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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칠한 서생 Jun 12. 2022

송해, 최고가 아니었기에 최고가 된 사람

1.

원조 국민MC, 일요일의 남자, 동해/서해/ 남해와 함께 대한민국을 둘러싸고 있다는 분, 송해 선생이 별세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이 글을 쓴다.


2.

내가 '송해'라는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건 10대 시절인 1970년대 인기 라디오 프로그램이었던 ‘송해 이순주의 싱글벙글쇼’에서였다. 얼마 전까지 강석과 김혜영이 30년 넘게 진행했던 바로 그 ‘싱글벙글쇼’가 1970년대(확인해보니 1973년)부터 시작되었으니, 1980년 시작된 ‘전국노래자랑’보다 더 장수한 프로그램이다. 물론 1971년부터 1977년까지 ‘KBS배 쟁탈 전국노래자랑’이라는 이름의 오디션 프로가 있었으나, 이는 현재의 ‘전국노래자랑’과 성격이 많이 다르다.


그 무렵 40대 중반이었을 그를 먼발치에서나마 직접 본 적도 있다. 내가 살던 소도시 공설운동장에서 시민위안 어쩌고 하는 쇼가 열렸고, 난 몰래 담을 타넘고 들어가 봤었는데, 그때 사회자가 바로 송해와 이순주였다. 라디오 프로에서 그 두 사람이 워낙 다정하게 만담을 펼치기에, 그들이 부부이거나 연인일 거라고 멋대로 짐작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행사 현장에서 그들의 막전막후를 유심히 살펴본 결과, 나의 어설픈 짐작이 틀렸음은 물론 어쩌면 개인적으로 나쁜 사이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가수가 노래를 부르는 동안 그들이 서로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냉랭하게 서로를 외면했다는 것이 내 나름의 증거였다. 만약 방송국에서 그 사실을 알게 되면 그들은 어쩌면 짤릴 수도 있겠다고 걱정하면서, 그들의 나쁜 사이가 들통나지 말기를 바라기도 했다. 진실이야 알 수 없지만, 주제 넘게 별 걱정을 다했던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 확인해보니 이순주 씨는 작년(2021년) 4월 작고했다.


송해와 공연하던 당시의 이순주(좌)


       

그 당시 사회자로는 곽규석이 단연 최고였고 송해는 늘 한두 단계 아래였다. 곽규석은 TV의 주요 연예프로 사회를 도맡아 보았고, 송해는 주로 라디오프로, 야외행사, 지방공연의 사회자로 활동했던 것 같다. 코미디언으로도 송해는 늘 구봉서, 서영춘, 배삼룡의 뒷자리였다. 구,서,배 씨들이 최고의 코미디언으로 갈채를 받을 때, 송해는 기껏 조역으로 그들의 병풍 역할에 그쳤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결국 그 선배들도 오르지 못한 자리에 올랐다. '전국노래자랑'은 매주 전국 구석구석을 다니며 녹화해야 하는 야외 행사 프로그램이니, 그가 최고의 사회자나 코미디언이었다면 맡지도 맡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는 그 자리를 30년 가까이 지키며 ‘세계 최고령 음악경연 프로그램 진행자’라는 전대미문의 기록을 남겼다.


물론 이는 ‘전국노래자랑’이라는 프로가 유행이나 시의성을 타지 않는 장수프로그램의 조건을 갖추었기에 가능한 일이지만, 무엇보다 사회자의 재능과 꾸준한 자기관리가 따르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송해는 최고가 아니었기에 최고가 될 수 있었다.


3.

송해는 우리 사회에서 매우 희귀한 '존경받는 원로'였다. 분야마다 '존경받는' 분도 있고 '원로'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존경받는 원로'는 매우 드물다. 4.19혁명 때 이승만의 하야를 이끌어 정권교체를 가능하게 했던 결정적 계기는 당시 존경받는 원로 교수들의 학생 지지 시위였다.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정초가 되면 언론사마다 ‘원로에게 듣는다.’ 같은 기획을 통해 우리 사회의 갈 길에 대해 존경받는 원로의 지혜를 듣고 소개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지난 2~30년 동안 우리 사회는 상전벽해로 변했다. 어느 분야든 존경받는 원로는 거의 자취를 감췄으며, 있더라도 영향력을 갖지 못하는 실정이다. 사람들은 늘 더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더 새로울수록 존중하고 있으며, 오래된 것은 지혜로운 것이 아니라 낡고 폐기되어야 할 것으로 취급하고 있다.


드라마에서는 부모의 후광을 업은 2~30대의 유능하고 야심만만한 ‘실장님’이나 ‘본부장님’ 들이, 무능하거나 음흉하거나 고리타분한 4~60대 카운터파트 또는 부하직원을  야멸차게 제압하는 장면이 수시로 펼쳐지고 있다. '꼰대'니 '아재'니 하는 용어로 기성세대를 폄하하는 일은 이젠 기성세대조차 스스로 인정할 만큼 정착되었다. 나이 먹은 것 그 자체가 죄악이 되고 나이 먹은 사람은 악마[villan]가 된 것이다. '계획적 노후화(planned obsolescence)'라는 마케팅 전략이 사람에게도 적용된 것인가? 이런 터무니 없는 '악마화' 앞에서 원로가 설 자리는 갈수록 좁아져왔다.  척박한 풍토에서  어렵게 생존한 원로가 존경까지 받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지나가기보다 더 힘들 것이다.


그런데 오랜 기간 동안 단 한 번의 스캔들이나 불미한 사고 없이 전 국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으며 한자리를 지켜온 원로  한 분이라도 계셔서 참으로 다행스러웠는데...그 곳이 연예계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진심으로 존경과 애도의 마음을 표현하는 후배 연예인들을 보며, 그동안 소위 '높은 교육열'로 탄생한 우리 사회 각분야의 가방끈 긴 '먹물'들은 반성해야 한다. 상투적인 애도의 수사를 표하는 일보다 우리가 진정으로 해야 할 일은 그러한 반성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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