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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칠한 서생 Apr 30. 2022

강제를 자유로 착각하는 바보들에게

한병철의 <리추얼의 종말>을 읽고

※이 글은 수정 보완되어 <우리를 배반한 근대>(엄창호 지음, 2023년 여문책 펴냄)에 수록되었습니다.


1.

한병철은 신자유주의 저격수다. 나는 그동안 <피로사회>, <심리정치>, <타자의 추방> 등 일관되지만 다양한 각도에서 신자유주의를 저격해온 그의 책들을 탐독해왔다. 그가 지난해(2021년) 선보인 신무기 <리추얼의 종말>을 읽으며, 좀 난해해진 듯하나 더욱 무르익은 그의 철학을 오랜만에 접할 수 있어 기뻤다. 이번엔 어떤 필살기로 신자유주의의 급소를 찌를까, 하고 기대하며 울창한 사유의 숲을 헤쳤다.


2.

한병철은 <피로사회>에서 신자유주의의 특징으로 ‘자기착취’라는 섬뜩한 용어를 제시했었다. 이번엔 ‘생산/소통/성과/진정성 강제’라는 도발적인 용어를 등장시켜 신자유주의를 해부한다.


“오늘날 디지털 소통은 점점 더 공동체 없는 소통으로 발전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모든 각자를 자기 자신의 생산자로서 개별화함으로써 공동체 없는 소통을 강제한다. (...) 오늘날 우리는 모든 곳에서 강박적으로 자기 자신을 드러낸다. 사회적 차원은 자기 생산(자기 과시)에 완전히 종속된다. 모든 각자는 더 많이 주목받기 위해 자기를 생산한다. 자기 생산의 강제는 공동체의 위기를 초래한다.”  


생산/소통/성과/진정성이 강제되었다고 하는 이유는, 그 욕구가 자발적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실은 신자유주의의 명령이라는 뜻이다. 신자유주의 원하는 바를 자유의 이름으로 포장해서 자발적으로 행동하도록 사람들을 은밀히 조종한다는 얘기다. 신자유주의가 원하는 행위란 대개 순응적 노동과 과소비를 말한다. 이 책은 강제를 자유로 착각하면서 그렇게 알아서 기는 바보들에게 전하는 메시지인 셈이.


“사람들은 자기를 실현한다고 믿으면서 자유의지로 자기를 착취한다. 진정성 숭배를 수단으로 삼아 신자유주의 체제는 인간 자체를 체제의 소유물로 만들고 그를 효율성이 더 높은 생산소(生産所)로 변신하게 만든다. 그렇게 인간 전체가 생산과정의 부품이 된다.”


신자유주의 하에서는 맺음과 휴식이 사라지고 추가와 새로움이 끝없이 부과된다는 지적도 통렬하다. 휴식과 여가가 소비라는 이름의 노동이 된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밀려드는 이미지와 정보는 눈 감기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맺음의 부정성이 없을 때 일어나는 일은 끝없는 덧셈과 축적, 긍정성의 과잉, 정보와 소통의 비만한 번성이다. 끝없는 접속 가능성이 있는 공간에서는 끝맺음이 불가능하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신용카드 광고를 떠올려보자. 우리는 광고가 휴식과 여가를 소비라는 이름의 또 다른 노동으로 이어지게 만드는 자본의 명령이었음을 진작에 알았어야 했다. 한병철은 이 현상을 “이는 자본과 상품과 정보의 순환을 가속하기 위해서”라고 서슴치 않고 진단한다. 그 결과 사람들은 더 많은 시간과 공간을 생산하려 노력하면서 공간과 시간을 상실하는 무한한 악순환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고 단언한다.


한병철은 이처럼 삶의 시간이 노동시간과 완전히 일치하면 삶 자체가 극단적으로 덧없어진다고 우려하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리추얼(ritual; 대개 의례라고 번역되는 단어)과 ‘강한 놀이’를 회복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여기서 강한 놀이란 조르주 바타유의 용어로, 한병철의 설명에 의하면 삶 자체를 건 놀이로 생산의 논리에 부합하는 ‘약한 놀이’와 대비되는 개념이다.


“생산 및 성과의 강제가 심해지는 상황에서, 정치적 과제 하나는 삶을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것, 놀이처럼 사용하는 것이다. 삶이 외적인 목적에 종속되지 않고 삶 자신과 관련 맺을 때 삶은 놀이의 성격을 되찾는다. 되찾아야 할 것은 관조적 휴식이다.”


3.

한병철은 이 책의 부록으로 실린 대담에서, 리추얼을 강조한다고 해서 과거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고 안내하면서, “자아의 저편, 소망의 저편, 소비의 저편에서 이루어지며 공동체를 조성하는 새로운 형태의 공동행위들과 놀이들을 발명해야”한다고 제안하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구체적 사례는 알려주지 않는다.


한병철의 책들이 으례 그렇지만, 이 책도 정보와 의미의 밀도가 높은 문장과 생경한 개념어들이 곳곳에서 편안한 읽기를 방해한다. 쉽고 편안한 번역은 불가능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몇 가지 관문들만 넘으면 책이 논지 선명한 편이다. 그리고 나는 그 논지에 충분히 공감한다.


4.

그런데 공감할 수 없는 대목이 한 군데 있었다. 바로 ‘기호의 제국’이라는 이름의 장이다. ‘기호의 제국’은 1960 ~ 1970년대에 활동한 프랑스의 기호학자 롤랑 바르트가 일본의 문화를 기호학적으로 해석한 저서의 제목이기도 하다. 한병철은 이 장에서 실제로 바르트 책의 내용과 접근방식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한병철은 “기호 곧 기표가 의미 곧 기의에 흡수되면, 언어는 모든 마법과 광채를 잃는다”, “언어의 기능화 및 정보화의 심화는 기표의 과잉, 기표의 넘쳐흐름을 침식한다. 그리하여 언어는 탈바법화한다.”, “오늘날 우리는 기의의 문화 속에 산다. 오늘날 기의는 형식을 외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떨쳐낸다. 기의의 문화는 향유와 형식에 절대적이다.” 등의 단정적 표현을 통해 기의보다 기표가 중시되는 문화를 옹호한다. "기표가 절대적으로 우선되는 공허의 예식은 자본주의적 상품경제를 끝장낸다"라고까지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기표중심의 후기 자본주의 사회(포스트모던 사회나 소비사회라고도 함)를 비판한 장 보드리야르의 견해와 완전히 상반되는 입장이다. 그는 <시뮬라시옹>에서 오늘날 자본은 인위적인 사실성을 주입하려고 한다며 이것은 “사실성의 기호들만을 증폭시키며 시뮬라시옹의 유희를 가속화할 따름”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그는 기호 곧 기표의 폭증으로 인해 기의를 만나지 못한 기표들이 이미지가 되는 현상이 포스트모던 사회(소비사회)의 특징이라고 본다. 그런 기표 곧 이미지는 소비를 유도하는 강력한 무기가 된다. 보드리야르와 그를 읽지 않았을 리 없는 한병철이 이렇듯 극단적인 견해차를 보이는 이유가 뭘까? 난삽하기로 유명한 보드리야르를 내가 오독(誤讀)한 걸까?


5.

글을 마무리하려는 순간 문득 또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나는 이 글을 ‘생산’했고 ‘좋아요’와 ‘공유’와 ‘댓글’을 통해 널리 그리고 깊이 ‘소통’하기를 원한다. 이를 바탕으로 내 글쓰기의 이력에서 좋은 ‘성과’를 내기를 한다. 또 한편으로는 내 글쓰기 행위가 나름의 신성함을 지켜주는 리추얼이자 내 삶 자체와 관련을 맺는 '강한 놀이'이기를 기대한다. 그렇다면 과연 내 글쓰기 행위는 신자유주의에 의한 생산/소통/성과의 강제가 작동한 결과일까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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