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수정 보완되어 <우리를 배반한 근대>(엄창호 지음, 2023년 6월 여문책 발행)에 수록되었습니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열풍은 거셌다. 한창 때는 모이면 우영우였고 켜면 우영우였다. 그런데 나는 이 드라마가 심히 못마땅하다. 자폐인임에도 놀라운 암기력과 추론 능력에 최고의 스펙을 가진 데다 미모와 따뜻한 심성까지 갖춘 한 젊은 여성 변호사를 이상하다고 한 제목부터 맘에 들지 않는다. 이상하다는 표현이 역설의 수사법임을 어찌 모르겠냐만, 실은 이상한 게 아니라 특출 난 거다. 우리말 사전에 따르면 ‘이상하다’는 ‘의심스럽거나 알 수 없는 데가 있다’는 뜻으로, 부정적인 뉘앙스가 강한 표현이다. 우영우 변호사가 이상하다는 말은 수십억 원 대 자산가의 ‘그저 굶지나 않고 산다’는 말처럼 왠지 ‘재수 없다’는 느낌이 든다. 영어 제목을 보니 ‘이상한’을 ‘extraordinary’로 옮겼던데 그게 맞는 표현이다. 이는 비범하거나 대단하다는 뜻으로, 능력이나 성과를 극찬하는 뉘앙스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이 드라마를 심히 못마땅해하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한 마디로 '법 지상주의'를 부추기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 간 우리 사회에는 법이 세상만사 위에서 군림하는 현상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생각나는 대로 몇 가지 굵직굵직한 일들만 떠올려보자. 여당의 현 원내대표/전 비대위원장 및 야당의 전/현 대표가 모두 법조인 출신이다. 전/현 대통령도 모두 법조인 출신이고, 지난 대선 때 거의 모든 (예비) 후보들이 법조인이거나 법 전공자였다. 시사프로그램의 진행자나 출연자 중 상당수가 법조인이며, 정부 부처 중 유독 법무부와 검찰청은 일거수일투족까지 주목받고 있다. 행정부의 정책이든 정당의 결정사항이든 모두 법 절차에 따른 기소와 판결의 대상으로 전락하며 체면을 한껏 구기고 있다. 언론 보도의 사실 여부도 법정에서 가려지기 전까지는 진영 논리에 따라 오락가락 한다. 법 지상주의 열풍은 드라마에도 불어닥쳐서, 채널마다 법조 드라마들이 줄지어 전파를 타며 시청률 상위권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이대로 가면 법 조문이, 예수의 말씀보다 더 위대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고, 부처의 말씀보다 더 고귀한 대자대비의 가르침이 될 판이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한 장면 우영우 드라마의 성공은 이렇듯 뜨겁게 달아오르는 법 지상주의 풍토에 기름을 붓는 격이다. 이렇게 말하면 드라마 속 우영우는 인간적인 체온이 느껴지는 따뜻한 법, 소외된 이웃을 품어주는 너그러운 법, 개발과 이익 대신 생태와 환경을 더 중시하는 푸근한 법을 추구함으로써 아름다운 세상을 실현하지 않았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우영우가 추구한 그 아름다운 세상은 법을 통해서, 즉 고소와 고발, 기소와 구속, 변론과 논고, 판결과 처벌 등 일련의 법적 과정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바꿔 말하면, 그 아름다운 세상이 법 지상주의 프레임 속에 갇혀있다는 얘기다. 이 사실을 우리는 똑똑히 기억해야 한다.
아름다운 세상은 법이나 법의 원리(법리)를 통해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 아름다운 세상은 법보다는 도덕과 윤리, 학문과 예술, 과학과 기술 등 다양한 영역에서 인류가 오랫동안 쌓아 올린 지혜로 만들어진다. 아름다운 세상은 법리보다는 비판적 이성을 통한 사유와 성찰, 공감과 배려심, 관용과 절제, 공동선을 위한 시민적 덕성 등으로 만들어진다. “법은 도덕의 최소한이다.”라는 독일의 법학자 엘리네크(Georg Jellinek)의 말을 인용할 것도 없이, 법은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작은 도구일 뿐이다. 그러니 법이 모든 가치와 질서의 슈퍼갑인 작금의 법 지상주의 사회는 결코 아름다운 세상이 아니다. 따라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려면 먼저 법 지상주의를 무너뜨려야 하고, 법을 절대반지로 여기는 법 지상주의 프레임에서 벗어나야 한다.
아무리 따뜻하고 너그럽고 푸근한 법을 추구하고 실천했더라도,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법 지상주의 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했음은 물론 오히려 이를 강화한 책임이 있다. 이는 아무리 자상한 노예주라도 노예제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고방식 탓에 결국 노예제를 강화한 책임이 있는 것과 같다. 노예에게 필요한 것은 노예제 옹호자인 노예주의 자상한 배려가 아니라, 노예제의 철폐를 포함해서 평등한 인간으로서의 권리와 존엄을 제도적으로 보장해주는 일이다. 이렇게 보면 자상한 노예주가 오히려 최악의 노예주가 될 수도 있다. 이에 관해 아일랜드 출신의 극작가이자 시인인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는 보석 같은 명언을 남겼다.
“최악의 노예 소유주는 자신의 노예들에게 친절하게 대해서 노예제도로부터 고통받는 이들과 그 제도를 심사숙고하는 이들이 그것의 끔찍함을 깨닫거나 이해하지 못하게 했던 사람들이었다. 마찬가지로 현재 영국에서 가장 해악을 끼치는 이들은 노예들에게 가장 좋은 일을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오스카 와일드(1854~1900)
결국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자상한 노예주처럼, 법을 통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듦으로써 결과적으로 사람들이 법 지상주의의 끔찍함을 깨닫거나 이해하지 못하게 만든 ‘최악의 드라마’가 아닐까? 이런 평가가 너무 심하다면, 일단 법 지상주의 프레임을 고착, 강화하는 데 기여한 나쁜 드라마라고 해두자. 이것만으로도 내가 이 드라마를 심히 못마땅해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우영우 신드롬에서 깨어나 주위를 둘러보라. 오늘도 법 지상주의자들은 여기저기서 법전을 양손에 들고 신들린 듯이 망나니 춤을 추고 있지 않은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