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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리다 Dec 10. 2023

James Joyce< Grace >2.

진정한 Grace를 찾아서


나는 항상 더블린에 대해 쓴다.     

더블린 핵심에 도달할 수 있다면 모든 도시의 핵심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수성에는 보편성이 들어 있다.     

-James Joyce


지난 시간 Grace를 읽으며 익명의 사람들의 은총(Grace)을 보았다. 그렇다면 이름과 익명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 조이스는 항상 더블린에 대해 쓴다고 한다. 그렇다면 도시라는 시공간에서 호명된 주체는 어떤 의미일까? 도시와 함께 태어난 개인은 어떻게 주체로 탄생하는지 잠시 살펴보자. 


계몽주의와 화폐경제

계몽주의는 18세기 유럽의 사상적 흐름으로 ‘이성’을 무기로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19세기로 접어들며 계몽주의와 화폐경제가 가져다준 진보와 행복의 신화가 확산하며 산업자본주의 틀이 확립됐다. 산업자본주의로 대도시가 발달하며 공동체 구속에서 벗어난 개개인들이 탄생한다. 


도시 과시욕과 경멸의 시선

영국의 식민지였던 아일랜드 더블린도 자본주의가 가장 먼저 발달한 영국의 세례를 그대로 받는다. 커넌처럼 장사로 한때 부를 거머쥐기도하고, 파워처럼 친영파가 되어 권력을 잡아 실세가 되기도 한다. 도시의 개인들은 상류사회에 대한 선망을 품으며 자본을 축적하는데, 경제적 자본외에도 예술을 향유할 문화자본, 시험제도를 통해 얻은 지위 학력자본, 문화와 학력자본을 통해 얻은 인맥인 사회관계자본을 과시하며 사회적 계급으로 부상한다. 상류층을 향한 그들의 과시욕은 하류층에 대한 경멸로 나타난다.

커넌은 현재 직업적으론 하강 곡선에 있지만, 과거 최정상일 때의 자의식에 고착돼 있다. 유독 실크모자와 각반이 자신의 품위를 지켜준다고 믿고 있는데 이런 과시욕 이면에는 시골 출신에 대한 경멸이 내면에 자리 잡고 있다. ‘그는 자신의 시민권을 예민하게 의식’하며 시골 출신 순경 따위에게 자신이 구속될 뻔한 상황이 화가 나는 건지, 파워의 뒷돈을 받은 부당함이 화가 나는 건지 그를 경멸하며 모욕에 이를 간다.

<A Mother>의 키어니 부인의 과시욕은 프랑스어와 ‘기니’ 단위의 사용에서 나타나며 패트릭씨의 하층민 출신의 ‘밋밋한 말투에 경멸하는 눈빛으로 노려’본다.

<Little Cloud>의 챈들러는 성공한 갤러허를 만나기 전 허영에 부풀어 거리를 걸을 때, ‘꾀죄죄한 아이들, 온갖 하찮은 벌레 같은 인간들’이라 말한다. 

계몽의 의미에도 ‘무지한 민중을 지식인들이 일깨운다’는 엘리트주의적 과시욕이 내포돼 있다. 커넌의 친구들은 커넌을 위해 모인 듯하지만 각자 자신의 지식을 드러내는 과시욕의 장일 뿐이다. 커넌이 목구멍 아래서 가래가 올라오는 것 같다고 말하자 머코이는 흉부에서 올라오는 담이라며 전문용어로 정정한다. 이후 그들은 교황의 모토에 대해 서로 다른 주장을 하며 옥신각신한다.

as Pope, was Lux upon Lux–Light upon Light.” “No, no,” said Mr. Fogarty eagerly. “I think you’re wrong there. It was Lux in Tenebris, I think–Light in Darkness.” “O yes,” said Mr. M’Coy, “Tenebrae.” “Allow me,” said Mr. Cunningham positively, “it was Lux upon Lux. And Pius IX his predecessor’s motto was Crux upon Crux– that is, Cross upon Cross–to show the difference between their two pontificates.”

모두 부정확한 주장이다. 이후 이어지는 대화에서 카톨릭계 사건의 정황들은 맞는 게 하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닝엄의 나직하고 거친 목소리는 그들을 전율시킨다. 대화의 기세가 커닝엄과 포가티에 의해 분위기가 화기애해지자 커넌은 ‘대장자리에서 밀려난 느낌’을 갖는다. 친구사이에서도 지식에 의해 권력의 위계가 재편되기도 한다.

<The Boarding House>도런도 폴리의 문법에 맞지 않게 말하는 모습을 경멸해야 할지 좋아해야 할지 고민한다.

지식은 진실을 드러내고 경험하고 유지하기보다는, 진실을 감추고 도외시하고 만다. 


세속화된 종교

신이 약속한 최상의 가치는 구원, 천국이다. 이와 함께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미래에 대한 기대를 가능하게 해주는 힘을 갖는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총(grace)은 조건부 은총으로 타락하며 면죄부를 사야 했고, 타락한 카톨릭에 맞서 종교개혁이 일어났지만 칼뱅주의도 현세의 세속적인 삶이 오히려 좋은 천국을 보상받는 척도라 가르친다. 금욕의 종교에서 사치의 종교로 탈바꿈한다.

“All’s well that ends well.”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거야. 파워가 친구들과 대화에서 화제를 바꿀 때마다 하는 말이다. 이 문장은 퍼든 신부의 피정 설교 마지막 문장을 비춘다.

“I find this wrong and this wrong. But, with God’s grace, I will rectify this and this. I will set right my accounts.” 종교의 목적론적 세계관이 투영된 이 말들... 지금 이 순간의 삶이 상처받고 고통스럽고 부당해도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것인가? 


호명된 주체와 익명의 사람들

알튀세르는 인간이란 사회적 구조의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모든 이데올로기는 구체적 개인들을 주체로 호명’하는데, 이 이데올로기의 작용은, 사람들의 의식과 행동을 그들의 임무와 존재 조건의 수준에 맞도록 변형시킨다. 따라서 주체로 호명된 뒤 개인은 생각이나 행동들에 이데올로기가 무의식적인 표상체계로 작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커넌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 놀란 지배인은 의사가 아니라 순경을 부른다. ‘지배인’이란 호명에 갇혀 자신의 임무에 기계적으로 행동한다. 순경도 상황에 겁을 먹고 ‘순경’의 호명에 갇혀 수첩을 꺼내며 의식이 없는 사람에게 이름과 주소를 묻고 있다.  파워는 ‘누가 자기 이름을 부르는 것을 탐탁해하지 않는다.’ 그는 호명하는 권력을 무의식적으로 직감하고 있다. 파워는 영국 관할하에 있는 무장경찰로 그의 이름은 복종하는 자로서 더 많이 불리었을 것이다. 호명되는 순간 그 호명에 순응하며 끌려 들어가게 된다. 

“these ignorant bostooms…” 커넌이 시골 순경을 경멸하며 ‘저 무식한 멍청이들’이라도 말한다. 커닝엄은 이 말을 받아 “65, catch your cabbage!” 시골 순경들이 훈련받는 모습을 흉내내며 친구들은 한바탕 웃는다. cabbage는 얼간이란 뜻이 있다. 시골 순경들의 상관은 그들을 번호로 호명하며 cabbage의 동음이의어를 이용해 조롱했던 것이다. 커넌과 친구들은 순경들의 모욕에 연민을 느끼기보다 똑같이 조롱하며 즐거워한 것이다. 

커넌이 추락했을 때 도움을 주었던 익명의 사람들. 이들을 통해 조이스는 호명되기 이전의 비인칭성, 바로 고착된 자의식이 없을 때 진정한 은총을 베풀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커넌과 어떠한 연관도 얽히지 않은 익명의 사람들이 커넌의 고통에 공감하며 행동한다. 그들 중 결정적으로 커넌을 살렸던 사이클 복장의 청년은 비인칭성 외에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사이클 복장의 청년이 다른 지식인들과 달리, 은총을 몸으로 실천한 인간을 의미한다면, 그가 타고 온 사이클의 바퀴는 무한한 시간의 연속성을 의미하는 건 아닐까? 바로 이곳의 삶, 현재의 모든 선택이 영원히 반복되기에 지금 여기서 행복해야한다는 니체의 '영원회귀'처럼 말이다.

이와 반대편에 있는 부패한 신부의 설교와 커넌의 말처럼 “All’s well that ends well.”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거야 라는 목적론적 세계관에 갇힌 이들은 그 '끝'을  위해 고통에 마비된 채 현재의 기쁨을 부정하게 된다면, 환멸로 가득 찬 <더블린사람들>의 이야기는 무한 반복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건 아닐까? 


진정한 Grace를 찾아서

우리는 일상이 무너질 때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커넌은 질척거리는 오물과 구정물에 얼굴이 처박혀 바닥에 추락해 있을 때 익명의 사람들의 은총Grace으로 살아났다. 조이스가 지옥으로 상징한 술집 바닥에서 은총이 일어난 것이다. 지옥같은 그 순간이 자신을 구원Grace할 수 있는 계기이다. 그러나 그 사건을 통해 커넌은 다시 살아났지만 마비된 일상으로 다시 되돌아갔다. 왜 그의 삶은 변하지 못하는 걸까?


도시라는 시공간은 총체적인 매개가 얽힌 곳이다. 이 총체적 권력은 실체가 없지만 우리 삶에 갖가지 이데올로기로 정당화되어 있다. 상징적 폭력을 일상적으로 당하고 있음에도 상처를 상처로 보지 못한다. 커넌의 혀는 그 많은 ‘말’들의 폭력이 일어난 곳이며 그 ‘말’들에 의해 자신도 상처받았던 모순된 공간이다. 자신의 혀가 잘려 나갔음에도 커넌은 ‘사고를 가볍게 무시’한다. 주변사람들이 그의 상처에 대해 묻지만 ‘아무것도 아니’라고 상처를 부정한다.

조이스는 커넌의 ‘엉긴 피로 범벅이된 잘려 나간 혀’를 통해 총체적 권력에 의해 만신창이가 된 자신의 상처를 지독하게 응시해야 한다고, 그럴 때만 진정한 구원Grace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하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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