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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잘했다"

집. 자산이자 사는 곳 이야기 둘

by Toriteller 토리텔러

이번엔 후배 얘기다. 같은 업종에 근무했었지만 빛나는 이상과 동떨어진 비루한 현실을 버티다 못해 결국 탈출했다. 이직한 곳에서라도 잘 살기 바랐지만 대한민국 회사는 어디든 거기 있는 이에게 비루함을 씌워준다. 연봉 앞자리가 바뀌었다는 것 하나 붙잡고 또 다른 비루한 삶을 이어가고 있는 것을 보니 아버지의 삶과 내 삶이 떠오른다. 세대가 달라도 모두는 각자의 비루함을 견디며 살고 있다.


비루한 이야기를 계속하니 지루하다. 멈출 때다. 후배는 그동안 사귀던 사람과 결혼 날짜를 잡고 연락을 했다. 공식적으로 사무실을 벗어날 건수를 찾던 내겐 반가운 연락이다. 찾아가겠다는 나의 말에 속도 모르고 굳이 그럴 필요 없다는 후배에게 날 도와주는 일이라 퉁 치고 먼 길을 나섰다. 월급쟁이의 한계련가. 나보다 더 꼼꼼한 조직의 관리를 받는 후배 왈 내가 가는 것은 괜찮으나 미팅 명목이 필요하단다. 쫌스럽게도 우리나라 대기업이 방문한 손님에게 주차권 하나 발급해 주는 이유를 달아야 한단다. 선수끼리 왜 이러냐며 알아서 하라고 했다. 나중에 들으니 후배의 회사는 조직원의 공감 한 방울 없이 경영진의 알 수 없는 꼼꼼함 충만으로 직원들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미안했지만 결과적으로 둘의 미팅에서 양쪽이 만족할만한 명분을 찾아낼 수 있었다. 행복해진 우리는 서로의 법인카드로 식대를 결제하겠다는 아름다운 마무리로 완벽함을 더했다.


"차는 샀니?"

카페에 자리 잡고 노트북 화면을 열어 마치 나에게 비즈니스를 설명하는 구도를 잡던 후배에게 던진 질문이다. 이직하기 전부터 당시 새로 나온 캐스퍼를 사고 싶어 했던 후배였기에 내가 관심을 놓지 않고 있었음을 뭉근하게 풍기는 질문이었다.


"집 때문에 차는 포기했습니다"

집 때문에 차를 포기한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 없다. 집을 사기 위한 돈과 차를 사기 위한 돈은 비교가 민망할 만큼 차이가 크다. 유럽 여행과 서울 맛집 투어를 같은 무게로 말하는 듯한 뉘앙스. 대부분의 사람은 유럽여행 갈 돈이 없으니 맛있는 거라도 사 먹자고 말할 텐데, 후배는 맛집 갈 돈을 아껴 유럽여행 가겠다는 말을 하는 거다. 후배의 맛집 투어는 횡성 한우 한 마리를 통으로 사 먹는 건지 잠시 헷갈렸다.


"역세권 청년 주택에 들어가게 되었거든요. 급하게 이사도 했어요"

"그거 최근에 발표한 거 아니야? 벌써 모집 중이야?"

"원래 있던 거예요. 최근 발표 내용은 더 확대하는 거죠"

"그런데 왜 차를 안 사?"

"입주 조건에 차가 있으면 안 되거든요"

"아....!"


사람은 자기 삶과 딱 붙은 일이 아니면 관심을 두지 않는다. 나는 청년도 아니고 집도 가지고 있으니 역세권 청년 주택이란 제도가 있다는 것만 알고 있지 세부조건은 알리 없다. 차를 가지면 청년주택을 신청할 수 없다는 조건이 매우 신선했다. 아니, 좀 웃겼다. 거랑 여랑 뭔 상관이라고... 혹시, 마세라티나 롤스로이스를 모는 사람들이 생길까 봐 그런 걸까?


"청년 주택 조건 어렵지 않아?"

"맞아요. 원래 저는 안 되는 줄 알고 있었는데 운이 좋았어요"


후배와 이야기를 마친 후 역세권청년주택이란 것을 찾아봤지만, 확실히 내 얘기가 아니다 보니 자세히 읽히지 않는다. 대략적인 조건은 19~39세만 가능, 연간 소득은 신혼부부 합산 기준 약 1억 원보다 낮아야 한다. 역세권청년주택은 청년뿐만 아니라 조건은 조금 다르지만 신혼부부에게도 열려있다. 게다가 자동차를 가지고 있으면 안 된다는 조건 역시 분명히 있었다. 명문화된 조건을 보니 더 신기하다.

해당 사이트에 가면 역세권청년주택으로 제공되는 물량과 함께 각종 금융지원 내역이 소개되고 있다. 위에서 말한 조건은 최소 조건으로 물건별로 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원하는 개별 물건의 '모집공고'를 살펴보고 나에게 해당되는지 따져봐야 한다. 좋은 점이라 하면 주변 시세의 85%~95% 정도의 금액으로 임대할 수 있고, 적절한 금융지원을 받을 수 있다. 다시 얘기하겠지만 금융지원의 적절성은 사람마다 다르다. 누구에겐 적절할 수도 누구에겐 부족할 수도 있다.


"보통은 1순위에서 다 마감돼요. 그래서, 저는 대기자에 올랐는데 운 좋게 연락을 받은 거죠"

"사람들이 당첨돼도 계약하지 않는다고? 왜?"

"젊은 사람들이 돈이 그렇게 없나 봐요. 3천만 원을 구하지 못해서 포기한데요"

"3천만 원이 없다고? 좀 무리하면 마이너스 통장만 해도 되겠다"

"그러니까요. 그것도 구하기 어렵다는 거죠"


후배와 헤어지고 나서 꼰대 소리 했다는 것을 알았다. 20년 넘게 직장에 붙어 있는 내게 3천만 원의 무게감은 고민 없이 카드로 긁을 금액은 아니지만, 조금 무리하면 충분히 구할 수 있는 정도다. 안락한 주거지처럼 삶의 질을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는 결정이라면 기꺼이 그 정도의 무리함을 부릴 수 있다. 현실은 모두에게 그렇진 않다. 젊은이에게 몇 천만 원은 그리 만만한 금액이 아니다. 그 돈이 없어 겪을 청년의 무기력함은 단위를 억으로 바꾸면 내가 얼추 비슷하게 느끼지 않을까 싶다.


"새집에 사니까 좋더라고요. 아주 넓지 않지만 둘이 사는데 좁지 않고요. 10년 동안은 별 걱정 없이 살 수 있으니 만족해요. 근데 집을 사는 게 좋을지는 아직 모르겠어요. 집값도 너무 비싸고"

"아무튼 잘했다"


역세권청년주택 조건을 세세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내 기억이 맞는 것인지 모르겠다. 특히 키보드로 쳐 넣은 금액이나 기간 등의 숫자가 정확하다고 주장할 자신도 없다. 사람은 자기 관심을 벗어나면 기억하는데 더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데 나이 먹을수록 버티기에만 힘쓰기에도 부족하다. 후배의 마음과 생각과 결정을 다 이해하지 못했지만 후배에게 나의 진심을 끌어모아 해준 덕담이 '아무튼'이다. 금리도 오르는 시기에 짧지 않은 기간 안정적인 주거지를 구했다는 것이 기특하고 내게 안도감을 줬다. 안정적인 집을 가진다는 막연한 안도감. 이건 아마 내 세대에서나 공유될 고정관념의 끝자락 일지 모르겠다.


최근에 본 가장 당황스러웠던 尹, '집값 전쟁' 3개월만에..서울아파트 시가총액 2749억 증발이라는 기사. 지금 정부가 잘했다 못했다 평가 이전에 전쟁이란 단어에 어울리는 어떤 비장한 일을 정부가 했다는 기억이 전혀 없기 때문에 어떤 의도인지 알 수 없었다. 실제로 정부는 전쟁을 했지만 떠올리지 못한 것은 내 기억이 잘못된 거라고 믿기로 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성경에 나와 있으니 믿음으로 극복하련다.


오늘 이야기 소재인 역세권청년주택이란 정책을 널리 알려야겠다는 의지는 없다. 만약, 그랬다면 더 알아보고 정리해서 잘난 척 설명하는 글을 썼겠지. 정책이 나빠서도 아니고 지금 정부가 전쟁을 벌이는 것 같지 않아서도 아니다. 그냥 내가 친밀하게 신경 써야 할 사람들 중에 집을 구하는 청년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건조하게 착한 투로 말한다면 조건에 맞는 청년과 신혼부부들이 이 제도를 잘 활용하면 좋겠다. 나에겐 그저 내가 좋아하는 후배가 이 제도를 활용해 서울 도심 역세권에 위치한 새집에서 오랫동안 살 수 있는 혜택을 받았다는 것에 감사할 뿐이다.


[역세권청년주택 사이트] 서울만 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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