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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칠한 서생 Oct 26. 2021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2021

4.19세대와 5.18세대의 거리

1.

얼마 전 같은 대학 같은 학과 동기 다섯이 오랜만에 뭉쳤다. 원래 분기마다 한 번씩 하는 모임이지만 강화된 거리두기 탓에 근 일 년 만에 얼굴을 마주했다. 가볍게 등산을 하고 저녁 식사와 함께 술잔을 나눴다. 탄력을 잃은 불콰한 얼굴과 아재 개그라고 놀림 받는 실없는 농담을 뒤로 하고 귀가하는 지하철 안에서 아련한 기억을 비집고 문득  편의 시가 떠올랐다. 김광규 시인이 1982년 발표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였다. 4.19세대의 회한을 그린 그 시는 이렇게 시작된다.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중에서)


시 속에 등장하는 그들이 대학을 다닌지 20년 후 5.18이 나던 해 대학생이 된 우리는, 늘 매캐한 최루탄 냄새와 짭새들의 번득이는 시선을 느끼며 캠퍼스를 오르내렸다. 그중에는 열혈 운동권 친구도 있었으나, 나머지 친구들도 그만큼은 아니었지만  대체로 역사의 질곡과 공동체의 아픔에 공감하고 공동선을 위한 삶을 고민했다. 영어공부나 고시 공부를 하는 친구들을, 개인의 영달만을 추구하는 일차원적 인간으로 은근히 경멸하면서, 전공 공부는 제쳐두고 동아리나 학회 등에서 저마다 한국 근현대사나 서양 경제사나 변증법 등을 밑줄쳐 가며 공부했다. 강의실을 떠나 잔디밭이나 술집에서 역사니 민중이니 계급이니 하는 거대담론을 놓고 열띤 토론을 벌인 적도 많았다.


그러다가 어느덧 졸업반이 되었고 빵살이를 하게 된 그 운동권 친구 말고는 각자 요령껏 취직을 했으며 말단사원으로 대망의 1990년대를 맞았다. 공산권 붕괴와 이념의 몰락 그리고 본격적인 소비사회로의 진입을 지켜보면서 언제부터인가 스무살 즈음의 '옛사랑'을 기억의 상자 깊숙이 묻어둔 채, 각자 결혼해서 적금을 붓고 자식을 낳아 기르며 나름 사람값을 하고자  열심히 무엇인가를 해왔다.      



2.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중에서)


그로부터 40년, 그들처럼 우리도 인생의 하산 길에서 다시 만나기 시작했다. 정년 없는 전문직이라 아직 무엇인가로 남아 있는 친구도 있지만, 대개는 사기업이나 공기업이나 연구기관에서 한때 무엇인가가 된 다음 지금은 어쩌면 그 무엇도 아닌 존재가 되어 다시 모인 것이다. 다들 무엇 하나 제대로 이룬 것 없이 세월만 흘렀다는 자괴감을 조금씩 안고 있었으며, 앞으로도 무엇이든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박도 적잖이 받고 있었다. 


그날 우리가 막걸리와 함께 식탁 위에 펼쳐놓은 것은 자식들 혼사 문제며 연금 수령액이며 집값 문제 따위의 기본 안주에다가, 대한민국 성인 남자에게  빼놓을 수 없는 메인 안주인 정치 얘기였다. 사실 나는 만나기 전 정치 얘기는 하지 말자고 제안하는 글을 단톡방에 올렸었다. 이전 만남에서 정치 얘기 나올 때마다 뒷마무리가 좋지 않았던 기억 때문이다. 하지만 정치 얘기 말고는 딱히 긴 시간을 진지하게 대화할, 아니 격렬하게 논쟁할 묵직한 소재가 없어서인지 대화의 물줄기는 자연스럽게 여의도 쪽으로 흘러갔다.    


나는 정치 얘기를 하려면 몇 가지 가이드라인을 지키자는 또 다른 제안을 했다. 첫째, 자신이 지지하지 않는 정치인이나 정당을 가급적 비판하지 말 것. 둘째, 혹 비판하더라도 이 자리에는 그 정치인이나 정당을 지지하는 친구도 있음을 감안해서 과도한 비난은 삼갈 것. 셋째, 설사 비난하더라도 그 정당이나 정치인을 비난해야지 그 지지자를 비난하지는 말 것. 넷째, 자신이 접한 정보와 정보원에는 응당 오류와 편향이 있음을 인정하고 이들을 절대적으로 옹호하는 태도를 버릴 것.      


그날 대화는 그 가이드라인을 수시로 침범했지만, 그래도 그 때문인지 여느 때와는 달리 그리 과열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목청을 높이지 않았다 뿐이지 실은 그날도 우리의 의견은 팽팽하게 갈렸다. 어떤 친구는 진보세력을 강경하게 비난하며  보수 기득권 세력을 비호했고, 또 어떤 친구는 특권과 지대의 폐해를 강조하며 개혁이나 평등 같은 진보의 가치를 옹호했다. 똑같은 정당과 정치인을 놓고도, 어떤 친구에게 그것은 여전히 열렬한 지지의 대상이었지만 다른 친구에게는 변함없이 극렬한 비난의 표적이었다. 스무 살을 갓 넘긴 청년 시절엔 비슷한 환경과 조건에서 비슷한 책을 보고 비슷한 고민을 한 친구들의 정치관이 40년 후 이렇게까지 달라질 수 있구나 하는 생각에 귀가하는 지하철에서 내내 착잡하고 우울했다.      


보수 기득권 세력을 비호한 친구가 있었지만, 사실 그는 거기서 콩고물 한 점 얻어먹은 적도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입장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진보의 가치를 옹호한 친구도 있었지만, 따지고 보면 그에게 그건 자신이 응원하는 프로 야구팀이나 자신이 즐겨 먹는 라면 브랜드가 왜 좋은지를 강변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혁명 비슷한 주장 펼쳤다고 해도, 실은 그건 삶 전체를 건 혁명이 아니라 티셔츠에 박힌 체 게바라의 얼굴처럼 박제그 무엇이었다. 시 속의 그들은 혁명을 두려워했다지만, 우리는 혁명을 하대하고 있었다.   

  


3.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하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중에서)


시의 화자는 애써 옛사랑을 기억해냈으나 남아 있는 것은 그것의 희미한 그림자일뿐이었다. 그래서 부끄러움을 느꼈지만, 그마저도 귓전으로 흘려버렸다고 쓸쓸히 고백하고 있다. 여기서 옛사랑은 꼭 혁명이 아니어도 좋을 것같다.


우리에게도 '옛사랑'은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말라 비틀어진 그 옛사랑을 아련한 기억의 상자 속에 처박아둔 데 대해 우리 중 그 누구도 부끄러워하지는 않는 듯했다. 시 속의 그들은 당시 마흔 살 전후의 중년이었고 지금 우리는 환갑을 전후한 초로의 신중년이 아니냐, 그리고 당시는 아직 군사정권의 서슬이 퍼런 1980년대 초였고 지금은 천지개벽이 일어난 21세기 하고도 20년이 더 지난 시점이지 않느냐. 아마도 다들 그렇게 그 부끄러움의 부재를 변명하며, 그 시의 화자처럼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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