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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칠한 서생 Sep 14. 2022

‘계획적 진부화’라는 은밀한 폭력

자본의 보이지 않는 음모

*이 글은 수정 보완되어 <우리를 배반한 근대>(엄창호 지음, 2023년 6월 여문책 발행)에 수록되었습니다.


1.

2001년 어느 날, 미국 캘리포니아주 리버모어에 있는 소방서에서 어떤 주인공의 탄생 100년을 축하하는 생일파티가 열렸다. 1천 명 가까운 하객이 모여들었고 열띤 취재 경쟁도 벌어졌다. 그런데 알고 보니 주인공은 백수를 누린 어느 어르신이 아니라 놀랍게도 일개 전구(電球)였다. 2010년 제작된 다큐멘터리 영화 <전구의 음모(The Light Bulb Conspiracy)>에 나오는 얘기다. 검색 결과 그 전구는 2017년까지 생존해있었음이 확인된다. 아직 사망했다는 기사가 뜨지 않는 걸 보니 여전히 건재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2022년 현재 121세 되시겠다. 한낱 전구 하나를 위해 그렇게 떠들썩한 생일파티가 열렸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전구의 수명이 100년이 넘는다는 사실이 더 놀랍다. 처음 나올 때는 반영구적이라며 호들갑을 떨던 LED전구도 2,3년이면 교체해야 하는 실정이 아닌가.      


역사는 발전하고 기술은 향상된다고 많은 사람이 믿고 있다. 그렇다면 120여 년 전의 기술이 지금의 기술보다 더 앞섰다고밖에 해석할 수 없는 위 전구 이야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리고 ‘백수 전구’를 낳은 기술이라면 백수까지는 아니더라도 ‘8순 전구’, ‘고희(즉 70세) 전구’, ‘환갑 전구’가 줄줄이 나와야 할 텐데 그런 이야기는 아직 듣지 못했다. 이 현실은 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문제의 리버모어 소방서 전구가 탄생한 이후에 전구 만드는 기술이 갑자기 퇴보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20세기 초인 그때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단 말인가? 영화 <전구의 음모>의 핵심 내용은 바로 그 비밀을 밝혀주는 일이다. 이른바 ‘전구 음모 이론’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전구의 음모> 중 한 장면

 

2.

1924년 성탄절, 스위스 제네바에서 세계 굴지의 전구 업체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인다. 네덜란드의 필립스(Phillips)와 독일의 오스람(Osram) 등 지금도 세계적인 브랜드로 굳건히 자리 잡은 이름들이 머리를 맞댔다. 그들은 전구의 수명을 1000시간 이내로 제한하기로 합의하고, 이를 위해 포이보스(Phoibos, 아폴론 신의 별칭으로 태양 또는 태양신을 뜻함)라는 이름의 전구 카르텔을 형성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리고 ‘1000시간 수명 위원회’를 두고 이를 통제하기로 했다. “범용 전구의 수명은 보장되거나 명시되어서는 안 되며, 1000시간 이상을 초과해서는 안 된다”라는 합의문 조항에 그 카르텔의 사명이 잘 드러나 있다. 전구 카르텔 포이보스의 음모는 당시에는 비밀리에 진행되었으나, 80여 년 후 한 독일의 역사학자에 의해 비로소 밝혀진다.      


전구의 수명은 그 카르텔이 형성되던 1920년대에 이미 2500시간에 도달해 있었다. 19세기 말 에디슨이 전구를 처음 발명했을 때도 1500시간이었다. 그런데 그 전구 카르텔이 인위적으로 그 수명을 1000시간으로 제한한 것이다. 하나의 상품을 계획적으로 빨리 낡게 만들어 다른 상품을 사게 만드는 음모, 전구를 시작으로 다른 상품에도 적용되어 1950년대 이후 서방 세계 번영의 토대가 된 ‘영광의 30년’을 가능케 한 회심의 전략, 지금은 기술의 영역에서 심리의 영역에까지 파고든 현대 마케팅의 진수, 그것을 우리는 ‘계획적 진부화(planned obsolescence)’라고 부른다. ‘계획된 진부화’나 ‘계획적 노후화’로도 번역된다.    

  

‘전구 음모 이론’과 함께 1920년대 계획적 진부화를 서방 세계에 정착시킨 전략이 ‘디트로이트 모델’이다. 1923년 제너럴모터스사는 포드사의 검고 각진 모델 T 아성에 도전하기 위해 세련된 디자인의 쉐보레를 출시했다. 아울러 기술력에서 포드사를 따라갈 수 없었던 단점을 극복하려고, 매년 외형 디자인을 갱신해서 신모델을 출시해서 미국인들이 3년에 한 번씩 차를 바꾸도록 만들려고 했다. 제너럴모터스사의 절묘한 마케팅전략에 고전을 거듭하던 포드사도 결국 1932년 경쟁사의 전략을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이 전략은 자동차 도시인 디트로이트의 이름을 따서 ‘디트로이트 모델’이라 불렸다.      



3.

계획적 진부화 문제를 천착해온 대표적인 인물이 프랑스의 경제학자이자 철학자인 세르주 라투슈(Serge Latouche)이며, 계획적 진부화에 관한 그의 우려와 경고를 전하는 책이 바로 <낭비사회를 넘어서>이다. '계획적 진부화라는 광기에 관한 보고서'라는  부제에 뜻이 잘 담겨있다.


여기서 그는 소비사회가 악순환을 지속하기 위해 필수적인 요인으로 광고, 소비금융 (또는 신용거래)과 함께 계획적 진부화를 꼽는다. 이 세 가지에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소비사회(또는 소비자본주의)를 이끄는 3두 마차라 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광고가 소비하고자 하는 욕망을 불러일으키고, 소비금융(신용거래)이 그 수단을 제공한다면 계획적 진부화는 소비자의 필요를 갱신한다.


예컨대 내가 현재 사용 중인 스마트폰을 당장 신형으로 바꾸려면, 첫째 광고를 통해 세련된 디자인이나 새로운 용도에 대한 욕망을 느껴야 하고, 둘째 신용카드를 통해 무이자 할부 등의 혜택을 받을 수 있어야 하며, 셋째 현재 사용 중인 스마트폰의 기능이 진부해져야(또는 그렇게 느껴야) 한다. 신형 스마트폰 구매에는 이 세 가지 요인이 동시에 필요하기도 하지만 적어도 하나의 요인이 필요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인 1950년대부터 본격화한 대량생산/대량소비의 포드주의 체제는 바로 이 3두 마차에 의해 추진되었다는 것이 라투슈의 판단이다. 계획적 진부화는 미국에서 발명되어 처음에는 미국식 생활방식과 함께, 나중에는 세계화를 통해 나머지 지역 전체로 확산되었다고 한다.     


4.

자본주의는 생산이 이끌어가는 경제 체제이다. 생산량을 늘려 자본의 이윤을 키워가지 않으면 존속할 수 없는 체제이며, 결국에는 구조적으로 경제성장을 지속해야만 안정을 유지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러려면 생산량부합하도록 소비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만약 영구적이거나 반영구적인 상품을 생산해서 소비가 부진하다면 생산도 부진해지고 이에 따라 자본의 이윤도 줄어들게 되어 있다. 따라서 어떻게든 생산에 맞는 소비를 촉진시킴으로써 경제를 순환시키는 일이 자본의 목표가 된다. 라투슈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성장에 중독된 환자가 되어버렸다. 현대의 터보 소비자들이 과잉 소비를 통해 얻는 것은 기껏해야 상처와 역설로 가득한 행복일 뿐이다.”     


하지만 생산의 폭주는 멈추지 않는다. ‘대량생산-대량소비-이윤의 고도화’라는 순환의 과정에 차질이 생기면 자본주의 체제가 잘 작동되지 않기 때문이다. 1929년 뉴욕 증시의 폭락사태로 시작된 ‘경제 대공황’이 바로 자본주의 제제가 고장난 대표적인 사례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대공황은 뉴딜정책으로 대표되는 공공투자와 복지정책,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일단 해소되었다.     


그런데 경제 대공황 당시 계획적 진부화를 통해 공황을 탈출해야 한다고 주장한 인물이 있었다. 러시아에서 유대인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해 맨해튼에서 주식 중개로 큰돈을 번 버나드 런던(Bernard London)이었다. 그는 <계획적 진부화를 통한 공황 탈출>이라는 소책자를 통해, 정부가 신발, 주택, 기계를 포함한 모든 공산품이 출시되는 순간에 유통기한을 정해서 오래 사용하지 못하도록 강제해야 하며, 이를 통해 생산과 소비를 빠르게 순환시키면 공황을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제안은 실현되지 못했다.    

  

앞에서 예로 든 ‘전구의 음모’ 사례에서 전구 제조업자의 포이보스 카르텔이 시행한 계획적 진부화는 제품에 몰래 기술적 결함을 심어 넣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만약 이러한 답합은 나중에 법으로 금지되었고, 이에 대한 해법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상징적 진부화’이다. 상징적 진부화란 광고와 마케팅을 통해 현재 제품을 낡은 것으로 느끼도록 은밀하게 설득함으로써 신제품을 사도록 하는 전략을 말한다. 오늘날에는 광고/홍보/마케팅을 통해 상징적 진부화, 계획적 진부화가 거의 구분 없이 통합되어 있다는 것이 라투슈의 판단이다.      


5.


라투슈는 계획적 진부화가 자연 자원 낭비와 쓰레기 범람이라는 중대한 생태적 문제를 불러온다는 점을 지적한다. 계획적 진부화로 인해 양산된 폐가전 제품은 중국이나 아프리카로 수출되어 많은 지역주민의 반발을 사고 삶을 황폐하게 만들고 있음을 영화 <전구의 음모>는 잘 보여주고 있다. 라투슈는 이 문제의 해결은 탈성장에 있음을 강조한다. 성장이 중시되고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중단되지 않으면 이 문제는 결코 해결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앞에서 그는 계획적 진부화의 최종 단계인 상징적 진부화를 ‘은밀한 설득’이라고 말했지만, 실은 ‘은밀한 강제’이거나 ‘은밀한 폭력’이라고 표현했어야 했다.      


그는 이렇게 마무리한다. “상품만이 넘쳐나는 가짜 풍요는 우리에게서 자연의 멋진 선물들에 감탄할 수 있는 능력을 앗아가 버렸다. 이 능력이야말로 인류의 계획적 진부화라는 암울한 운명을 극복하고 건강한 탈성장 사회를 건설하려는 계획이 성공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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