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52시간에 익숙해지고 있었는데, 69라는 시간이 튀어나왔다. 실제로 한 주에 몇 시간을 일해야 하는지 따져볼까 하다 말았다. 그냥 옛날이야기를 하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다. 요즘 세상이 뭔가 옛날로 돌아가는 것 같아서다. 퇴근 시간에 엘리베이터엔 사람이 가득하다. 처음에는 정시 퇴근하는 사람들이 낯설었다. 퇴근시간에 사람들이 회사를 빠져나가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왜 낯설었을까?
"격주 일요일 휴무만 보장해 주시면 안 될까요?" 주 5일제가 당연한 요즘. 주 6일제를 벗어나 격주 토요일 휴무제가 막 도입되고 있던 시기였다. 나는 20대. 사회생활을 막 시작한 햇병아리 시절. 지금도 컨설팅 업체를 싫어하게 된 계기가 된 일. 너무 유명했던 글로벌 컨설팅 업체가 들어와 컨설팅이란 걸 시작했다. 미친듯이 자료를 요구했다. 세련된 외모와 전문적인 영어 단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며, 환장한 듯 일하는 컨설턴트들과의 만남은 고문이었다. 안 되는 것을 안된다고 말해도 자기들의 유려하고 화려하며 검증된 프레임에 집어넣기 위해 나를 비롯한 직원들을 고문했다. 당시 내 일은 숫자 가득한 보고서를 만들어내던 터라 컨설턴트들의 고귀한 요구사항에 맞춰 우리회사의 내용을 임원진에게 전달하는 일종의 '번역 자료'를 만들어야 했다.
미친 듯이 일하는 컨설턴트들과 이미 세뇌가 끝나 선두에 선 일본 앞잡이 같은 본사에서 낙하한 직원들은 약자로 된 영어 개념을 설명하면서 무지한 사원들을 고문했다. 나와 우리팀은 당연히 고문 1순위였다. 우리 뇌가 컨설팅에 맞춰져야 하니까. 설명을 들어도 나는 머리가 아둔한지 이해도 안되고, 만들지 못할 것으로 확실해 보이는 요구사항이 나와도 반박을 못했다. 마치, 네이티브 영어 사용자에게 더듬거리는 영어로 반박해야 하는 기분이랄까. 머리에서는 '저거 안 나오는 자료인데'라는 생각이 가득했지만, 결과는 항상 'I'm fine. and you?'같은 수준의 말만 할 뿐이었다. 현업 직원들 역시 이른바 '오너의 명령'이란 직장인에게 어명과 동급의 단어를 꺼내는 순간 '그냥' 따라야 했다. 쉬운 말로 '까라는데 까야 했다'
나는 내가 이해 못 한 것을 다른 현업팀에 전달해 자료를 받는 일을 했다. 머리 좋은 선배들이 도와줬지만 "이걸 왜 하라고?", "이런 자료 없는 거 알잖아?"라는 말을 현업 담당자들로부터 끊임없이 들어야 했고, 가끔 현업 임원들에게 끌려가 "왜 그러니?"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힘들게 설득 - 아니, '오너가 시키는 거에요'라는 협박-하고 나면 자료를 달라고 독촉해야 했고, 독촉해도 퇴근시간이 지나 도착한 자료를 정리하면 항상 12시 근처였다. 이 짓을 반년 가까이했다.
밤을 새워 담당 임원에게 자료를 만들어 바치면, 그 자료를 들고 오전 회의에 들어갔다 오후에 나타나 '다시 해'라는 말을 하곤 사라졌다. 임원은 저녁 7~8시쯤 퇴근하면서 "야근하지 말고 이것만 해놓고 들어가"라는 말을 남겼다. 우리 팀은 그 임원의 최소한 요구사항인 "이것만"을 하기 위해 밤을 새웠다. 아침엔 다른 사람들이 출근하기 전에 회사 화장실에서 머리를 감고 핸드 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렸다. 요즘 복장이 자유로운 스타트업 개발자를 생각하면 안 된다. 그 당시 직장인은 위아래 같은 색깔의 정장과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다녀야 했다. 화장실에서 머리 감는 모습을 떠올려 본다. 짙은 양복바지에 검은색 구두를 신고 넥타이는 와이셔츠 주머니에 꽂은 채 세면대에서 머리를 감던 나.
억대의 돈을 준 컨설팅의 성공적인 겨로가를 위해 주말에도 출근했고 당연히 주말 야근도 했다. 과장님과 선배와 함께 담당 임원에게 힘들다고 얘기를 했다. 도저히 이렇게 못살겠다고.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냐는 임원의 질문에 기껏 했던 요구사항이 이 글의 첫 문장이다. 소박했다. 2주에 한 번만 쉬게 해 달라는 요구.
얘기할 것이 더 구질구질 많지만 뒷 이야기로 마무리해야겠다.
컨설팅의 최대 성과는 부문-본부라 부르던 명칭이 영어 약자로 바뀐 것이다.
영어 약자를 쓰는 조직으로 새롭게 혁신(!)한 회사는 약 1년 후 IMF를 맞이한다.
입사할 때 회사 직원이 1,000명이었는데 IMF 이후 1년인가 2년 만에 400명으로 줄었다.
그리고 우리 회사는 다른 계열사와 묶여서 하나의 회사로 합병됐다.
회사 의자에 엉덩이를 붙인 시간에 비례해 회사 수익이 늘어나면 좋겠다.
회사에 머문 시간에 비례해 연봉을 주면 좋겠다.
그럼 기꺼이 회사에 라꾸라꾸 침대를 자비로 들여놓을 의사가 있음을 명백히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