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직장동료 현재욱 님의 <보이지 않는 경제학>을 읽었다. 재작년에 사두기만 한 것을 엊그제 책장에서 우연히 발견하곤 이제야 마지막 페이지를 넘긴 것이다. 많은 대목에서 깊이 공감했고, 특별히 몇몇 대목에서는 뜨거운 갈채를 보내고 싶었다. 경제학을 전공하지도 않았고 실물경제와 깊이 관련된 일을 해본 적도 없었을 그가 언제 경제학에 이리도 깊고 촘촘한 내공을 쌓았는지 놀랍다.
이 책은 경제학 전반에 대한 저자의 철학을 담았지만 각별히 금융 분야를 집중해서 다룬다. 보이지 않는 금융 세력과 시스템이 우리의 부를 얼마나 축소하고 왜곡하는지, 그래서 결국 우리의 삶을 얼마나 피폐하게 만드는지 치밀하게 해부한다. 특히 화폐의 탄생, 금본위제, 달러의 기축통화화, 달러와 금의 관계, 석유시장의 비밀, 주식시장의 문제점 등을 밝히는 데 대부분의 페이지를 할애한다. 짐작컨대 중국계 경제학자 쑹홍빈의 <화폐전쟁> 시리즈가 이 책의 구성과 내용에 많이 기여한 듯하다.
이 책에서 가장 돋보이는 미덕은 하나의 용어나 개념을 괄호 안에만 넣어두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역사적 기원과 이력을 살피거나, 실생활에서 일어날 법한 구체적인 사례를 들거나, 가상의 상황을 만들거나, 간단한 일화로 사고실험을 하는 등 맛도 있고 소화도 잘 되도록 요리해서 식탁 위에 예쁘게 올려놓는다. 예를 하나만 든다면,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전인 1944년 맺어진 브레턴우즈 협정의 내용을 이렇게 설명한다.
(...)호스트인 미국을 빼고 그 자리에 초대된(사실은 소집된) 사람은 43개국 726명이다. 미국은 그들에게 제안한다. “너희들 돈(금) 없지? 경제가 돌아가려면 돈이 필요하지? 그러니까 일단 종이로 돈을 찍어. 그 돈을 내가 보증해줄게. 나는 금이 많고 달러야말로 진짜 돈이니까. 그 대신 너희들의 종이돈은 내가 값을 매길 거야. 알았지?”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전쟁으로 만신창이가 된 유럽 국가들이 파괴된 시설을 복구하고 경제를 재건하려면 미국의 풍부한 물자가 필요했다.(...)
<보이지 않는 경제학>, 114-115쪽
종전 후 기축통화로 굳건히 자리잡게 되는 달러의 화려한 등장을 이보다 더 쉽고 재미있게 이야기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자본주의 금융제도의 문제점을 파헤치는 게 이 책의 목적이지만, 이 책 전체에 깔려있는 기본 정신은 뜻밖에도 ‘부의 원천은 노동’이라는 명제다. 이는 아담 스미스에서 칼 맑스로 계보가 이어지는 ‘노동가치설’에 근거한 입론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은 18,9세기 고전경제학이라는 낡은 메스로 21세기 최첨단 금융시스템을 해부하고 있는 셈이다. ‘누가 내 노동을 훔치는가’라는 부제에 그 뜻이 잘 담겨있다.
하지만 노동가치론을 내세워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일은 결코 녹록치 않다. 이진경에 따르면, 노동이 가치를 만드는 것도 아니며 칼 맑스는 노동가치론자가 아니라 반대로 노동가치론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자였다고 한다. 이진경은 ‘노동은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사용가치’라는 맑스의 테제에 근거해, “노동가치론은 자본의 증식을 설명하지 못하며, 따라서 그것으로는 자본 내지 자본주의의 본질을 규명하지 못한다.”고 단정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그 자체로 가치를 갖지 않는 노동, 혹은 가치와는 전혀 다르게 질적 차원을 구성하는 노동에서 양적인 것인 가치가 도출될 수는 없다. 사용가치인 노동에서 가치를 추론하는 것은, 그리하여 노동이 가치의 기원이라고 말하는 것은 질적인 것과 양적인 것을 혼동한다는 점에서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혼동을 은폐하는’ 중상주의적 오류와 동형적이다.”
-이진경, <맑스주의와 근대성>, 76-77쪽
물론 <보이지 않는 경제학>에서 말하는 부(富)와 노동가치론에서 말하는 가치가 정확히 같은 개념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학계에서 아직 논쟁의 포연이 매캐하게 남아있는 이 어려운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이쯤해서 나에게도 가치이론을 파보고 싶은 욕구가 스물스물 기어오른다. 가치이론은 장 보드리야르를 통해, 내가 한때 공부한 기호학과도 연결되는 주제다.
“국가의 부가 국민의 행복으로 이어지려면 성장 지향의 경제에서 나눔의 경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이 책은 “오감으로 느끼는 깊은 만족감,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고 맛볼 수 있는 실물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해주는 부의 원천이다. 부자 될 생각만 하지 말고, 진정한 부를 즐기기 바란다.”는 문장으로 끝난다. 노동가치론의 진실이 무엇이든 <보이지 않는 경제학>의 저자가 꿈꾸는 것은, 실재가 가상을 물리치고 인간의 온기가 돈의 냉기를 이기는 따뜻한 세상임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