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아내와 함께 극장에 가서 음악 다큐멘터리 영화 <아치의 노래, 정태춘>을 보고 왔다. ('아치'는 정태춘 부부가 키우는 원앙새의 이름이며, '아치의 노래'는 노래의 영향력이 줄어든 자신의 처지를 자조적으로 형상화한 노래라고 한다.) '사랑하는 이에게'를 함께 부르며 연애시절을 보낸 우리 부부에게 정태춘과 박은옥은우리 둘만의 아름다웠던 20대를 떠올려주는 아이콘이기도 하다. 그래서 3년 전 40주년 공연에 가지 못했던 아쉬움까지 안고 개봉하자마자 극장으로 향했던 것이다.
대학생 때부터 찐팬이었기에 나름 그의 삶과 노래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해왔는데 이 영화를 보니 그렇지 않았다. 처음 듣는노래도 꽤 있었지만 무엇보다 사전 검열제도 철폐라는 엄청난 성과를 거의 혼자서 이뤄냈다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되었다. (그전에는 사전 검열제도 철폐에 일정부분 기여했다는 정도로만~)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이에 견줄만한 성과를 낸 정치인이나 사회운동가가 과연 얼마나 있을까. 정태춘은 아티스트로서뿐만 아니라 사회운동가로서도 재평가되어야 한다.
정태춘이 노래를 통해 광주민주화운동이나빈민 문제 등 매우 현실적인 발언을 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그는 단순히부정한 정치권력이나 현재의 경제적 모순을 지적하는 일을 넘어 자본주의 체제 혹은 자본주의가 낳은 산업문명 자체를 비판해왔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그는1980년대 운동권 출신노래운동가들 예컨대 안치환이나 노찾사와는 결이 사뭇 다르다. 그들은 민주화 이후엔 동력을 잃고 해체되었거나 방향을 바꿀 수밖에 없었지만, 정태춘은 데뷔초부터꾸준히 문명비판적인 메시지를 노래에 담아왔다.
자본주의에 비판적이라고 해서 그를마르크스주의자나좌파 혹은진보주의자로 분류해서는 곤란하다.이 영화에서도스스로 말했듯이, 그는 과거에서 이상향을 찾는다는 점에서 오히려 복고주의자이자 낭만주의자에 가깝다. 이는 상품의 대량생산/대량소비, 무한경쟁과 이윤추구가 없는, 인류의 시원을 동경하는 노래들에서 확인된다. 글로벌 자본주의 상징 웬디스 햄버거 간판이 있는 낯선 서울을 떠나, 안개 낀 새벽의 '북한강에서''산과 산들이 얘기하는 신비한 소리를' 들으려 했고. '떠나가는 배'를 타고 '무욕의 땅'으로 떠나고싶어 했으며, '들 가운데서'연이 되어 '들판 건너 산을 넘어' '저 하늘 끝 가보고 싶은 땅'으로 날아가려 했다.
“(많은 사람들은) 산업주의와 시스템, 정치, 역사에 관한 이야기는 이제 그만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내 작품들은 나와 세상과의 불화에서 나온 것이죠. 이 행성에서 이루어진 인간 문명의 정당성에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 과거 군부가 쥐고 있던 권력이 민주화를 거치면서 시민에게 넘어온 게 아니라 시장 손에 들어가 버렸어요. 생산성에 따라 사람을 배치하고, 누구 하나 그로부터 빠져나갈 수가 없는 게 지금의 현실이죠.”(2019년 4월21일, <한겨레> 인터뷰 중에서 인용. 발언의 의도를 선명히 하기 위해 필자가 일부 내용을 수정했음. )
이처럼 그는 자본주의와 산업문명을 강하게 부정한다. 하지만 부정의 현실적동력을확보하지도 못했고, 추구하고 싶은 구체적대안을마련하지도 못했다. 물론 이는 예술의 영역이 아니라 정치와 투쟁, 혹은 학문의 영역이기에 아티스트인 그에게는 매우 힘겨운 과제일 수밖에 없다.그래서 아티스트로서 자신을 상징하는 '아치'는 날지 못하고 그의 노래는 "새장 주위로만 뱅뱅 돌" 뿐이다.뜻을 같이하고 싶은 "졸린 승객들"은 "모두 막차로 떠나"가고 말아서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 희망을미룰수밖에 없다.결국 이런 무력감 탓에 10여년간 창작활동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태도가 어쩌면 자본주의적 체제에 대한 가장 강력한 저항의 방식일지도모른다. 이를 정태춘 식 '사티아그라하'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사티아그라하 (satyagraha)란 무저항의 저항을 통한 진리에의 헌신을 뜻하는 용어로, 마하트마 간디 정신의 한 축을 이룬다.
이 영화에서 처음 들은 노래로 첫소절부터 넋을 빼앗긴노래가 있었다. 정태춘과 박은옥으로부터 우수한 음악유전자를 물려받은정새난슬이 아빠와 함께 부른 '들 가운데서'이다.정새난슬의 새벽안개 머금은 목소리가 정태춘이 꿈꾸었으나 결국 이르지 못한 무욕의 땅, 평화의 땅, 산과 산이 얘기하는 새벽강, '저 하늘 끝 가보고 싶은 땅'에 가닿기를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