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된 신념의 끝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읽고
1.
책은 책을 소개해준다. 내 경험 상 한 권의 책은 다음에 읽을 책 서너 권을 소개해준다. 그리고 나는 대개 그렇게 소개받은 책을 읽는다. 그런데 아주 가끔은 많은 사람이 본다니까 덩달아 읽기도 한다. 이른바 '밴드웨건 효과'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가 바로 그 경우다. 14주 연속 국내 도서 전체 톱 20 (예스 24 기준), 2022년 상반기 종합 베스트셀러 4위(교보문고 기준)... 이 특출 난 기록들을 보며 내용에 관한 막연한 호기심이 생겼다. 내친김에 요즘 베스트셀러의 성향도 파악하고, 다른 사람들이 책을 고르는 질서나 기준을 나의 그것과 견주어보고도 싶어졌다.
살아서 스탠퍼드대 초대 총장이자 위대한 과학자(생물 분류학자)로 명예를 누린 데이비드 스타 조던(David Starr Jordan)이라는 인물이 평생 지녀온 신념 두 가지가 모두 아무 근거 없는 허황된 것이었음을 밝혀내는 게 주된 내용이다. 추리소설 구조를 지닌 전기(biography)라고 할까, 교훈적 에세이라고 할까. 성공했다고 믿었던 한 인물의 허상이 벗겨지는 반전의 희열을 맛보게 하는 한편,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은 질서나 기준이 실은 터무니없는 허상일 수 있으니 늘 겸손하고 조심스럽게, 혹은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가라는 교훈도 전해준다.
2.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평생 지녀온 신념이란 ‘우생학’과 ‘어류의 존재’이다. 우생학은 다윈의 진화론을 곡해한 이론으로, 인종에도 우열이 있는데 우월한 인종은 번성하고 열등한 인종은 사멸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나치가 자행한 유대인 학살의 이론적 근거이기도 했다. 지금이야 당연히 말도 안 되는 허황된 이론으로 간주되지만, 불과 100년 전만 해도 이 사이비 신앙에 가까운 주장이 전 세계를 풍미했다. 이 책의 주인공 조던도 이에 부화뇌동했음을 저자는 꼼꼼히 밝혀낸다. 그중 한 구절이다.
"그는 인류가 쇠퇴해가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생각했을 때, 필요하다면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인류를 구출해야 한다는 소명을 느꼈다. 그는 자연의 질서에 관한 믿음을 칼날처럼 휘두르며 인류를 구원할 유일한 방법은 불임화라고 사람들을 설득했다."
그는 불임화에 대한 신념으로 흑인이나 재소자 여성에 대한 강제 불임화 계획에 동참함으로써, 결국에는 인류를 구출한 것이 아니라 인류를 파탄으로 몰고 가는 데 일조한 인물이 된 셈이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평생 간직했던 또 다른 신념은 어류의 존재를 확신하고 그 분류체계를 정립하는 일. 하지만 ‘어류’의 분류상 범주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제목은 이 때문에 붙여졌다.) 결국 그의 평생의 연구는 휴지 조각이 되고 말았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동물 분류 범주에서 어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일부 학자의 의견일 뿐인지, 아니면 학계의 정설인지가 이 책에 명확히 나오지는 않는다. 다만 저자는 이렇게 단언하고 있다.
“어류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류’라는 범주는 존재하지 않는다. 데이비드에게는 너무나도 소중했던 그 생물의 범주, 그가 역경의 시간이 닥쳐올 때마다 의지했던 범주, 그가 명료히 보기 위해 평생을 바쳤던 그 범주는 결코, 단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다.”
3.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허상을 밝혀내는 중심 스토리라인과 함께, 이 책에는 또 하나의 스토리라인이 존재한다. 여성 저자인 룰루 밀러(Rulu Miller)가 양성애자로서 같은 여성과 결혼했음이 밝혀지는 스토리라인이다. 결국 이 책을 통해 성적 소수자인 저자는 자신과 같이 주류에서 배제되고 소외된 소수자들을 향해, 현재 절대화된 질서와 기준이 언젠가는 무너질 것이니 용기를 잃지 말라고 격려하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셈이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 질서(order)를 무너뜨리는 것, 계속 그것을 잡아당겨 그 질서의 짜임을 풀어내고 그 밑에 갇혀있는 생물들을 해방시키는 것이 우리가 인생을 걸고 해야 할 일이라고 믿게 되었다. 우리가 쓰는 척도들을 불신하는 것이 우리가 인생을 걸고 해야 할 일이라고. 특히 도덕적, 정신적 상태에 관한 척도들을 의심해봐야 한다. 모든 자(ruler) 뒤에는 지배자(Ruler)가 있음을 기억하고, 하나의 범주란 잘 봐주면 하나의 대용물이고 최악일 때는 족쇄임을 기억해야 한다.”
영어에서 ruler는 자(尺, 척도, 기준)이기도 하고 지배자이기도 하다. 또한 order는 질서이기도 하고 명령이기도 하다. 자, 즉 척도는 보편적 원리가 아니라 지배자의 독단적인 기준일 뿐이며, 질서는 객관적 조건이 아니라 지배자의 일방적인 명령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이 책의 독자 중에는, 현재의 질서나 기준이 절대적으로 옳은지 그른지 지금은 알 수 없지 않으냐, 데이비드 스타 조던도 살아서는 부와 명예를 누리지 않았느냐, 죽은 다음의 평가까지 고려하며 복잡하게 살기는 싫다, 현재의 질서와 기준대로 살겠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을 것 같다. 그들은 필시 현재의 질서나 기준이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기득권자들이거나, 장차 그 기득권자에 포함되어 그 질서와 기준의 유리함을 누리기를 희망하는 자들일 것이다.
4.
책을 덮으며, 왜 이 책이 우리나라에서 최근 몇 달간 초특급 베스트셀러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곰곰이 생각했다. 이 정도의 반전이나 교훈으로 그만한 인기를 얻었다는 사실을 끝내 이해하기 어려웠다. "<워싱턴포스트>, <내셔널 퍼블릭 라디오>, <시카고 트리뷴>, <스미소니언> 등 다수의 매체로부터 '2020년 최고의 책'으로 선정됐다"는 출판사 측의 홍보도 주효했을 테고 읽은 사람들의 입소문도 한몫했을 것이다.
우리는 이 책을 '최고의 책'이나 '베스트셀러'로 평가한 질서와 척도가 '지배자'의 일방적인 명령이나 독단적인 기준일지도 모른다고 강하게 의심하거나 불신해야 한다. 여기서 '지배자'는 특정한 한 사람이 아니라 베스트셀러 선정방식이나 책을 고르는 관행이나 입소문이나 홍보마케팅 따위를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다. 그렇게 의심하고 불신하라는 것이야말로 이 책이 던져주는 궁극의 교훈일 것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