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방향타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균형감각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밸런스'라고 하는 단어는 균형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균형을 이룬다는 말에는 비교대상을 두고 측정 내지는 비교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들 고려 대상은 객관적 지표로 측정이 가능한 정량적인 것이 될 수도 있고, 양으로 측정할 수 없는 개개인의 주관이 개입된 정성적인 것이 될 수도 있다.
직장생활 중에 겪는 수많은 스트레스와 온갖 종류의 감정노동을 경험해 본 분들이라면, 중심 잡고 생활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아실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 살다 보면 뜻대로 되는 경우보다,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음을 보게 된다. 이런 순간에 ‘감정조절’이 필요하고, ‘중심잡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결코 쉽지 않다.
힘들지만, 그래도 이겨내려면 뭔가를 비교하고 ‘그러한 경우보다는 내가 낫지’라는 일종의 자위도 감정조절에 큰 도움을 준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자위하는 그러한 감정은 항상 늦게 온다. 그래서 ‘깨달음은 항상 늦다.’라고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렇듯, 힘든 심리상태를 극복하기 위한 우리들의 노력은 우리보다 못한 처지를 두고 비교하고 싶은 유혹?을 불러일으킨다. 어찌 보면, 현재 상황이 너무 힘들기에 나보다 못한 사람들을 두고서 위안을 삼고자 하는 일종의 보호본능이 작용한 결과일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는 논리 구조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당신이 생각하는 대로 당신이 상대방보다 더 처지가 나은데, 굳이 이를 비교하고 사실 확인을 통해서 당신이 위안을 받는다? 상대방이 눈치채지 못한 경우라면, 별 문제의 소지가 없겠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것은 무언의 폭력이자, 가해라고 불릴 소지가 있다. 아니, 사실이 그러하다.
비교 대상이 적절한지에 대한 논의는 차치하고서라도, 비교를 해야만 하는 상황에 직면했을 때 당사자의 감정이 어떠할지 생각해 보면, 이는 상황마다 꽤 다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큰 생각 없이 약간의 돈을 투자했던 주식이 짧은 시간 안에 큰 수익이 났을 때, 그 쾌감. 주위의 권유로 큰 기대 안 하고 사두었던 아파트 분양권에 억대 프리미엄(흔히들 이야기하는 “분양권 피’)이 붙었을 때. 제삼자 어느 누가 보더라도 감탄사를 연발하며, 부러워할 수 있는 그런 순간이 분명히 있다. 만약, 현재에 없다면, 과거에 있었을 것이다.
뭔가 고무적인 일이 있어서 이를 객관적으로 논리적으로 자기 확신을 확인하는 용도라면, 이런 경우는 무척이나 기분 좋은 상황임에 틀림없다.
이제 반대 상황으로 되돌아가 보자. 별로 기분 좋지 않고, 우울한 상황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더 나쁜 상황을 막기 위한 예비적인 차원에서 그리고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한 손실을 줄이기 위해 하는 것이라면, 이는 그다지 유쾌한 상황이 아니다. 비장한 각오이자 침울한 상태이다.
부모님의 건강이 어느 날 갑작스레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나날이 늘어가는 병실비와 치료비에 가족들의 근심이 커져간다. 경제적, 시간적 부담이 늘어나면서 생겨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부모님의 건강을 먼저 생각하고, 어떻게든 건강이 회복될 수 있는 방법으로 수단 가능한 방법을 강구한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뒤를 돌아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을 때, 사람들은 곧잘 과거의 특정 시점을 언급하며 회상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그 돈으로 예전에 강남의 아파트를 사서 묻어 놓았더라면…”, “예전에 그 주식 얼마 안 했었는데, 눈 딱 감고 5년 정도만 묻어 두었더라면…”, “학창 시절 그렇게 볼품없이 보이던 그 동창을 내가 눈여겨보고 결혼했더라면…” 다들 제 나름의 각각의 경우를 가정해서 현재와 비교한다. 현재가 잘 되었다는 결론 하에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사실과 과거는 현재와 비교할 수 있는 그 어떤 연결고리를 과거 그 당시에 알아차릴 수 있는 사람들은 극소수였다는 것을… 이를 꿰뚫어 보고 예측할 수 있는 능력을 ‘안목’이라고 한다. 미학적으로 보자면, ‘눈썰미’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다.
비교 대상의 시의 적절성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비교 시점의 통일… 만약 그것이 안 된다면, 과거와 현재의 그 대상을 바라보고 평가하는 정도가 비슷한 수준이어야 한다.
만약, 위에서 언급한 비교대상의 적절성과 시의적절성이 잘 지켜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고난이 오는 순간순간마다 ‘자기 합리화’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이는 곧 자기모순이요, 자가당착의 오류와 다를 바가 없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