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장은 조너스가 ‘사랑’이란 개념을 처음 배우게 되는 중요한 장이다.
조너스가 기버에게 가장 좋아하는 기억이 무엇인지 묻자, 기버는 그 기억을 전해줄 수 있어 기쁘다며 크리스마스의 기억을 준다.
There were cries of delight. They hugged one another. The small child went and sat on the lap of the old woman, and she rocked him and rubbed her cheek against his.
삼대가 한집에 모여 풍성한 음식이 차려진 가운데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고받으며 서로 껴안고 볼을 비빈다. 조너스는 이 따뜻하고 행복한 기억을 즐겼지만, 이 기억 전체에 강하게 퍼져 있는 느낌을 적당한 단어로 찾을 수 없었다. 기버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알려준다.
조너스는 처음 듣는 사랑이라는 개념과 느낌을 연결 지으며 자신이 너무 어리석게 살아왔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사랑 없이도 마을의 모든 일은 효율적인 방식으로 꽤 잘 돌아가고 있으니 조나스는 혼란스러워한다. 그러다 나직이 말한다.
“I like the feeling of love, I wish we still had that.”
다음 날 조너스는 부모님께 자신을 사랑하냐고 묻는다. 아빠는 킬킬 웃으며 그 단어는 너무 무의미해서 거의 사용하지 않는 단어라며 정확한 단어를 쓰라고 한다. 엄마 역시 단어를 정확하게 사용해야지 마을이 원활하게 돌아간다며 ‘저와 즐거우세요?’ , ‘제 성과에 자부심을 느끼세요? 라고 질문으로 정정해준다. 마을 내에서 일어나는 개인의 감정조차 감각적 쾌와 불쾌로 규정되기보다는 마을의 효율성에 따라 학습된다.
1.가장 효율적인 것은 가장 비인간적인 것
마을은 최대치의 생산 효율과 안전을 보장하며 ‘Sameness’로 주민들을 통제한다. Sameness를 위한 수많은 규칙에 순응하면 인생의 어려운 선택의 순간마다 적합한 것으로 찾아 주며 예측가능한 미래를 누릴 수 있다. 그럼에도 소설 초반부터 주민들의 불안의 모습이 언뜻언뜻 비치고 기묘한 웃음 뒤엔 음침함이 깔려 있다. 예측하지 못한 비행기 이탈에도 마을 전체는 과도한 불안에 떤다. 후반부로 넘어오면서 생모와 아이의 단절, 임무해제라는 모호한 개념 뒤로 숨긴 처형제도, 영아 살해, 과거의 모든 지식의 제한 등이 드러나며 커뮤니티의 잔혹성이 수면 위로 드러난다. 조너스 아버지 앞에 놓인 아기들은 생산 조립라인에 놓인 상품에 불과하게 되어 목표 수치에 결함 있는 아기를 폐기한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조너스 아버지가 가브리엘에게는 규칙 위반을 하면서까지 아기의 이름을 부르며 저녁마다 집에서 돌본다. 그의 인간적인 면모가 보이는 장면이다.
집단 효율을 위해 차이 없는 ‘늘같음상태’ ‘동일성’으로 통제하는 흑백의 단조로운 커뮤니티의 세계.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와 비교하면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고 화려한 이미지와 정보를 공유하며 그들보다 행복한 것 같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볼수록 현재 우리가 더 위태롭다.
2.과도한 시각 중심적인 일상
우리의 사회는 ‘커뮤니티’와는 상반되는 화려한 이미지의 시대에 살고 있다. 넘쳐나는 정보와 이미지를 언제든 자유롭게 보면서 즐긴다. 고대 사냥꾼의 후예 답게 우리는 감시자와 피사체의 분리에서 오는 쾌락을 느낀다. 보는 주체와 보이는 객체, 이 둘은 권력관계로 묶여 있다. 이 시선의 권력은 20세기에 들어와 폭력적으로 양산된 것이 팝옵티콘이며 커뮤니티에 구현된 감시 시스템이다. 대상과 거리를 둔 채 초월적인 시선으로 감시하며 통제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도 이 관음증적 시선을 누리고 있다. 극장, 페이스북, 유튜브. 인스타, 브이로그 등에서 디지털 기술의 진보로 AI딥페이크 성범죄로 까지 확산해 나간다. 그러나 소셜 미디어 공간에서 내가 ‘보는 주체’라는 감각은 어느 순간 내가 ‘보이는 객체’로 역전된다. 내 자유의지로 보기 시작한 이미지는 아주 적은 노력으로 도파민이란 보상이 주어지면서 한번 보면 빠져든다. 그 시선의 흔적들은 빅데이터 알고리즘을 만들어 내며 그것은 내 시선의 욕망을 감시, 통제한다.
권력이 위협적으로 대상의 행동을 강제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자발적으로 복종하게 만드는 것이다. 외적인 강제는 부자유로 의식돼 저항을 할 수도 있지만 자발적 복종은 권력의 실체가 인식되지 않아 저항조차 어렵다. 조너스는 권력에 저항하며 탈출을 시도하지만, 우리는 내가 통제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그들이 무료로 제공하는 알고리즘에 순응하며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먹어 치운다. 그토록 많은 다양한 상품과 이미지속에 살면서 동일한 유행을 쫓으며 유명인의 손길이 스친 제품은 순식간에 품절된다. 이 소유욕망은 늘 소득보다 커져 있어 결핍이 채워지지 않는다. 상대적 빈곤을 느끼면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다. 커뮤니티가 강제로 통제했던 것들을 자발적으로 포기하고 있다. 자신의 효용성이 의심되면 임무해제, 스스로 삶도 포기한다.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SNS에 과도하게 몰입할수록 자살시도율이 높아진다고 한다. 자기 비하적 비교, 완벽한 이미지에 대한 선망이 원인이다.
시각 중심적인 스펙타클한 세계에 포획되면 자신이 선망의 존재만 되고 싶어하지, 남도 자신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며 사랑의 개념은 무의미 해진다.
3.인류의 진화: 느끼고 아는 존재
신경과학자 안토니오 다마지오(Antonio Damasio)는 느낌은 즉각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구성되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느낌은 신체의 생리적 반응에 뿌리를 두고 있어, 신체의 변화가 없으면 느낌도 없다는 것이다. 늘 같은 상태에서는 특별한 느낌이 발생하지 않지만, 신체 감각에 변화가 있을 때, 느낌을 생성한다고 한다. 한 층 더 나아가 ‘느낌을 안다는 느낌’ 에서 앎으로 나아간다. 이 앎은 자아에 대한 깊은 이해를 할 수 있는 의식으로 까지 진화했다는 것이다.
인류는 긴 시간 동안 느끼고(feeling) 아는(knowing) 존재로 진화해 왔지만, 지금 현재는 시각폭력을 휘두르는 권력의 노예로 살아간다. 하나의 감각만 기형적으로 커진 인간의 느낌은 퇴화중이다.
4. 잃어버린 감각들을 찾아서
나도 조너스처럼 어릴 적 엄마의 행복했던 기억을 들으며 자랐다. 인상 깊었던 기억 중 하나는 엄마의 국민학교 때 기억이다. 담임 선생님께서 전근 가시던 날, 정이 많던 이 젊은 남자 선생님께서 이별 인사를 절절하게 하신 모양이다. 화창한 가을 어느 날 선생님은 아이들을 학교 뒤뜰에 모아놓고 한 명씩 불러 포옹하며 인사를 나누었는데, 엄마는 선생님의 눈물범벅 된 젖은 볼로 비비던 감촉을 잊을 수 없다며 미소 지으셨다. 엄마의 이 기억은 내 유년 시절 강복구 선생님을 떠올리게 된다. 1학년 교실. 수업 중 재채기를 하다 콧물이 나와 버렸다. 난 콧물이 묻은 얼굴로 선생님 앞으로 나갔고, 선생님은 나를 보자 얼른 무릎 꿇고 앉아 손수건으로 콧물을 닦아 주셨다. 키득대는 아이들 웃음소리에 난 그제서야 창피함을 느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나를 보시더니 ‘코 닦으니까 이렇게 이뻐졌네, 오늘 입은 원피스도 정말 이쁘다.’며 엉덩이를 토닥토닥 두들겨 주셨다. 내 눈물은 쏙 들어갔고 웃으며 내 자리로 돌아갔다. 이후에도 난 괜히 선생님 옆에 서 있었고 늘 엉덩이를 토닥여 주셨다. 국민학교 선생님 중 얼굴과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유일한 선생님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터지는 교사 성추행 사건을 접하는 시대에 이 두 장면은 감동은 커녕 눈살을 찌푸리는 장면이 돼 버렸다. 나의 기억은 엄마한테 전했지만 아이들에겐 들려주지 않았다. 이 아름다운 기억 속의 선생님들은 무례한 성추행범으로 둔갑할 것이다. 지금은 이 장면에 깃든 사랑과 애틋한 정이 무의미 해져서 전할 수 없게 돼 버렸지만 이 기억을 전할 수 있는 때가 올까?
조너스를 미래를 향해 말한다. “모든 게 바뀔 거야, 가브리엘,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는 나도 몰라. 하지만 모든 게 달라질 수 있는 어떤 방법이 있는 게 틀림없어...또 모든 사람이 다 기억을 갖게 될 거야”
조너스는 가브리엘에게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다양한 감각의 느낌을 전한다. 보트 타기, 맑은 날의 소풍, 유리창에 떨어지는 부드러운 빗소리, 축축한 잔디 위 맨발로 춤추기의 기억을. 그리고 나서 또 말한다.
“그러면 사랑도 생길 거야”
우리는 무엇을 먼저 해야 할까? 우선 스마트 폰을 내려 놓자. 혹사하던 눈의 기능이 멈출 때 일어나는 감각들의 느낌을 느껴보자.
Shut your Eyes and see!
-James Joyce <피네간의 경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