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유럽의 기차역 뷰를 가진 집

집. 자산이자 사는 곳 이야기 셋.

by Toriteller 토리텔러

내 이야기를 할 차례다. 난 늘 집을 갖고 했고 현재 가지고 있다. 분명 여러 가지 경제적 정황을 따져 봤을 때 무리했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심지어 집값이 하락한다는 기사가 나오고 있고 당분간 오를 일은 없어 보이지만 여전히 사기로 했던 지난 결정에 만족한다. 우리나라에서 '집에 만족한다'라고 하는 말엔 자산으로서의 부동산 가치와 사람 사는 곳으로써의 주거 가치가 뒤섞여 있다. 자산의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있어 객관적 평가를 내릴 수 있지만 사는 가치는 나와 가족의 주관이 더 중요하다.


집을 살 때 아이 엄마의 조건과 아이 아빠(=나)는 각자 내 건 조건이 있었다. 엄마의 조건은 아이의 교육을 위한 환경인 이른바 학군. 아빠의 조건은 어른들을 위한 환경인 서울 역세권. 적어도 '향후 투자 가치'가 최우선 순위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무시한 것도 아니다. 학군 좋은 서울 역세권 지역이라면 당연히 투자가치가 높으니까.


내가 산 시점의 가격을 보면 상투는 아니지만 귀 근처쯤이다. 집 값이 정점을 찍고 내려가는 추세는 분명한데 얼마나 빠졌는지는 알기 어렵다. 호가가 아닌 실거래가를 기준으로 봐야 할 텐데 거래 자체가 없으니 지금은 알 방법이 없다. 호가야 항상 높으니 그대로만 팔리기만 하면 내가 집으로 손해 볼 일은 없을 것이다. 배짱 있거나 물질에 초연한 성격과는 지구와 달 사이만큼의 거리를 가진 나이지만 앞으로 몇 년간은 집 가격에 큰 신경 안 쓰려한다. 집값이야 항상 오르내리는 것이라 퉁치고 무엇보다 살기에 만족하기 때문이다.


집 앞에는 이른바 혐오시설-혐오스러운 것 까지는 모르겠지만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더 많다-이 있다. 굳이 숨기거나 밝힐 이유는 없지만 만족하는 이유를 말하려니 꺼낼 수밖에. 동네가 특정될 수도 있겠지만 내가 유명 연예인도 아니고 수많은 성냥갑 중에 어느 집인지 알기 어려울 터라 이야기하련다. 지하철 차량기지 근처에 살면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이 지하철 바퀴가 휘어 있는 선로를 오갈 때 나는 날카로운 마찰음이다. 특히, 고요한 밤 시간에 수시로 들락 거리면 내뱉는 소리는 자극적이다. 게다가 우리 집 하늘로는 어느 나라 것인지 알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낮게, 비행기 제트 엔진 소리가 들리는, 비행기가 날아오는 동네다. 소음에 가장 민감한 것은 가족 중 나. 먹고 입는 것엔 둔감한데 쓸데없이 소리에는 예민하다.


나에게 지하철 차량기지는 기분 나쁘게 자극적이고 날카로운 소리를 지르며 들락거리는 기다란 철(iron) 지네의 둥지와 같다. 선거철만 되면 동네에 '차량기지 이전'이라는 현수막을 여야 정치인들이 모두 거는 이유를 알겠다. 그런데 어느 날.


"지하철이 다니는 걸 보고 있으면 마치 유럽 기차역에 있는 것 같아"

창 너머로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들락거리는 철 벌레를 보던 아내의 말. 철판 긁는 소리를 내던 철 벌레와 철 벌레집이 유럽 기차역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이제 우리 집은 서울에서 유럽 기차역을 볼 수 있는 뷰를 가진 아파트다.


"우와. 비행기 지나는 거 봐. 좋다"

커다란 소리를 내며 주기적으로 날아오는 철 모기를 보던 아이의 말. 소란스럽던 철 모기들이 런웨이를 걸어오는 브랜드를 입은 패션모델들로 바뀌었다. 이제 우리 집은 서울에서 모든 브랜드의 비행기를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뷰를 가진 아파트다.


남은 것은 소음에 민감한 나. 정신력으로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다며 '가족 사랑의 힘으로 발현시키는 인내'라는 되도 않는 말장난 할 생각은 없다. '하면 된다'라는 정신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는 새마을 운동 시기의 억지 주장은 군대와 회사에서 들은 것으로 충분하다. 적어도 내 삶에선 '되는 것을 한다'가 맞다. 해결책은 간단했다. 고마운 전 집주인과 기술의 발전. 전 집주인은 집을 팔기 전에 내부 인테리어를 새로 했다. 그중에서도 소리가 많이 나는 쪽에는 질 좋은 이중창을 설치했다. 좋은 품질의 이중창을 다는 것으로 모든 소리 문제는 해결된다. 더 민감하면 삼중창 달면 된다. 적절한 비용과 발전된 기술은 많은 정신적 고민을 해결할 수 있다. 이제 이중창을 닫으면 유럽 기차역에서 모든 나라의 비행기를 구경할 수 있는 집이 완성된다. 가족이 모두 만족하는 집. 이것으로 충분히 감사한다.


부동산의 투자가치를 무시할 순 없으니 따져본다. 어차피 재건축 가능 연한은 지났고, 옛날 아파트니 대지지분도 나쁘지 않고 용적률만 충분히 나오면 이른바 사업성은 좋다. 재건축 단지 아파트를 가진 집주인들이 관심 있어하는 재초환(재건축 초과이익 환수제) 완화나 안전진단 완화가 실현되면 재건축 움직임이 활발해질 것이다. 재건축 조합에 내가 나설 생각은 없지만 남들이 손들고 나설 때 적당히 맞장구 쳐주면 될 일이다. 재건축은 오늘부터 시작한다 해도 짧으면 7년 넉넉잡고 10년은 걸릴 테니 지금 부동산 시장이 안 좋다고 슬퍼할 일도 아니고 앞으로 재건축 수익성이 나올지 아닐지 앞당겨 고민할 필요 없어 보인다. 지금은 충분히 누리는 것이 더 현실적이다.


아이가 학교와 학원 다니는데 편리하고, 오래된 단지 특유의 잘 자란 나무와 공원, 자주 자랑하던 도서관과 체육시설, 오래된 맛집 및 큰 쇼핑센터. 지하주차장이 없어 이중주차는 필수에 그마저 늦게 가면 자리가 없지만 5분 정도 걸으면 넉넉한 공용주차 공간으로 해결. 그래서, 갚을 빚도 많고 지금 집값이 내려가고 있다지만 난 만족한다. 내겐 투자 수익이 극대화되는 집도 좋지만 삶의 안정감을 주는 집이 더 중요하다. (재건축으로 집값이 많이 오르는 것이 안중요하다는 것은 아니다. 두 번째 정도...)


오래 차를 몰다보면 차와 교감하는 경우가 있다는데, 집에도 그런 게 있다. 집을 구매할 때 여러 곳의 집을 구경하면 이상하게 말을 거는 집이 있다. 말 거는 집은 보통 비싸다. 이번 집 역시 말을 걸었고 다른 물건보다 비쌌다. 그래도 샀다. 힘들게 욕실 바닥 청소를 해서 광을 내고, 못 박을 때 부담 없이 구멍을 뚫고, 싱크대에 이런저런 걸 마음대로 설치할 수 있는 것은 내 집이 주는 아주 작은 만족감이다. 그래서, 옛날 아파트라 화장실이 한 개 밖에 없고 비만 오면 야릇한 하수구 냄새가 올라오지만 우리 집이 좋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영란씨와 연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