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쥴리로 의심받는 김건희 씨가 "바빠서 쥴리 할 시간이 없었다."라고 해명하는 인터뷰를했다. 나는 그 발언을 듣는 순간,삼십여 년 전 영구(곧 심형래)가 한 "영구 없다."라는 말과 함께사십여 년 전복남이라는 동네친구가 한"우리가 안 그랬다."라는말을 떠올렸다.쥴리나 영구(심형래)는 알겠는데,난데없이 복남이는 누구며생뚱맞게 "우리가 안 그랬다"는 말은 또 뭔가? 그런 듣보잡을 어찌 감히 '미래의영부인'일 수도 있는 인물이나 '역대 최고의 바보 캐릭터'와 동일한 반열에 올려놓는가? 이렇게 의아해 할 수 있다. 자, 이제부터 그이야기를 들려주려 한다.그러려면 먼저 어린 시절 '초인종 놀이'와 관련된 에피소드부터꺼내야 할 것 같다.
2.
나는 어린 시절 지방 소도시에서 살았다. 그때 동네 친구들과 함께 딱지치기, 구슬치기, 땅따먹기, 비석치기 등 기존의 뻔한 놀이에 싫증을 느낄 때 별식으로 즐기던 놀이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초인종 놀이'였다. 어느 집 대문에 달린 초인종을 누르고 도망간 다음 대문을 열어주려고 나온 그 집 어른이 당황해 하는 모습을 멀찍이 몰래 숨어서 지켜보며 묘한 쾌감을 느끼는 놀이였다. 당시엔스피커폰이나 비디오폰 같은 같은 게 없었으니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초인종만 울리면 대개 어른이 대문을 따러 직접 나온다는 점이이 놀이의 성립 조건이었다.
당시 대문에 초인종을달았을 정도면 왠만큼 사는 집이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리 넉넉하지 못했던 동네 친구들이부잣집에 대해 가지고 있던 막연한 시샘을 그런 놀이로 표현했던것 같다. 또는 갖은 통제와 억압으로 늘 우리를 구속하던 어른들에 대한 저항의 의미도 있었지 싶다.
'초인종 놀이'는엄한 사람을 놀래키고 그 반응을 지켜본다는 점에서 몰래카메라의 원조라 할 수 있다.물론이경규의 몰래카메라는화해의 해피엔딩으로 끝난다는 점에서우리의 '초인종 놀이'와마무리가다르긴하다.어른을 골탕 먹인다는 점에서는 영화 '나홀로 집에'의 꼬맹이 맥컬리 컬킨이 한 행위와도 닮았다. 물론 못된 어른에 대한 영리한 꼬맹이의정당한 응징을 우리의 짖굳은 장난과 같은 차원에 놓고 볼 수는 없겠지만말이다.
몰래카메라도그렇지만, 이 놀이의 포인트는 놀이의 주체가 몰래 숨어서덫에 걸려든 대상의 당황스러워 하는 표정과 행동을 즐겁게 지켜보는 데 있다. 만약 숨지 않고 대문 앞에 그대로 서 있거나, 숨어서 지켜보더라도 정체가 탄로나는 순간, 그 놀이는 실패로 끝난다. 그러면 놀이의 주체는 욕을 바가지로 먹을 뿐더러 성깔 있는대상을 만날 경우엔예상치 못한 곤욕을 치룰수도 있다.
'초인종 놀이'는 자기 동네에서만 하는 기존의 놀이와는 달리, 반드시 다른 동네로 진출해서 해야 하는 '탈 동네적 놀이'였다. 익명성이 보장되지 않는 자기 동네에서 그 짓을 벌였다간 성공 여부와 관계 없이 매를 벌기가 십상일 테니까. 또한 보상이 뻔한 기존의 놀이와는 달리, 리스크가 큰 대신 성공하기만 하면 심리적 보상도 그만큼 컸다. 즉 스케일과 보상 면에서 기존의 놀이들을 압도했다. 이 때문에 이 특별 놀이를 수행하는 우리의 자세는 사뭇 진지하고 비장했다.
3.
나와 내 또래 서너 명이 한 조가 되어 '초인종 놀이'의 순례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던 어느 날이었다.초인종소리에뛰쳐나온 어른의 황당해 하는 반응을 대여섯 번이나 지켜본 다음이었다. 각자의무용담을 서로나누며완전범죄를 수행했다는 뿌듯함에한껏 오만해진 상태로 다음 공격 장소를 물색하고 있던 중, 우리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복남이라는 친구가 새로운 제안을 했다. 숨어서 지켜보지만 말고 당황해 하는 어른이 서있는 대문 앞을 모른 척하고 지나가 보자는 제안이었다. 나는 그러다가는 자칫 우리가 범인임을 들킬 수도 있는데 왜 그런 위험을 감수하느냐고 반박했으나, 복남이는 재밌지 않겠느냐며 나이의 위세로 밀어붙였고 결국 다들 마지못해 동의했다. 나는 그렇다면 대문 앞을 지나가면서 대문 밖으로 나온 어른과 절대로 눈을 마주치지 말고 빠르게 지나가야 함을 강조했고 모두들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마침내 우리는 표적물을 정하고작전을 개시했다.우리 중 키가 가장 큰 친구가깨금발을 하며초인종을 눌렀다.잠시 후 대문을 열고 나오는 한 아주머니의모습을 확인한 다음 우리는 각자 앞서거니 뒤서거니하며 그 앞을 지나갔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며서있는 그 아주머니의 오묘한 표정을 아주 가까이서 훔쳐보는 일은 멀리서 들킬까봐 몰래 지켜보는 일보다 훨씬 짜릿했다. 그러니 거기까지만이었다면 우리의 그 작전은노르망디 상륙작전이나 인천상륙작전 못지 않게 우리들 사이에서 두고두고 전설처럼 회자되었을 것이다.
그때 돌발상황이 벌어졌다. 복남이가좀 전의약속을 깨고 그 아주머니를 빤히 쳐다보며 눈치를 살피는것 아닌가. 그 아주머니는 우리가 그냥 지나가기만 했더라도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을 텐데,뭔가 캥기는 듯한 눈과 마주치기까지 했으니 한껏 쌍심지를 켜고 우리에게 강력한 의혹의 레이저를 쏘아댔다. 하지만 우리가 초인종을 눌렀다는 아무런 증거가 없었으니 거기까지도 괜찮았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우리가 안 그랬어요." 아뿔싸, 복남이 입에서 그 문제의 발언이 터져나왔다. 그는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우리가 범인이라는 빼박 증거를 넙죽 갖다바친 셈이었다. "영구 없다."와 다를 바 없는, 영구 같은 바보나 할 수 있는 뻘짓이었다. 복남이에겐 이름처럼 복은 좀 있는지 몰라도 지혜는 1도 없는 듯했다.
그 다음부터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일이 벌어졌다. 그 아주머니는 우리에게 별별 욕을 쏟아부었고, 심지어 며칠 전 도둑맞은 일까지 우리에게 덤터기를 씌우면서 파출소로끌고가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우리는 작전실패로 인한 참담함과 부랑아쯤으로 취급당하는 굴욕감에 범죄자로 몰린 억울함까지 떠안은 상태에서 그곳을부리나케 도망쳐왔다.무참하고 처절한 패퇴였다. 나는 그후 복남이의 우둔함에 대한 실망과 엉뚱한 제안을 끝까지 거부하지 못한 자책으로 그 친구들과 오랫동안 어울리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그때의 충격이 워낙 커서였겠지만, 그 이후로 그 실패한 놀이를 한 기억은 없다.
4.
이제 다시 "쥴리 할 시간이 없었다"라는 김건희 씨의 말로 돌아가보자. 쥴리로 의심받는 김건희 씨의 그 말은 영구(심형래)의 "영구 없다"나 복남이의 "우리가 안 그랬다"라는 말과 동일한 의미구조를 갖는 자승자박의표현이라는게 나의 판단이다.자신이 진정 쥴리가 아니라면 생소하거나어색함을 넘어불쾌하게 여겨야 할 금시초문의 그 이름을 익숙한 듯이자연스럽게 콕 짚어가며 거명까지 한다는 건, 자신이 쥴리가 아니라는 강변에도 불구하고 결국 자신이 곧 쥴리라는 고백일 가능성이 높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자승자박의 표현이라는얘기다.내 귀에는 "쥴리 할 시간이 없다"는 "내가 쥴리다"와똑같은 뜻으로 들린다.
나머지 두 말의 표현이 자승자박인 이유는 이미 많은 사람이 느끼고있는 바와 같다.영구의 "영구 없다"라는 말은 화자 자신이 상대방 눈앞에 굳이 나타나 없다고 말한다는 점에서 자승자박의 표현이고, 복남이의 "우리가 안 그랬다"라는 말은 그런 일이 벌어진 사실을 안다는 것 자체가 그 일을 했다는 빼박 증거라는 점에서 자승자박의 표현이다.
이처럼 그 세 가지 표현은각각 다른 내용을 담고 있지만, 한 겹 더 들어가보면동일한 하나의 의미구조로 수렴된다. 즉, 그 말을 하는 것 자체가 거짓말이 되는, 다시 말해 존재나 행위를 부정하는 것 자체가 이를 시인하는 결과를 낳는, 그래서 결국 자기모순과 자가당착으로 귀결되는, 그래서 결국 자승자박의효과를 낳는 표현이라는 것이다. 내가 김건희 씨의 말을 들으며 영구의 말과 복남이의 말을 동일 선상에 놓고 떠올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렇게 해서 미래의 영부인 후보는 당대 최고의 바보 캐릭터 그리고 복남이라는 듣보잡과 똑같은 수준의 인물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 벌어졌다. 오 마이 갓!
5.
복남이는 영구(이 경우엔 심형래가 아님!)와 함께 오래 전부터 내 마음 속에서 이 세상 가장 우둔한 자 명단에 올라 있다. 김건희 씨가 쥴리일 가능성이 있는상황에서 이제 그 명단에 김건희(이 경우엔 쥴리가 아님!)라는 이름을 추가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똑같이 우둔한 자의 말이라도 그것이 가져온 결과는 각각다르다는 점이다. "영구 없다"라는 말은 전국민의 폭소를 자아냈고 "우리가 안 그랬다"라는 말은 '우리'에게 모멸감을 안겨주었다. 그렇다면 "쥴리 할 시간이 없었다"라는 말은 누구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다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