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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칠한 서생 Jun 03. 2022

왜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플까

벼농사 문화와 협업/질시의 이중성

*이 글은 수정 보완되어 <우리를 배반한 근대>(엄창호 지음, 2023년 6월 여문책 발행)에 수록되었습니다.



1.

‘괜찮아유’라는 인기 개그 코너가 있었다. <유머 일번지>라는 KBS 코미디 프로그램의 한 코너로, 1991년 5월부터 10월까지 약 6개월간 방영되었다. 방영 기간은 짧았지만, 워낙 유머 코드가 독특해서 종영 이후에도 여러 번 리메이크되었으며 지금도 유튜브에서 높은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다. 덕암리라는 농촌 마을이 배경이며, ‘양랙이 아부지’(최양락 분) 부부와 ‘경애 아부지’ (김학래 분) 부부주요 등장인물이다. 이들은 농사일도 서로 돕고 농기구도 나눠 쓰고 음식도 주고받으며, 그야말로 그 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도 알 만큼 오랫동안 호형호제하며 한 가족처럼 지낸 관계다.      


이처럼 그들은 오랫동안 협력자로 살아왔지만, 문제는 내심으로는 서로를 경쟁의 대상으로 생각해서 늘 비교하고 질시한다는 데 있다. 이를테면 ‘경애 아부지’ 부부는 ‘양랙이 아부지’ 부부를 가난하고 게으른 날라리로 여기고, ‘양랙이 아부지’ 부부는 ‘경애 아부지’ 부부를 좀 잘 산다고 거들먹거리는 속물로 여기며 서로를 은근히 무시한다. 대체로 ‘양랙이 아부지’ 부부는 알량한 도덕적 우위를 경쟁의 무기로 생각하고 '경애 아부' 부부는 어쭙잖은 경제적 우위를 경쟁의 무기로 생각한다.


 그들은 이런 무기를 바탕으로, 함께 농사를 지으며 필연적으로 협력할 수밖에 없는 관계이면서도 늘 상대방을 자신과 비교하고 약점을 건들며 면박을 준다. 그들은 이웃사촌이면서도 어느 한쪽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픈 관계임이 분명하다.


두 주인공의 다툼은 ‘양랙이 아부지’가 ‘경애 아부지’ 부친의 친일 행위를 폭로하는 순간 파국으로 치닫는다. '양랙이 아부지'가 모든 정황이 불리할 때 꺼내 드는 마지막 묘수가 바로 그 친일 카드다. “모두가 어려울 때 경애 할아버지는 그래도 일본 순사 나까무라랑 허구한 날 붙어 다니면서...”라는 말을 시작으로 '양랙 아부지'는 경애 할아버지의 여러 친일행적을 나열한다. 그러면 '경애 아부지'는 극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주먹다짐 직전까지 가는 것으로 코너는 대개 마무리된다. 사촌이 논을 산 것만으로도 배가 아픈데, 부정한 권력자를 뒷배로 삼아 그 논을 샀으니 배가 더 아프다는 게 '양랙이 아부지'의 심정인 듯하다.


오랜 이웃으로서의 협력과 비교 대상으로서의 질시, 그 두 가지 상반된 태도가 공존하면서 생기는 어긋남이 웃음을 유발하는 요인이다. 그 웃음은 여느 개그 프로에서는 경험하지 못한 독특한 웃음이다. 당시 많은 한국인이 그 코너를 사랑한 이유는 이런 웃음 코드에 크게 공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인구의 90퍼센트 이상이 도시에 사는 지금도 옆집이든 동창이든 반 친구이든, 가까운 그 누구라도 늘 협력의 대상이자 경쟁의 대상이니 한국인이면 그 구도에 자연스럽게 공감했을 것이다. ‘엄친아(엄마 친구 아들)’니 ‘엄친딸(엄마 친구 딸)’이니 ‘부친아(부인 친구 아들)’니 하는 용어들도 이런 비교와 질시의 문화에서 태어난 신조어들이다.


2.

한국인에게 협력과 경쟁이 공존하는 문화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원래 우리 민족은 두레나 품앗이와 같은 협력의 문화가 강했는데, 자본주의가 들어오고 압축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치열한 경쟁이 나타났고, 이에 따라 비교와 질시의 문화가 만연했다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사회학자 이철승 교수는 <쌀, 재난, 국가>에서, 이러한 문화는 벼농사 문화권에 속한 한국인의 오랜 속성이라고 말한다. 이 책에 따르면, 전근대 농경시대의 이러한 경험과 습속은 산업화 과정에서 공장과 사무실로 이전되어 효율적인 산업화를 추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쌀, 재난, 국가>는 동아시아 문명과 서구 문명의 차이가 벼농사와 밀농사의 차이에서 비롯된다는 대전제 하에, 우리 문화 속에 내재된 불평등의 기원을 밝히는 책이다.


3.

먼저 이 책은 동아시아의 벼농사 문화권과 서구의 밀농사 문화권의 특징을 비교하는 데서 출발한다. 쌀은 완전식품으로 경작을 위해 협업이 필요한 작물인 반면에, 밀은 불완전 식품이며 경작 과정에서 협업이 필요 없는 작물이다. 밀은 불완전한 식품이므로 서구에서는 밀농사와 함께 목축업이 발달했고 곡물과 유제품의 상품화되면서 상업과 교환경제가 발달했다. 이에 반해 쌀의 자기 완결성은 긴밀한 협력의 사회 조직을 탄생시켰다.      


벼농사 지대의 개인들은 가족 단위로 마을 공동체에 속해서 농사는 형제, 친척, 이웃 함께 지었으나 결과물은 개인이 소유했다. 이러한 ‘공동노동-개별 소유’의 시스템 속에서 경쟁과 비교의 문화가 생겨났고 이와 함께 질시의 문화도 싹텄다고 이 책은 분석한다. 또한 이 과정에서 기술의 표준화/평준화와 연공제(年功制)의 위계질서도 자연스럽게 생겨났다고 한다. 공동노동을 위해 집집마다 동일한 작업 과정이 필요한 한편, 이를 위해 연장자의 경험과 조율 능력을 중시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 책의 핵심은 이처럼 벼농사의 특성에서 ‘공동생산-개별 소유’와 ‘협업-위계-경쟁’이라는 키워드를 끄집어낸 다음, '공동체적 유대감'과 ‘비교와 질시의 문화'의 공존이라는 이중적 심리구조를 밝혀낸다는 점이다. 이를 파헤치는 과정은 마치 잘 만든 영화 한 편을 보는 듯 매우 드라마틱하다.      



질시는 서구사회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불신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이 책은 “구조적으로 강제된 네트워크 안에서 경쟁과 질시의 문화가 격화되면서 신뢰 밑에 불신의 층이 한 겹 더 깔릴 수 있다”면서, “불신이 내재된 협업은 간섭과 상호감시, 의심이 일상화되는 피곤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라고 설명한다.     


4.

이러한 농경시대의 전통이 산업사회로 이전되었다는 해석은 매우 독창적이다. 어린 시절부터 농경시대의 전통을 보고 습득한 산업화 세대가 집단주의적 협업과 위계 구조를 농촌에서 도시로 이식했다는 것이다. “동아시아 기업 조직은 이 업무와 공정의 표준화를 달성하는 공식/비공식적 노동의 연결망을, 서구의 기업 조직이 실현할 수 없을 만큼 극도로 촘촘하고 세밀하게 직조하여 외부의 수요와 공급의 변동에 일사불란하게 대처하는 ‘기민한 생산체계’를 만들어냈다. 이 기술 튜닝의 연결망이 동아시아 자본주의가 세계시장에서 생존할 수 있는 경쟁력의 원천이었다”라고 강조한다.     


이러한 벼농사 문화의 영향으로 동아시아 자본주의는 오랫동안 축적된 협업과 조율의 기술, 협업-관계 자본으로 인해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고 해석한다. 그런데 문제는 협업의 과정에서 평등화 욕망이 커졌고 이는 비교와 질시의 문화로 나타났으며, 상대적 불평등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게 되었다는 점이라고 지적한다. 과거에는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팠지만, 지금은 옆집 아이가 상을 타면, 동창생 남편이 승진하면, 회사 동료가 고급 외제 차를 사면 배가 아픈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동아시아의 벼농사 문화권 국가들이 복지국가에 소극적인 이유를 신자유주의의 시장 만능주의와 연결한 대목도 인상적이다. 동아시아 국가의 존재 이유는 ‘재난 대비 및 구휼’에 그쳤는데, 이는 국가의 역할을 최소화해야 하므로 국가의 복지 역할에 부정적인 신자유주의 이념과 근친적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말한다. “국가는 생산에 대한 지원에 스스로의 역할을 한정하고 요역과 세금 부담을 덜어주어 농민의 생산 의욕을 돋우어야 한다는 동아시아 군주의 교시는 (...) 신자유주의 시장 근본주의와 묘하게 맞아떨어졌다.”     


5.

이 책은 결론적으로, 벼농사 체제의 유산들 가운데 협업의 결과인 기술 튜닝 (표준화 및 평준화)과 연공제를 현대 자본주의 및 민주주의 제도에 맞게 재구성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어떻게 하면 청년세대의 민주적 수평적 조직문화에 대한 욕구, 개인의 능력과 노력에 대한 공정한 보상에의 욕구를 모두 만족시키면서, 벼농사 체제의 긍정적 유산인 ‘협업과 기예’를 보존할 수 있을까?” 저자는 우리 사회의 과제를 이렇게 말하지만, 아쉽게도 그에 대한 제도적 개선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는 않는다.


무리한 단정으로 보이는 대목도 몇 군데 눈에 띈다. 우리나라에서 2000년대를 전후로 무너져온 연공제에 지나친 비중을 두는 점, 밀농사 지역이 벼농사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평등의식이 강하다고 일반화한 점, 세대 내 동질성을 전제로 세대 간 불평등 문제를 분석한 점 등이 특히 그렇다. 그렇다고 이런 무리가 이 책의 명쾌하고 거침없는 논리 전개를 크게 훼손하지는 않는다.     


한국의 사회과학 분야 교수들이 한국 사회를 분석한 책이나 논문은 많다. 그런데 그 대다수는 서양학자의 이론을 소개하거나 서양에서 만들어진 개념과 방법론으로 우리의 현실을 분석한 글이기 십상이다. 우리 학문의 종속성을 말해주는 이런 풍토 속에서 이철승 교수의 <쌀, 재난, 국가>는 우리만의 문제 인식/개념/방법론으로 우리의 문제를 살피고 있다는 점에서 단연 돋보인다.


그는 사회학자들의 우상인 막스 베버니 피에르 부르디외니 하는 이름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지도 않는다. 페르낭 브로델이니 비트포겔이니 하는 세계적인 역사학자의 권위 앞에 머리를 조아리지도 않는다. 그의 이력을 보니 미국의 유명 대학에 재직하며 최우수 논문상을 받는 등 세계의 사회학자들과 논문으로 맞짱 뜬 경력도 있다. 나는 책을 읽는 내내 한국인 사회학자로서 그의 당당함에 뜨겁게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6.

한국의 근대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한국 근대의 기원에 대한 논의는 크게 ‘내재적 발전론’과 ‘식민지 근대화론’으로 구분된다. ‘내재적 발전론’은 한국이 일제의 식민지가 되기 전에 이미 자주적 근대화가 이루어져 가고 있었다는 이론이다. 우리 내부에 자본주의의 싹이 자라고 있었다는 '자본주의 맹아론'과도 연결되고, 일제가 그 싹을 잘라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수탈했다는 ‘수탈론’으로도 이어진다.


‘식민지 근대화론’은 식민지 시기 일제에 의해 경제가 성장하고 근대화의 토대가 마련되었다는 이론이다. 근대가 외부에서 심어졌다는 에서 ‘이식론’의 한 유형이기도 하다.  '내재적 발전론'과 '식민지 근대화론' 간에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면서 ‘다중적 근대화론’과 같은 절충론이 등장하기도 했다.           


나는 그 논쟁에 끼어들 능력도 생각도 없다. 다만 1960년대 이후 이루어진 ‘성공적인’ 근대화에는 우리 내부에서 우리 스스로 키우고 준비한 문화와 제도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재적 발전론’을 응원한다. 앞으로 ‘내재적 발전론’을 입증할 수 있는 실증적 논거들이 많아지기를 기대할 따름이다. 이철승의 <쌀, 재난, 국가> 바로 그러한 기대를 채워주는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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