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de to my family
어릴 적, 우리 집엔 거대한 크리스마스트리가 있었다. 그 트리는, 천장에 닿을 것만 같은 커다란 키와 더불어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는 특징이 있었다. 그건 바로, 모든 오너먼트들이 핑크색이었다는 사실이다. 핑크색 커다란 꽃들, 핑크색 오너먼트 볼들, 핑크색 새틴 리본, 핑크색 하트 구슬 오너먼트들. 이 거대하고 핑키핑키한 트리는 스위치를 켜면 천천히 시계방향으로 뱅글뱅글 돌아가기까지 했다. 그와 동시에 캐럴이 흘러나왔다. 이런 특이한 트리가 우리 집에 오게 된 이유는, 순전히 우리 언니 때문이었다.
주재원으로 미국으로 발령 난 아빠를 따라 우리 가족은 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까지 4년 정도 미국에서 살았었다. 타지에서 처음 맞이하던 겨울의 어느 날, 우리는 다 같이 크리스마스트리를 구입하러 거대한 크리스마스트리 상점에 갔다. 커다란 창고형 매장 안에는 갖가지 모양과 콘셉트의 트리들로 가득했다. 내 눈은 곧바로, 장난감 병정과 작은 선물 오너먼트들, 지팡이 모양 사탕, 반짝이는 천사 오너먼트가 달려있는, 그야말로 전통적이고 크리스마스다운 트리로 향했다.
"아빠! 난 이거.. 이 트리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하지만, 그와 동시에 언니가 다른 트리를 고집하기 시작했다.
"아냐!! 난 이거_!! 이거 가지고 싶어!!"
뜨악. 그 트리는 내가 상상하던 크리스마스트리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모든 오너먼트가 핑크색이었던 데다가, 그 장식물들의 정체 자체도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꽃과 리본과 하트와 핑크색은 대체 크리스마스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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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에서 어린 시절의 우리 언니를 설명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언니의 어린 시절을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핑크 욕망캐(릭터)- 이다. 내 눈에 보이는 모든 핑크는 바로 나의 것이다_! 이런 모토로 참 고집스럽고 열정적으로 어린 시절을 불태웠다.
하루는, 교회 주니어부 예배 활동을 하면서 선생님이 색종이 접기를 하기 위해 색종이를 랜덤으로 나눠주셨다. 다들 선생님이 나눠주시는 색종이를 불만 없이 받았다. 그런데! 우리 언니가 울고 불고 난리를 치기 시작한 것이다. 자기가 받은 색종이가 핑크색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핑크색을 달라고 징징대는 언니를 보며 동생인 나는 그 누구보다 당혹스러웠다. 창피함에 고개를 숙이고 내 손을 내려다보는데, 어라? 내가 쥐고 있는 색종이가 핑크색이네?
"언니~~ 언니 여기.. 여기 핑크색 있어. 이거 언니 해."라고 언니 손에 나의 핑크색 색종이를 쥐어주고 나서야 언니는 만족했다. 그때 나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아이.. 우리 언니는 대체 왜 저러는 거야?'.
그러한 크고 작은 에피소드들로, 나는 언니가 원하는 것은 웬만하면 다 언니에게 양보하는 동생이 되었고, 무엇보다 핑크색을 싫어하는 아이가 되었다. 핑크색을 정말 최고로 싫어하고 싶어서, 그 반대점에 있는 파란색을 좋아할 정도였다. 그걸 증명하기 위해 난 파란색이 가장 좋다- 고집스럽게 말하고 다녔다. 정말로 파란색을 좋아했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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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언니가 핑크색 오너먼트로 가득한 그 트리를 가리키며 "이거!!!"라고 선언했으니, 아 이제 망했다-구나 싶었다. 뭐 별로 옥신각신 하지도 않았다. 나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언니에게서 핑크색에 대한 고집을 꺾는 기적을 바랄 수 없다는 것을. 그렇게 나는 내가 꿈꾸던 트리를 언니의 분홍색 트리에게 빼앗겼다.
그러나, 내가 가지고 싶었던 트리도 정말 예뻤는데, 하는 아쉬움 외에는 크게 억울하지도 않았고, 원망의 마음도 들지 않았다. 또 핑크색이라니-! 하는 지겨운 마음은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을 언니의 핑크에 대한 애정과 집착이 압도하고도 남았다. 나는 언니만큼 절실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든 절실한 마음을 이길 수는 없다. 그 사실이, 어린 마음에도 너무 크게 와 닿아서 한편으로는 그러한 언니가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저토록 자기가 좋아하는 한 가지에 몰두할 수 있다니. 저토록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다니. 저토록 핑크색이 좋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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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은, 다른 사람들의 집에 놓인, 빨갛고 하얗고 초록색인, 딱 크리스마스 다운 트리들이 부러웠다. 하지만 그 부러움은 곧 묘한 '자부심'으로 대체되었다. 어딜 가도 우리 집에 있는 트리처럼 온통 핑키핑키한 트리는 없었던 것이다. 크리스마스트리가 거실에 등장하는 시즌이 되면, 우리 집에 방문하는 사람마다 감탄을 했다. 이런 트리는 처음 봐요_! 오너먼트가 다 핑크색이라니.. 라며. 핑크색은 싫은데, 우리 집 트리가 핑크색이라 특별한 상황은 좋았던 것이다.
한국으로 돌아오고 나서는 그 특별함이 더 빛을 발했다. 분명, 이런 트리를 가진 집은 한국에서 우리 집밖에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 (그리고 아마도 정말 사실이었을 것이다) 어린 나에게는 크나큰 자랑거리였다. 크리스마스 때마다 아이들이 놀러 오고 트리를 보고 감탄을 했다. 스위치를 켜서 트리가 빛을 반짝이며 뱅그르르 돌아가고 캐럴이 흘러나오기까지 하면 친구들의 감탄은 극에 달했다. 그 무엇도 부러울 것이 없는 호사스러운 기분이 내게는 크리스마스 선물 그 자체였다.
트리가 주는 '크리스마스 무드'라는 선물은 트리 설치 전 준비단계부터 발휘되었다. 상자에서 트리를 꺼내고 오너먼트들을 하나씩 꺼내기 시작하면 마법처럼 크리스마스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오너먼트를 트리에 장식하기 전, 엄마는 늘 모든 오너먼트들을 깨끗하게 손질하셨는데, 특히 새틴 리본을 다리는 과정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 분홍색 새틴 리본을 빳빳하게 다리면, 그 리본은 반짝반짝 새 생명을 얻은 듯 은은한 광이 살아났다. 나는 그 옆에서 꽃을 모아둔 상자를 열어서 꽃잎들을 하나하나 매만지기도 하고, 유리로 된 오너먼트 볼들을 꺼내어서 먼지를 닦아내기도 하며 도움을 보탰다.
찌그러진 하트 모양 오너먼트들은 예쁘게 모양을 잡아주고, 전구들에 불이 다 들어오는지 아닌지도 확인했다. 오너먼트들을 손질하면서, 겨울과 연말과 크리스마스를 맞이할 마음의 자세도 매만졌다. 아 올 한 해도 좋았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사실, 말이 안 통하는 미국에서 크고 작은 인종차별과 여러 가지 어려움도 있었을 테고, 적응해서 잘 지낼 즈음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으니, 다시 언어를 배워야 하는 어려움도 많았을 터인데, 광이 나는 빳빳한 새틴 리본과 온통 핑크색의 트리를 장식하다 보면 그 모든 어려움이 핑크색이 되었다. 가벼운 것, 견딜만한 것, 달콤한 것, 예쁘장한 것으로.
우리의 거대한 핑크 트리는 그 뒤로도 15년 정도를 우리와 함께 했다. 물론 트리의 말년 즈음에는 나무도 여기저기 빈 곳이 생기고, 리본은 광을 잃었으며, 유리볼 오너먼트는 하나둘씩 깨져서 몇 개 없었으며, 마지막엔 노래마저, 늘어진 테이프처럼, 리듬이 제멋대로 구슬퍼지곤 했다. 트리를 보관하던 (이것도 미국에서 가져온 그대로의 ) 거대한 골판지 상자 또한 여기저기 곰팡이가 생겨서 눅눅한 냄새를 풍기기 시작했고, 일 년에 한 달 정도 보기 위해 그 상자를 이고 지고 이사를 하는 것에 부모님은 질려버리셨던 것이다. 그렇게 어느 날 우리의 거대한 핑크 크리스마스트리는 우리의 삶에서 사라졌다.
돌이켜보면, 그 트리는 우리 가족의 젊고 가장 찬란했던 리즈 시절의 상징 그 자체였다. 우리 모두는 꿈에 가득 차 있었고 젊고 어렸고 상처 같은 것도 없었다. 그러나 트리와 함께 그 시절의 반짝임이 퇴색되어 갔다. 그렇다고 그 뒤로 우리는 불행하게 살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많은 우여곡절을 겪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고 이겨내고 지금도 충분히 잘 살고 있지만, 나에게는 이제 내가 책임져야 하는 가족이 있고, 언니에게는 언니 가족이 있다. 오로지 엄마 아빠 나 언니- 이렇게 넷만 존재하는 것 같았던, 우리가 세상의 중심인 줄 알았던 날들은 이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 사실이 가끔 서글프고 슬픈 것이다. 그러나 그날들, 핑크색 오너먼트들이 반짝이는 것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날들을 떠올리면 그 서글픈 마음에 핑크색 불이 켜진다. 그날들이 그립고 아쉽다는 마음보다는, 반짝이던 그 핑크색 트리처럼, 우리 가족의 유년시절이 정말로 아름다웠다는 사실에 집중하려고 한다. 그러다 보면 문득, 그날들이 내게 주어졌음을 감사하는 마음에 다다르게 된다. 그리워할 수 있는 날들이 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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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면 온 집안의 불을 다 끄고 트리만 밝혔다. 트리 아래 받침대에 위치한 스위치를 딸깍 누르면 트리는 캐럴을 부르며 천천히 시계방향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 스위치를 켜기 위해서는 거의 엎드려서 트리 아래로 기어 들어가야 했기 때문에 그 일은 자연스럽게 어린이의 것이 되었다.
납작하게 엎드려서 트리 아래로 상반신을 밀어 넣고 스위치를 딸깍 켜면 트리가 순간 삐걱-소리를 내며 돌아가기 시작했고, 나는 얼굴이 트리 아래에 위치한 그대로 그 자리에 누워버렸다. 트리 안은 어둡고 아늑했다. 텅 빈 안쪽 구조물의 틈 사이사이로 전구의 불빛이 새어 들어왔다. 음질이 빈티지한 캐럴이 트리의 받침대-누운 내 머리의 바로 옆에서 흘러나왔다.
걱정이라고는, 내일 학교 숙제 정도였을까. 올 크리스마스에는 산타가 어떤 선물을 주실까-기대하며 엄마가 해주는 밥을 먹으며, 언니와 이야기를 하다가 한 이불을 덮고 잠이 들고, 아빠의 쩌렁쩌렁함이 무서우면서도 든든했었다. 늦은 밤까지 트리 아래에 하염없이 누워있어도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사라지면 서운할 그날들의 기억이 그 핑크 트리 덕분에 몇십 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살아있다. 그러므로, 이 글은, 그런 트리를 우리 집에 오게 만든 장본인인 우리 '언니'에게 바치는 뒤늦은 감사편지 인지도 모르겠다.
우리 가족의 리즈 시절을 핑크색으로 입혀주어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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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우리 모두는 힘들고 우울하고 지치는 시기를 보내고 있지만, 언젠가는 이 시기를 '그때는 그런 일도 있었지-' 정도의 무겁지 않은 마음으로 회상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고 믿어본다. 힘든 것에 압도되기보다는, 코로나 덕분에 깨달은 것들에 집중하면서. 모두가 힘든 시기이니, 서로에게 할 수 있는 한 친절하려고 노력하면서. 이 시기가 어두운 색체로 입혀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고, 최선을 다해 핑크를 선택하면서. 최선을 다해 잘 살아내기를 선택하면서 말이다.
그러기가 너무 힘이 드는 날이면, 우리의 아름답고 걱정없고 어렸던 날들을 꺼내어 보는 것이다. 그 날들이 주는 위로와 그리움을 영양제처럼 탈탈 마음에 털어놓고 꿀꺽 삼키면 다시 잘 살아낼 힘이 날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핑크 트리 아래에 누워서 바라보던 희미한 불빛과 노래'의 영양제가 누군가에도 힘이 되어주기를 바라면서 이곳에 양껏 남겨두고 갑니다- 실컷 가져가세요 :-)
p.s
그렇게 욕심 많고 유별났던 우리 언니는 , 무던하고 고집 없는 어른이 되었고,
언니에게 맨날 져주고 양보하던-착했던 나는, 예민하고 고집스러운 어른이 되었으니 ,
한 사람이 평생 부릴 수 있는 욕심과 고집에도 총량이 정해져 있는 것이 분명하다. 누군가는 지랄 총량의 법칙이라고도 했던- 그 총량을 우리 언니는 어릴 때 다 소진해버린 것이고 나는 뒤늦게서야 소비하기 시작해서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는 것이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