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씨가 ‘사과’와 관련해서 꼴사나운 언행을 거듭하고 있다. 그의 망언과 행태에 대해 처음엔 분노했지만 이젠 한심하다 못해 불쌍하다며 연민을 느끼는 사람도 꽤 있을 것 같다. 어쩌다가 이런 작자가제1야당의대통령 후보인나라에 살게 되었나 하는 자괴감을 느끼는 사람도 더러 있을 것이다.
나는 자괴감까지는 아니더라도 강한 연민을 느끼는 편이다. 그 연민의 감정을 담아 윤석열 캠프에 소개해주고 싶은 책이 있다. 영국의 저명한 조직심리학자 케리 쿠퍼(Cary Cooper)와 출판인이자 작가인 숀 오마라(Sean O'Meara)가 함께 쓴 『사죄 없는 사과사회』(원제: The Apology Impulse)이다. 실은 내가 번역해서 작년에 나온 책이다. 사과 한번 잘못해서 폭망한 사례와 사과 한번 잘 해서 전화위복이 된 사례 등을 소개하며 SNS 시대를 살아가는 정치인과 기업인들에게 바람직한 사과의 전략을 제시하는 책이다. 이 책은 여러 가지 잘못된 사과의 유형과 원인을 분석하고 있지만, 여기서는 그중에서 특별히 슈뢰딩거식 사과와 옵틱스 예측, 이렇게 두 가지 방법으로 윤석열식 사과를 읽어보기로 하자.
슈뢰딩거식 사과라는 말은 슈뢰딩거의 고양이라는 말에서 왔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1935년에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Erwin Schrödinger)가 양자역학의 불완전함을 보이기 위해서 고안한 사고 실험에서 나온 용어다. 내용은 좀 복잡하지만 한 마디로 요약하면 ‘살아있는 동시에 죽어있는 고양이’를 말한다. 여기서 따온 슈뢰딩거식 사과란 ‘미안하다면서도 결백을 주장하는 사과’를 뜻한다. ‘생’과 ‘사’가 공존할 수 없듯이 ‘사과’와 ‘결백’은 공존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 슈뢰딩거식 사과는 실패한 사과의 대표적인 사례로 소개된다.
윤 씨는 “그 누구보다 전두환 정권에 고통을 당하신 분들께 송구하다는 말씀드린다.”며 전두환 전 대통령 관련 발언에 대해 사과하면서도(‘송구’를 ‘사과’라고 치고), “제 발언의 진의는 결코 전두환에 대한 ‘찬양’이나 ‘옹호’가 아니었다.”며 “대학시절 전두환을 무기징역 선고한 윤석열이다. 제가 군사쿠데타를 일으키고 민주주의를 탄압한 전두환 군사독재를 찬양, 옹호할 리 없다.”라며 “국민 여러분이 더 잘 알 것”이라고 결백을 주장했다.
사과와 결백이 공존하고 있는, 전형적인 슈뢰딩거식 사과다. 그가 혹시 이 책을 읽고 그대로 따라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슈뢰딩거식 사과의 정의에 정확히 부합한다. 사과를 받는 사람에게는 그가 대학시절 어쨌는지는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1도 중요하지 않다. 그게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유승민 후보의 반박대로 모의재판은 연극에 불과할 뿐이며, 설사 그때 그런 신념을 지녔다고 하더라도 그 신념이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유지된다는 보장은 ‘전혀’ 없다. 사과와 결백의 공존 자체도 모순이거니와, 결백의 논거도 매우 엉성하고 부실하기 짝이 없다. 1980년대 대학을 다녔던 많은 사람이 공부했을 근현대사나 비판이론 등은 외면한 채 법전만 뒤적인 사람의 한계라고 이해해주기에도, 역사 인식이나 논리 전개의 수준이 너무 저급하다. 인문학은 다른 것 공부하다 심심할 때 조금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수준이니 어련하랴 싶다.
『사죄 없는 사과사회』에서는 슈뢰딩거식 사과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조직(즉 사과의 주체-인용자)은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장점을 강조하지 않음으로써 사안의 핵심과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을 책임 있게 제시해야 한다. 그래야 고객(즉 사과의 대상-인용자)에게 심정을 이해했다는 확신을 줄 수 있다.”
다음으로 옵틱스(optics)라는 개념이다. 이 단어는 주로 광학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지만 여기서는 ‘어떤 사건이나 행위에 대해 대중들이 지닌 또 다른 관점’이라는 뜻이다.(『사죄 없는 사과사회』를 번역할 때, 이를 우리말로 어떻게 옮기면 좋을지 고심했으나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 그냥 음차 해서 표기했다.) 『맥밀런 영영사전』에 따르면, “옵틱스는 개인이나 조직이 어떤 결정을 내릴 때 결정 그 자체의 실체보다 결정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더 우려하는 상황을 부각할 때 사용된다.”라고 한다.
윤 씨는 “‘발언의 진의가 왜곡되었다’며 책임을 돌린 것 역시 현명하지 못했다”라고 하면서, “정치인이라면 ‘자기 발언이 늘 편집될 수 있다’는 생각까지 해야 한다는 지적을 받아들인다.”라고 인정함으로써, 옵틱스를 예측하지는 못했지만 뒤늦게나마 옵틱스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인스타그램에 문제의 ‘돌 사과’ ‘개 사과’ 사진을 올리면서 또 다른 각도에서 옵틱스를 예측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사과를 개나 주라고 해석하실 줄은 몰랐다”라고 그 실패를 자인하고 있으니 말이다.
어떻게 보이느냐가 중요하고, 그것이 여론을 좌우하는 세상에서는 누군가의 행동이 훌륭한 지보다 나쁘게 보일 가능성이 없는지가 더 중요할 때가 많다. 남들에게 보이는 모습이 그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치인을 비롯한 공인에게는 옵틱스를 예측하고 이에 어긋나지 않는 언행을 보이는 것이 때로는 진의를 전달하는 일보다 더 중요하다.
하지만 옵틱스를 너무 의식해서 언행에 제약을 받는 경우도 있다. 『사죄 없는 사과사회』저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사과를 밥 먹듯이 하는 브랜드(또한 정치인-인용자)에는 두 가지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옵틱스에 대한 불안과 비난에 대처할 계획의 부재다.(...) 하지만 어떻게 보이는지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면, 소셜 미디어에 상주하는 비난 꾼들의 장난질에 넘어가 파국을 맞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자신의 활동과 문화, 평판에 대한 인식을 관리하려면 반드시 확고한 계획을 세워두고, 사안의 실체에 대해 정확히 세워두고 자신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키워야 한다.”
하지만 윤 씨에게 이 조언을 하기는 너무 이르다.돌잡이로 사과를 집은 어린애가 걸음마하듯 옵틱스의 의미를 이제야 겨우 깨우쳐가고 있는 사람에게 옵틱스에 대한 과잉 대응 금지를 주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윤 씨가 출마 선언 당시 옵틱스에 관해 걸음마만 떼었더라도 1주일에 120시간 노동해도 된다는 둥, 없는 사람에게 부정식품을 먹게 해줘야 한다는 둥, 육체노동은 아프리카인이나 하는 것이라는 둥 이해 못 할 망언을 늘어놓지 않았을 것이다. 설사 그렇게 실언했더라도 이에 대해 쌈박한 사과 한번 없이 캠프의 애매한 논평으로 퉁 치지도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