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자'는 신성가족?

김영호 통일부장관 후보자 청문회를 보고

by 까칠한 서생

김영호 교수가 통일부장관으로 지명되었다. 멸공통일을 주장하는 자를 평화통일을 추진해야 하는 자리에 앉히겠다는 거다. 윤석열식 인사의 진수를 보는 듯하다. 그가 통일부장관으로서 부적격자임은 너무나 분명하니 청문회를 몰입해서 볼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잠깐 흘려가며 보았는데, 유독 귀에 거슬리는 단어 하나가 있었다. ‘학자’라는 단어다. 그는 외교/통일 문제와 관련된 자신의 극우적 주장을 “학자로서”, “학자의 관점에서” 따위의 언사로 피해 가려하고 있었다. 마치 학자가 한 말에는 면책특권이 있고, 학자의 주장은 너무나 신성해서 누구도 비판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는 투였다. 야당 의원들이 그의 극우적인 발언들을 열심히 뒤쫓았지만 그 발언들이 학자라는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추격을 멈추었다. 학자가 무슨 봉건시대 특권층이라도 되고, 학자의 주장은 무슨 전통시대 신성지대인 ‘소도’라도 된다는 듯했다. 세 가지를 지적하고 싶다.


첫 번째는 직업이 교수라고 해서 또는 박사학위를 받고 논문 몇 편 썼다고 해서 자동으로 학자인 것은 아니라는 점. 18세기말에서 19세기 초 활동한 독일의 철학자 요한 G. 피히테는 학자의 사명이 ‘보편적으로 인류의 현실적 진보에 최상의 주의를 기울이고 이러한 진보를 항구적으로 촉진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규정이 너무 엄격하다면, 학자는 객관성과 비판성과 엄정성을 갖추고 자신의 분야에서 자신만의 학문적 성과를 이룬 사람이어야 한다. 이런 정의가 추상적이라면 적어도 권력에 빌붙어 자리를 갈구하거나, 돈에 매혹되어 지식을 팔아먹는 자를 학자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현실정치에 참여하지 말라거나 지적 수고의 대가로 돈을 받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다. 권력과 돈 앞에서 학문적 소신과 양심을 걸고 당당해야 한다는 얘기다. 이렇게 보면 직업이 교수이거나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 중에 학자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오히려 직업이 교수가 아니라도 혹은 박사 학위가 없어도, 학자의 이름에 어울리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두 번째는 설사 학자라고 하더라도 “학자로서” 혹은 “학자의 관점에서” 그가 펼친 주장이 치외법권 지대에 있거나 신성불가침의 영역에 있지 않다는 점. 그 누구든, 형식이 무엇이든 표현의 자유와 권리에는 책임이 따르는 건 동일하다. 야당의원들이 학자로서 한 주장이라는 말에 비판의 태도를 누그러뜨리는 듯한 태도는 너무 안일했다. 학자든 뭐든 그 주장이 문제가 있다면 응당 비판의 메스를 들이대야 했다.


세 번째는 내 개인적인 경험의 결과이므로 다분히 주관적인 생각 하나. 교수의 허울을 썼지만 실제로는 양아치에 가까운 짓을 하고 다니는 사람을 몇 명 알고 있다. 그들의 공통점은 자신을 즐겨 ‘학자’라고 부른다는 데 있다. 오히려 내가 보기에 학자라고 해도 될 만한 분들은 절대로 자신을 학자라고 내세우지 않고 연구자나 교수라는 객관적인 호칭을 쓴다. 학자라는 말이 얼마나 책임이 무거운 단어인지를 알기 때문일 것이다. 말끝마다 자신을 학자라고 부르는 김영호 통일부장관 후보자는 적어도 나에게는 그것만으로도 학자가 아니다.


유교의 전통이 아직 남아있어서 그런지 우리 사회는 학자나 교수라는 말 앞에 너무나 관대하다. 민주주의를 유린한 유신체제에 저항한 학자보다 유신헌법을 만들고 옹호하던 '학자'가 훨씬 더 많았다. 생태계를 유린한 4대 강을 반대한 학자보다 4대 강을 찬성하거나 묵인한 '학자'가 훨씬 많았다. 어떤 권위주의 정권이든 그때마다 그에 부역하는 ‘학자’들이 나타나 이데올로그로서 그 정권에 훌륭하게 기여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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