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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에나 Jun 30. 2021

대신 질 수 없는 짐

영국 공립 어린이집 적응기

  

  아이가 밤마다 울던 때가 있었다. 새벽에 옆방에서 우는 소리가 나서 달려가 보면 서럽게 주저앉아 눈물을 뚝뚝 흘리고 앉아있던 때가. “우리 아가 왜 울어? 엄마 여기 있어. 자, 코 자자, 응?” 다시 눕혀서 가슴을 토닥이면 바로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어제 왜 울었냐고 물어봐도 전혀 기억을 못 했다. 온종일 까불고 쉴 새 없이 떠들며 놀다 또 엉엉 우는 밤.      


 영국에 온 지 6개월이 되던 때. 처음 한두 달은 힘들었지만 한국 친구가 온 뒤로 잘 적응하고 있는 큰아이와 달리, 누구와도 말이 통하지 않는 상태에서 혼자 버텨내야 하는 둘째 선우는 늘 한국을, 다니던 어린이집을 그리워했다. 어려서부터 사회성 하나는 끝내줘서 늘 친구에게 둘러싸여 지냈기에 변화의 폭이 더 큰 듯했다. 여름휴가를 어디로 가고 싶으냐고 물으니 바로 나오는 대답.


 “나는 한국. 한국 가고 싶어. 말이 통하잖아. 영국 생활은 어려워.”     


  초등학교 정규 교육과정에 들어가기 전에 널서리(Nursery)라고 부르는 영국 공립 어린이집의 하루 보육 시간은 단 세 시간. “뭐, 3시간밖에 안 봐준다고?” 한국에서는 꼬박 6~7시간을 어린이집에 맡길 수 있었는데, 아침 9시에 데려다주면 12시 전에 찾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운전하며 왔다 갔다 하는 시간을 빼면 내 자유 시간은 두 시간 남짓. 집에 가서 점심을 먹이고 나면 다시 하교하는 큰애를 데리러 가야 하는 빡빡한 일정이었다. 그래도 선우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오히려 이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그래, 영어를 못하니 오래 있으면 힘들 거야. 이래저래 세 시간은 버틸 수 있겠지? 생후 15개월부터 영아전담 어린이집에 다녔잖아. 그간 어린이집 구력이 얼만데 고작 세 시간이니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순전히 나의 착각이었다.     


   널서리에 다닌 지 몇 주 뒤 어느 날, 선생님에게 전화가 왔다. 선우가 너무 기분이 상해서 울고 있는데 도저히 그 이유를 모르겠다고. 서둘러 가서 자초지종을 물어보니 만들기 시간에 셀로판테이프가 필요해서 “테이푸! 테이푸!” 하고 말했는데 아무도 못 알아들었단다. ‘셀로 테입(Sello tape)’이란 말은 알 리가 없고 아무리 반복해서 말해도 못 알아들으니 그만 그간 눌러둔 억울함이 폭발했던 것. 어린 마음에도 말이 안 통한다는 것은 답답하고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불편함을 넘어 서러운 것이었다.     


  하루는 널서리를 나오는 선우 표정이 유난히 어두웠다. 차에 태우고 집으로 출발하려는데 “오늘 안 좋은 일이 있었어. 친구 두 명이 경찰을 하고, 나는 도둑 하기 싫은데 억지로 시키고, 침 뱉고, 막대기 같은 거로 때리는 척을 했어. 마음이 너무 슬퍼......” 뭐? 억지로 도둑을 시키는 것도 모자라 때리는 시늉을 하고 침을 뱉었다고? 아이의 말을 듣는데 화가 머리끝까지 나는 게 이런 건가 싶었다. 가슴은 두근거리고 손은 덜덜 떨려서 도저히 운전을 할 수가 없었다. “안 되겠다. 다시 가자. 가서 얘기하자 우리.” 바로 차를 세우고 그 길로 다시 돌아가 널서리 전체 책임자인 헤드 티처(head teacher)를 만났다.     


  더듬거리며 설명을 마치자 선생님은 한쪽 무릎을 굽히고 몸을 낮춰 선우와 눈높이를 맞추며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이건 매우 심각한 일이고 모든 선생님과 상황을 공유한 뒤 더 잘 지켜보겠다고. 앞으로 선우와 성향이 잘 맞는 친구와 짝을 지어서 놀이하게 해 주겠다고. 속상한 마음을 이해해주시고, 앞으로의 대응을 약속해주시는 단호하고도 따뜻한 말씀에, 특히 아이와 눈을 맞추고 천천히 또박또박 대신 사과해주시는 태도에 마음이 풀렸다. 선생님은 약속대로 선우와 잘 어울릴 것 같은 친구를 찾아주셨고, 그 아이와 베스트 프렌드가 되면서 점점 영국 어린이집 생활에 적응해갔다. 나중에 다른 한국 엄마들에게 들어보니 우리는 아주 운이 좋은 경우에 해당했다. 학교나 어린이집에 이야기해도 별다른 조치 없이 그냥 넘어가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어른들은 쉽게 말한다. 아이들은 적응이 빨라. 걱정 마, 어릴수록 금방 적응해. 하지만 경험해보니 아이들도 어른들처럼 낯선 곳에 적응하는 게 쉽지 않았다. 아니 어른들보다 더 힘들지도 모른다. 자기 의지로 온 것도 아니고, 상황 파악도 쉽지 않고, 자기감정을 설명할 언어도 발달하지 않았으니. 밤마다 펑펑 울고도 아침이 되면 기억 못 했던 그 당시 울음은 아이의 마음을 가장 잘 설명하는 언어가 아니었을까. 그 당시 선우는 말이 안 통하고 외로울 때 속으로 “하나님... 하나님... 엄마... 엄마...” 하고 불렀다고 했다. 어제는 여섯 번, 오늘은 다섯 번. 속으로 조용히 하나님과 엄마를 부르면서 버텨낸 시간이었다. 나 또한 기도하며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사랑해도, 아무리 소중해도 대신 져줄 수 없는 자신만의 짐이 있는 법. 그게 여섯 살 아이라 해도.…


  영국에 온 지 3년째, 이제 아이는 제 성품대로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밝게 지낸다. 영어를 하나도 못 하던 녀석이 이제는 종일 영어만 쓰고, 엄마·아빠 발음을 지적하기에 이르렀다. 어느 날 학교 문을 나서면서 슬며시 물어봤다.      


  “선우야, 너 널서리 다녔을 때 힘들었던 거 기억나?”

  “절대 못 잊지(I'll never forget it). 그때 영어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어.”     


  네버 포겟. 지금쯤 다 잊어버렸겠지 생각했는데, 예상치 못한 대답에 다시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 그 시간이 네 마음에 박혀있구나. 이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영어를 해야겠다고 생각했구나. 지금 영어만 쓰려고 하는 게 그래서였구나. 짠한 마음에 잡고 있던 손을 풀어 괜스레 머리를 여러 번 쓰다듬어 주었다.      


   우는 소리에 놀라 깨던 밤은 이제 지나갔지만 앞으로도 네 인생에서 눈물 삼키는 일이 얼마나 많을까. 꽃길만 깔아주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이나 그건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아픔과 상처도 인생의 일부분이고, 그 과정을 겪으며 성장하는 것이므로. 그러나 너를 외로이 홀로 두지는 않을 거라 되뇐다. 나 역시 자신 없는 영어지만 선생님에게 무작정 달려간 것처럼 언제든 네 편이 되어주겠다고. 일 인분의 자립을 해나갈 수 있는 어른이 될 때까지 네 옆에서 기도하며 응원하겠다고. 


  네 몫의 짐을 대신 질 수는 없다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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