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번째 이야기
요리를 만드는 사람을 요리사라 부르고, 뉴스를 만드는 사람을 기자라 부른다. 두 직업은 요 근래 사람들의 인식이 꽤나 달라진 직업이기도 하다.
네! 셰프!
요리를 만드는 사람 중 최고를 부르는 말은 (어릴 적) 주방장이었다. 주방의 대장. 요리를 만드는 사람은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일하는 사람으로 (그냥) 기술자였다. 맛있는 요리를 만들 줄 아는 사람이 부럽긴 했지만 존경한다거나 요리사를 하고 싶다는 아이들을 찾기는 어려웠다. 아무리 요리를 잘 만들어도 그는 안 보이는 공간인 주방의 왕. 항상 불 곁에서 날카로운 조리도구와 싸우는 3D업종의 숙련자였다. 누구보다 자식들의 미래에 관심을 갖는 부모들이 선호하는 직업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 요리를 만드는 사람은 존경받는 직업이다. 그리고, 이제 방송에서, 언론에서 주방장이라고 부르는 걸 듣기 어렵다. 어느새 요리는 예술의 경지에 올라있고, 그들이 흘리는 땀과 노력이 인정받고 있다. 사람들의 인식이 달라지면 보통 호칭이 달라진다. 요리사, 주방장에서 이제 그들은 셰프로 불린다. 주방장이란 호칭에도 존경의 의미가 있었겠지만, 셰프라는 호칭엔 리스펙이 가득하다.
기레기
뉴스를 만드는 사람은 기자다. 언론인이란 단어엔 사회가 인정해 주는 권위가 담겨 있다. 그래서, 언론이나 언론인 앞에는 '참'이란 단어를 곧잘 붙이곤 한다. 사람들은 기자의 무게감을 잘 알고 있다. 문제 많은 기자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참 언론인의 자세를 이야기할 때 기자에게 거는 기대감이나 존중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그렇지만 요즘처럼 전방위적으로 '기레기'로 불리는 일을 보게 될지 몰랐다. 요리 전문가의 위상이 전반적으로 상승했다면, 뉴스 전문가의 위상은 기레기라는 멸칭과 함께 전반적으로 하락했다. 어떤 기자는 '기레기'라는 단어를 책 제목에 쓰기도 하고, 어떤 이는 기레기라 욕하는 것에 발끈해 명예훼손으로 법적 다툼을 벌이기도 한다.
이런 멸칭을 만든 것의 가장 큰 책임은 기자 집단과 언론에 있다. 그렇다고 모든 원인을 기자에게 돌릴 수는 없지만 가장 큰 책임이 있다고 본다. 하나의 별명이 생겨나고 그 별명이 널리 쓰인다면 사회적 공감대를 이룬 것이다. 사회적 공감은 누가 강요하는 것도, 누가 세뇌하는 것도 아니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 자연스럽게 늘어가며 별명은 전염병보다 빨리 퍼진다. 기자에서 기레기로 변하는 과정을 옆에서 봐서인지 기자라는 집단에 대한 비난 보단 안타까움이 더 크다. 그리고, 기자들을 기레기라고 싸잡아 부르는 것이 불편하기도 하다. 내가 아는, 알던, 기자들은 괴팍하긴 해도 뉴스를 만드는데 진심인 사람들이다. 그리고, 남들이 다 기레기라 불러도 적어도 내가 아는 좋아하는 기자들에게 기레기란 호칭은 과하다.
내가 만난 기자들 이야기
우리나라 모든 매체의 모든 기자들을 만난 적은 없다. 하지만, 누구나 알고 있는 유명인을 포함해 적어도 많은 기자들을 옆에서 본 사람 중에 한 명은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기레기라 불리기 이전 만난 기자 이야기를 풀어보고 싶다. 내게 기자는 기레기도 아니고, 사회 정의를 위해 앞장서야 하는 투사도 아니고 자신의 미래와 현실을 걱정하는 특수직 직장인이라는 느낌이 더 강하다. 존중이나 비난대신 특수직인 기자들의 특징을 말해보고 싶다.
질문하는 기자
기자들과 이야기할 때는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하하 웃다가도 예상치 못한 질문을 던진다. 예상치 못한 질문을 하는 기자를 만났다면 제대로 된 기자라고 봐도 된다. 기자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얘기를 들으면 일단 질문한다. 혹시나, 분위기가 싸해지는 질문이 될지도 모른다. 분위기에 상관없이 궁금한 것이 생길 때 날카롭게 질문하는 기자를 만났다면 그는 기자가 맞다. 기자는 질문에 익숙하고, 질문에 특화되어 있고, 상대방을 궁지로 모는 질문을 할 줄 안다. 그런 기자의 질문을 받았다면 확실한 태도를 가지는 게 좋다. 모르면 모른다 말하고, 알면 아는 한 얘기하면 된다. 기자들은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뭐라 하지 않는다. 알아야 하는 걸 모를 때, 모르면서 안다고 말할 때 기자들은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 질문하지 않고 듣기만 하는 기자는 받아쓰기를 하는 사람이다.
수줍지만 말이 많은 기자
기자들은 대부분 말이 많다. 만약, 말이 적은 기자를 만났다면 아직 당신에게 경계심을 풀지 않은 상태일 가능성이 높다. 말이 없는 기자를 만나는 것은 말이 없는 택시기사를 만나는 것보다 힘들다. 기자들이 많은 말을 하는 이유는 그만큼 머릿속에 들어 있는 것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만큼 취재라는 상황에 익숙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야 취재할 내용이 나오고, 상대방의 이야기 중에서 궁금한 것이 나와야 질문을 하게 된다. 또한,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을 다시 확인도 해야 한다. 그래서, 기자들은 말을 많이 하게 된다. 실제로 말하기 좋아하는 것과 상관없이 자신이 알고 있고, 자신의 취재분야와 관련된 것이면 보통의 기자들은 귀에서 피가 날 때까지 떠든다. 그러면서 머릿속에는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고 있다. 이야기가 흐르고 나면 슬쩍 물어본다. "그래서 이렇다는 건가요?" 기자의 머릿속 기사 틀과 맞다면 약간의 덧붙임과 더불어 요약을 해줄 거고, 틀과 맞지 않는다면 그게 아니라고 다시 이야기를 할 것이다. 아무튼, 귀에 피가 날 때까지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확인하는 기자
기자들은 잘못된 정보를 전달했을 때의 파장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확실한데 왜 보도하지 않는 거냐!'라고 따지더라도 보도를 안 할 때가 있고, '말도 안 되는 걸 왜 보도하냐!'라고 모두가 이야기해도 보도할 때가 있다. 하지만, 어떤 경우라도 기자들은 상상이상으로 확인하고 검증한다. 적어도 '내가 이렇게 보도할 때 문제가 있지 않을 만큼'은 근거를 가지고 있어야 기사로 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좁게는 자신이 다칠 수 있고, 범위를 넓혀 조직이 다칠 수 있고, 더 넓혀 잘못 전해진 사람이 다칠 수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기사를 만드는 조직엔 데스킹이라는 프로세스가 있다. 취재에서 올라온 기사 내용을 제삼자가 다시 검토하는 과정이다. 제삼자의 눈에서 봤을 때 맞는지 틀리는지 다시 한번 살펴보고 어딘가 미진할 경우 내용을 보강하도록 취재기자에게 다시 지시한다.
기자와 언론에 불신이 많은 사람일수록 이 이야기에 헛웃음 칠 것 같다. 딱히 변명할 건 없다. 기레기란 말이 괜히 생긴 건 아니니까.
완성도에 몰입하는 기자
요즘 훈련받은 개들은 밥 먹을 때 건드려도 되는지 모르겠다. 속담에도 있듯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는 말은 개를 위한 것이기도 하고, 개를 건드리면 위험해질 사람을 위한 말이기도 하다. 훈련받지 않는 개들은 밥 먹을 때 건드리면 주인이라도 일단 심하게 짖으며 이빨을 드러내고 물려고 한다. 밥 먹는 동안 밥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기 때문이며, 생존에 직접적으로 연관 있기 때문이다. 마감시간에 기자에게 말 거는 건 밥 먹고 있는 개에게 밥그릇을 치우는 것과 같다. 신문기자들에게 마감은 자신의 존재가치 증명의 시간이자 자신의 가장 숭고한 일을 완성하는 순간이다. 성격 좋은 기자라면 '마감이라..'라는 말로 끝날 거고, 성질 나쁜 기자라면 쌍욕을 할지도 모르겠다. 중간은 그냥 무시한다.
정보를 많이 가진 기자
찌라시라는 것이 있다. 요즘은 카톡으로 많이 도는 각종 소문과 출처가 불분명한 뒷이야기들. 기자들은 찌라시를 포함한 정보망을 여럿 가지고 있다. 출입처라고 부르는 공식적인 취재라인과 전문가 또는 취재원이라 부르는 자신만의 취재라인, 그리고 편집국이란 집단에서 '정보보고'라는 형태로 공유되는 온갖 정보들까지. 기자들은 일반사람들보다 많은 정보와 출처를 가지고 있어 다른 면을 많이 보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과 다른 방향의 기사를 내기도 한다. 누군가 A라는 사람을 욕할 때 기자는 밝힐 수 없는 A의 사정을 알기에 옹호할 수도 있고, 누군가 B를 칭찬할 때 기자는 숨겨진 이야기를 알기에 B를 비난할 수도 있다. 기자는 항상 반대편에게 비난받는 외줄 타기를 하는 숙명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일부 기자는 이를 악용하기도 한다. 맞다. 기레기라 불리는...
전문가가 아닌 기자
기자들의 전문성이 떨어진다는 말을 한다. 사실, 요즘만이 아니라 옛날에도 그랬을 것이다. 옛날보다 기자들의 능력이 떨어졌다는 말도 사실일 수 있으나 내 생각에 과거 기자들이 과대평가받았다고 생각한다. 이유는 정보의 비대칭성 때문이다. 일반인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에 기자들은 뭔가 더 많이 아는 존재라 인식되었다. 반면, 요즘엔 일반인이라도 맘먹고 한 분야를 파기 쉽다. 정보를 얻기도 쉽고, 얻을 수 있는 정보도 많다. 그래서, 한 분야만 파는 사람과 여러 분야를 봐야 하는 사람의 깊이는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경제기자라도 경제정책을 만드는 공무원보다 정책적 지식이 부족하고, 회사 경영자 보다 회사 내부를 잘 알지 못하며, 특정 주식에 투자하는 투자자보다 개별 업종과 시황에 대해 알기 어렵다. 기자가 모든 분야에 전문가가 아니라는 점을 이제는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걸 감안하고 뉴스를 봐야 한다. 기자는 어쩌면 딱딱한 현실을 부드럽게(?) 전달하는 스토리텔러일지 모른다.
기자는 뉴스 전달의 전문가
기자들의 전문 영역은 정보의 깊이라기보다 뉴스를 전달하는 능력이다. 뉴스 전달 능력을 나눠보면 뉴스를 만드는 능력이 첫 번째다. 깊고 전문적인 정보일수록 일반 사람들이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기자는 이를 쉽게 가공해서 전달하도록 손을 봐야 한다. 알아듣게 기사를 쓰는 것이 가장 특별한 능력이다. 두 번째는 뉴스의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엔 수많은 일이 벌어진다. 그중에 어떤 것을 전해야 할지 순서를 정해서 전달해야 한다. 수많은 사건 중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 따지는 능력. 이것이 첫 번째 능력 못지않게 중요한 전문 능력이다. 세 번째는 방향성이다. 우리나라 언론들은 모두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말을 하고, 중립이란 가치에 과도하게 매몰되어 있다. 개인적으로 중립은 세상에서 가장 찾기도 어렵고 지키기도 어려운 입장이다. 그러니 중립이란 이야기를 강조할수록 쉽게 욕을 먹을 수밖에 없다.
어떤 식당이든 만점은 있을 수 없다. 사람들의 입맛이 제각각이듯 누군가에겐 딱 맞는 간이 누군가에겐 싱겁거나 짤 수도 있다. 누구는 재료 본연의 맛을 살렸다고 평가하지만, 누구는 맛을 끌어내지 못했다고 평가받을 수도 있다. 기자는 모든 비난에 노출되어 있는 외줄을 타는 위치에 있다. 그것이 숙명이다. 그래서, 기자를 욕하기는 쉽다. 알고 보면 기자들 역시 감정노동자이기도 하다.
좋은 기자가 늘어나게 하려면
기자를 욕하긴 쉽지만, 존경받는 기자를 갖기는 어렵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기사는 칭찬보다 누군가의 비난을 받기에 쉽기 때문이다. 게다가 요즘은 DB로 저장되어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울 방법도 없다. 과거의 기사를 무덤에서라도 다시 파내 증거를 제시한다. 문제 많은 기자를 쳐내는 것이 쉽고 가슴도 뻥 뚫리는 사이다 해법일지 모른다. 하지만, 계속 쳐내면 남는 것은 없다. 그러니, 올바른 기자를 많이 보고 싶다면 그나마 괜찮은 기자를 응원하는 것이 더 나은 방법이다. 모든 기자는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다. 아무리 올바른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특정 시점에는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다. 기자에게 완벽을 요구해선 안된다. 기자가 아니라 이 세상 누구도 완벽할 순 없다는 단순한 사실만 생각해도 답이 된다.
괜찮은 기자를 지키고 괜찮은 기자로 키우기 위해선, 적어도 지금은 비난보다 응원이 필요해 보인다. 비난은 쉽다. 남의 단점을 이야기하는 것이 장점을 이야기하는 것보다 몇 배는 쉽다. 그러니, 지금의 뉴스가 마음에 들지 않을수록 괜찮은 매체와 괜찮은 기자들을 응원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 요즘은 포털이나 각 언론사 사이트에서 검색도 잘 되니 기자를 찾아서 구독해 보자. 보통의 편집국에선 순환보직이라고 기자들을 뺑뺑이 돌리긴 하지만, 그래도 전문기자제도를 두고 있는 곳도 있고, 개인 성향으로 특정 분야를 깊게 파는 기자들도 있다. 괜찮은 기자들의 목록을 공유하는 것도 기자들에게 힘이 되고, 우리가 읽을만한 기사들이 계속해서 세상에 나올 수 있게 만드는 중요한 일이다.
몸에도 좋고 맛도 좋은 음식을 먹고 싶다면, 그런 셰프가 생존할 수 있도록 많이 사 먹어 주고 소문을 내야 한다. 마찬가지다. 좋은 매체와 좋은 기자의 글을 읽고 싶다면 많이 봐주고, 소문도 내줘야 한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팟캐스트가 있습니다. '그것은 알기 싫다'라는 채널이죠. 래퍼 출신 UMC가 만든 채널로 무엇보다 래퍼의 귀에 꽂히는 발음과 전문가가 매만진 음향이 좋아 애청하는 채널입니다. 이 채널은 명절만 되면 '기사 읽기 놀이'라는 특별방송을 편성합니다. 이른바 '기레기'들의 기사를 끌어와한 판 놀이마당을 펼칩니다. 듣고 있으면 재밌습니다. 제 소속회사가 등장한 경우도 있었죠. 그럼 어떤 기분이 들까요? 재미있으니 웃지만, 한 편으론 '저거 저거 어쩌다 저랬나?'라고 궁금해집니다. 나중에 사연을 들었냐고요? 비밀입니다.
추석 명절에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저를 보고 있으니 '내가 왜 이렇게 살지?'라는 깊은 궁금증에 빠졌습니다. 제가 잘하는 말로 "이거 한다고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너무 재밌어서 누가 말려도 하고 싶은"일은 아닌 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워낙 감성적이고 공감을 이끌어내는 글쓰기를 못하는지라 사람들의 공감도 나날이 하락하고 있죠. 그래도 다행입니다. 다음 주면 끝! 그래서, 다음 주엔 정보성 내용 없이 의식의 흐름대로 글 쓰기를 해볼까 생각 중입니다. 왜냐면, 재미있으니까요. 저도 딱딱한 글만 쓰기 싫다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