기를 나눴다. 나이 들면 뇌의 용량이 줄어들 듯 오랜만에 만나는 어른들의 대화는 범위가 다시 좁아진다.


회사에서 그동안 어떤 일을 하면서 고통받았는지, 자라나는 아이가 어떤 속을 썩였는지, 먹고사는데 불편함이 없는지, 부모님 건강은 어떠신지 대략 먹고사는 이야기들이다. 사촌과 나는 술을 좋아하지도 않고 먹을 것을 찾아다니며 즐기지도 않는다. 게다가 골프도 치지 않으니 이야기 주제는 더더욱 한정된다. 친한 친구와는 정치와 종교 이야기는 하지 말라고 한다. 서로 생각이 다르면 싸움만 날뿐 서로를 이해하기도 어렵고 괜히 사이만 틀어지기 때문이다. 다행히 종교는 같고 정치 이야기는 스치듯 할 뿐이다. 막연히 사촌은 공무원이니 정부 편에 있지 않을까 추측만 했을 뿐이다.


"이번 종부세는 너무 심해"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어른이 된 나의 머릿속에선 급하게 계산기가 돌아간다. 사촌의 집이 어디인지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지역의 아파트 값이 종부세를 내야 할 만큼 많이 올랐다는 사실에 먼저 놀랐다. 부동산으로 돈을 못 버는 나 같은 사람들의 특징은 과거에 집착한다. 어려서부터 봐왔던 동네일수록 그 동네의 발전하는 모습과 펼쳐질 미래를 알아채지 못한다. 내가 어려서부터 봐 왔던 모습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고, 어려서 부터 봐왔던 옛날 동네가 계속될 거라 착각한다. 기억 속 그 동네는 지하철 2호선 역-당시는 3호선도 없던 시절이니-에서 내린 후 버스로 갈아타고 15분에서 20분을 더 가야 하는 곳이었다. 높은 빌딩은 물론이고 아파트도 없었으며 도로는 좁아 차들이 겨우 다니는 길이지만 옆에 꼭 시장이 있는 동네. 사촌네 집은 찻길에서 약 10m 정도 들어가면 있는 3층 다세대 주택이었다. 내가 사는 동네와 비슷한 그저 그런 서울의 한 곳이었다.


그 동네가 재개발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그 동네 근처로 새로운 지하철 노선이 뚫린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사촌의 어머니이자 나의 이모가 '돈 있으면 그 동네 딱지를 사라'는 말을 한 것도 기억이 나지만 안 했다. 돈도 없었지만 내 어릴 때 기억으로 그 동네는 비싸게 변할 동네가 아니라는 확고한 그러나 아무런 근거 없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 동네에서 자란 사촌이 취업을 하고, 가정을 꾸리고, 재개발을 하는 동안 동네 아주머니들 사이에서 조금이나마 영향력을 행사하던 이모는 3층 다세대주택을 2채의 아파트로 바꿔놓는 마법을 부렸다. 그중 한 채를 아들이자 나의 사촌에게 넘긴 것이다. 증여의 형태를 띠었는지, 이른바 지분 쪼개기라는 방법으로 지분을 마련해 주었는지는 모르겠다. 내 사촌이 장관 욕심이 생겨 청문회에서 재산형성 과정을 소명하기 전까진 합법적으로 성실하게 재산을 모았다고 믿을 뿐이다.


안정적인 공무원이라지만 외벌이로 아이 둘을 키우고 있다. 공무원 월급으로 4인 가족이 먹고사는 것은 가능해도 사교육에 충분히 투자하면서 여유롭게 살 수준은 아니다. 그래도 집이 있다니 다행인데, 전 국민의 2%만 해당하고, 보수적인 논조의 기사에서 주장하는 집 있는 사람으로 범위를 좁혀도 6.4%에 해당하는 종부세를 내는 사람이라니. 게다가 강남 3 구도 아닌 강북에 내가 아는 그 동네인데?


우리나라에서 경제가 발전하며 동네가 바뀌는 일은 가을에 물든 나무를 찾는 것만큼이나 흔하다. 단지, 내가 가을이 왔는지 모를 뿐이다. 나는 종부세를 내고 싶다는 말을 곧잘 하곤 한다. 종부세를 실제 내게 되면 분명 투덜거리며 진짜 부자는 건들지도 못하면서 쥐똥만큼 늘어난 서민의 재산을 세금으로 뜯어가는 정부라고 욕 하겠지만 지금은 종부세를 낼 만큼의 자산이 되는 부동산이 아니다. 종부세를 내고 싶다면서도 부부 공동명의로 주택을 소유하면 종부세를 내기 더 어려워지기 때문에 집을 살 땐 공동명의로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진짜 세금을 내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 세금 낼만큼 비싼 집을 갖고 싶기 때문이다. 혹시, 사촌은 단독명의로 했는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아파트를 어떻게 얻게 되었는지도 궁금했지만 이것도 묻지 않았다. 혹시, 집 한 채가 아니라 다른 부동산이나 다른 집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묻지 않기로 했다. 아무리 친해도 남의 가정경제를 꼬치꼬치 묻는 것은 무례한 짓이다. 궁금했지만 어른스럽게 묻어두기로 했다.


"종부세 내니 좋겠다. 나도 내고 싶은데..."라며 어른스럽게 분위기를 돌리려 했다.

"종부세 내려면 빚을 내야 돼.. 그러니 어떻게 살겠어"


뉴스에서만 보던 사람을 직접 만난 것은 처음이다. 종부세 관련 기사에 등장하는 '몇십 년 간 살던 집을 팔아 세금을 내란 말인가?'라는 사람은 항상 강남 아파트를 가진 은퇴한 노인이었는데, 뒤통수를 제대로 맞았다. 강북에 사는 중년 월급쟁이가 뉴스에는 나오지만 실재하는지 의문시되던 그 사람이었다니. 내 주위에서 정말 빚을 내 세금을 내야 한다는 사람을 만난 것이 신기했다.


"아 정말?"

이 말 외에는 적당한 반응이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살려면 이 정부를 뽑을 순 없어"


그때는 지금의 정부가 들어서기 전 이야기다. 민주당 정권에서 종부세를 강화하고 부동산 투기를 막는다며 어려가지 규제책을 내놓았지만 집값이 잡히기는커녕 계속 올랐다. 사람들은 아우성치고 부동산 규제책들의 불합리한 내용들을 보도하는 기사들이 넘치던 시기. 특히, 종부세는 일부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해당됨에도 연일 주요하게 부동산 정책의 실패를 공격하는 소재로 많이 쓰였다. 연말에 있을 대선 주자로 누가 양당의 후보자가 될지와 부동산 때문에 집권당에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돌았다.


추측해 보면 사촌은 지금 대통령에게 투표했을 것이다. 그의 정치적 선택은 자기의 직면한 경제적 입장에서 가장 유리한 선택지였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일부 불합리한 피해를 보는 종부세 대상자들의 부담을 경감시킬 가시적인 조치는 현 정부에서도 거의 없고 부동산을 포함한 우리나라 경기는 힘든 시기를 향해 가고 있다.

원했던 결과가 나오지 않았지만 자기 경제적 이익을 위한 선택. 난 그 선택을 이해한다. 각자의 입장이 다르기에 다른 사람의 선택에 동의한다는 말보다는 이해한다는 말이 적합해 보인다. 오히려 자기 입장과 다른 선택을 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기 어렵다. 알면서도 자기가 처한 상황에 반대되는 선택을 하는 사람은 일제강점기하에서 누릴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고 배고픈 독립투사의 길로 들어선 이들처럼 투철한 사명감을 가진 소수일 거라 생각한다. 대부분은 자기에게 불리한지 모르거나 따지기 귀찮아 다른 사람의 주장을 따라가는 것처럼 보인다. 하긴, 아는 척하며 따진다고 정말 맞는 것인지 확신도 없다. 나이 먹을수록 생각은 흐려지고 좋지 않은 성질만 또렷해지니 되도록 내 목소리를 줄이고, 내가 그은 선을 뭉게 버리려 한다.


내 입장에선 여전히 종부세를 내고 싶다. 그런데 언제 그날이 올진 모르겠다.



추석 연휴가 시작됩니다. 다들 즐거운 한가위 보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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