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킷 22 댓글 2 공유 작가의 글을 SNS에 공유해보세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마침내 알게 된 혈액형

13년만에 쓰는 조산원 출산기

by 시에나 Mar 21. 2025


이번 겨울방학엔 숙원 사업이 있었다. 바로 아이들 혈액형 검사를 위해 보건소를 방문하기. 초등학생 두 아이의 혈액형을 아직도 모른다니 이상하게 여기실 분이 있을 것 같다. 나는 두 아이를 병원이 아닌 조산원에서 낳았다. 보통 병원에서는 출산 후 바로 신생아의 혈액형을 검사해서 알려주는데 조산원은 아니었다. 혈액형 이야기 나올 때마다 언젠가는 검사해 봐야지 하며 미루고 있었는데, 큰 아이가 관련 책을 읽다가 자기 혈액형이 뭔지 궁금하단다. 시간이 여유로운 이번 방학엔 꼭 검사를 해야지 마음먹었던 터였다.


주말을 앞둔 금요일 오전, 아이들과 집에서 가장 가까운 보건소로 향했다. 미리 전화해서 필요한 서류를 챙겨두었기에 금방 접수할 수 있었다. 혈액형 검사는 무척 간단했다. 손가락 끝에서 피를 한 방울 낸 다음, 준비된 시약에 떨어뜨리면 응집 여부를 판별하여 바로 결과가 나왔다.     


“둘 다 RH +O 이시네요.”

“그래요?”

“그럴 줄 알았어!”     


첫째는 왠지 O형일 것 같았다고 싱글거리고, 둘째는 아빠와 같은 B형일 줄 알았는데 아니어서 살짝 실망한 눈치다. 혈액형과 성격을 연관 짓는 건 이미 철 지난 유사 과학이지만 우리 집 초등들에겐 아직 통하나보다. 나는 둘 다 나와 같은 O형이라는 이야기에 괜히 반가웠다. O형이든, B형이든 내 자식임은 변함이 없는데, 이런 마음이 드는 것도 신기하다. 그깟 혈액형이 뭐라고.     


“근데 왜 우리는 이때까지 혈액형을 몰랐어요?”

“그건 말이야, 너희가 병원이 아닌 조산원에서 태어났기 때문이지. 조산원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이들에게 조산원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미 여러 번 반복해서 들은 이야기지만, 아이들은 즐겁게 들어준다. 이야기하면서 다시 소환되는 그날의 기억이 아스라이 떠오른다.      


브런치 글 이미지 1


임신 사실을 알고 난 뒤 나와 남편에게 중요한 고민은 “어디서 낳을까?” 였다. 에코 페미니즘과 자연주의 출산에 관한 책을 읽으며 출산과 육아는 여성의 삶에서 자연스러운 과정인데, 현대에 들어와서 의료의 영역에 포함되면서 과도하게 의료적 개입이 일어난다는 문제의식을 접하게 되었다. 무통 주사나 유도분만은 물론이고, 출산 시 소위 산모 굴욕 3종 세트라 불리는 관장, 제모, 회음부 절개 없이도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눈이 번쩍 뜨였다. 처음엔 의료적 개입은 최소화하고 자연주의 출산을 지향하는 병원을 알아보았다. 아무래도 응급상황에 대처하려면 의사가 상주하는 병원이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산모를 배려하는 쾌적한 시설도 좋아 보였다.


그런데 주로 강남에 위치해 있어 내가 사는 지역과 거리가 먼데다 무엇보다 비용이 비싸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원래 출산은 수천 년 수만 년 여성들이 해오던 일인데, 그것이 의료진에 손에 넘어가고, 이제는 자본에 좌지우지 된다는 게 탐탁지 않았다. 남편과 이야기를 나누며 경제적으로 부담되는 비용을 치르면서 하는 자연주의 출산은 자연스럽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때 다행히 살고 있는 집과 멀지 않은 지역에 있는 한 조산원을 알게 되었다.      




먼저 조산원에서 준비한 출산 준비 교육을 들었다. 조산원에 가서 직접 시설을 둘러보니 병원과 달리 내 집처럼 아늑한 게 마음에 들었다. 조산원에서는 막달까지 다니던 병원에서 필요한 검사를 받고, 검사지를 가져와서 특별한 이상이 없는 산모만 여기서 낳을 수 있다고 했다. 조산원 출산이라 하면 다들 무섭지 않냐고 물어보는데 나는 오히려 집 같이 편안한 분위기의 조산원, 경험이 많으신 조산사 선생님들을 뵙고 나니 마음이 놓였다. 꼭 여기서 낳고 싶다고 뱃속 아가에게 여러 번 부탁했다. 임신후기가 되었을 때 28주, 32주, 37주 이렇게 3번 다시 방문했다. 다행히 우려했던 빈혈 수치가 가까스로 정상이 되어 조산원에서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원장님의 허락이 떨어졌다.      


출산 예정일이 지났는데도 아이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몇 주째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살았다.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가 기름을 준비하고 등을 켜는 것처럼 청소도, 빨래도, 설거지도 절대 미루지 않으면서 매일 매일 기다렸다. 님은 언제 오시려나... 병원에서는 일주일이 지나면 태반이 노화되고, 양수가 줄어든다며 유도분만 날짜를 잡자고 하셨다. 내키지 않아 하루 이틀만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예정일을 1주일 넘긴 새벽, 드디어 기다리던 진통이 왔다. 조산원에 연락드리고 출발했다. 조산원에 도착하니 방을 하나 내주셨다. 여기다, 내가 아이를 낳고 조리할 방.      


조산원의 장점은 병원 침대에서 링거를 꽂고 누워서 한 자세로만 아픔을 견뎌야 하는 게 아니라 각자에게 편한 자세로 진통을 할 수 있다는 것. 처음에는 안고 서고 짐볼에 엎드리기도 하다가 우리에게 가장 편안한 자세를 찾았다. 내 경우는 남편에게 안락의자처럼 기댄 자세가 가장 안정감을 주었다. 진통은 처음에는 약하게 시작되지만 출산이 임박해질수록 강도와 빈도가 세진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아픈 게 아니고 파도가 밀려오듯 아픔이 밀려오다가 사라지는 구간이 있다. 그 틈을 이용해 남편과 둘이 간식도 먹고, 이야기도 나누고, 까무룩 쪽잠도 잤다. 그러다 진통이 밀려오면 둘이 부둥켜안고 밀려오는 진통을 견뎠다.      




새벽부터 시작된 진통이 어느새 늦은 오후로 접어들 무렵, 조용한 조산원에서 내 신음만 나지막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나른한 오후 햇살이 마지막으로 길게 드리우는데, 저 빛마저 사라지면 저녁이 된다는 게 문득 두렵게 느껴졌다. 이 고통은 언제 끝이 날까 가늠할 수 없어서 아득했다. 무통 주사를 맞았다면, 잠깐이라도 아프지 않다면 기운을 회복하고 다시 힘내서 진통할 수 있을 텐데... 조산사 선생님이 왔다 가셨지만 딱히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의료적 개입이 없다는 건 외부의 도움 역시 없다는 말이었다. 오롯이 우리의 힘으로 아이와 만나는 걸 의미했다. 처음으로 조산원에서 아이를 낳기로 한 결정이 무모했던 것인가 후회했다. 이런 걸 사서 고생이라고 하나?     


그때 머릿속에 임신 기간 내내 외우던 성경 한 구절이 떠올랐다.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 이사야 12장 1절에서 3절


임신 중에 큰 아이 이름으로 선재, 선율이 두 이름 중에 고민하고 있었다. 당시엔 아들이면 선재, 딸이면 선율이라고 하려고 했었다. 목사님이 우리 집에 심방 오셔서 나눠주신 본문이 이 이사야 말씀이었다. ‘주 여호와는 나의 노래’ 라는 구절을 보자마자 마음속에 “아, 이 아이의 이름은 선율이구나!” 하는 확신이 들었다. 그 이후로 임신 기간 내내 시시때때로 이 구절을 외우면서 이름대로 되기를 축복했다.  


극심한 진통 중에 이 말씀이 떠올라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라고 고백하는 순간, 첫 줄만 외웠을 뿐인데 갑자기 어찌나 눈물이 쏟아지던지 남편에게 안겨 엉엉 울었다. 많이 아프냐는 남편의 말에 목이 멘 채로 “아니, 감사해서. 너무너무 감사해서...”하고 답했다. 그런 나를 보는 남편의 눈에서도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문득 서른이 되던 날, 드렸던 기도가 생각났다. 앞으로 시작되는 삼십 대에는 냉담했던 이십 대처럼 살지 않게 해달라고, 열정을 다해서 주어진 삶을 사랑하게 해달라고 했었다. 이날 그 기도가 이루어진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내 마음에 단비가 내리는, 과연 내 인생에 빠질 수 없는 명장면이다.     


브런치 글 이미지 2


그때는 몰랐다. 그 후로 한참 뒤 자정이 되기 직전에 아이를 만날 수 있으리라고는. 아기 위치가 좋지 않아 허리로 진통하는 길고 긴 산고를 겪었으나, 다행히 나와 아이 모두 건강했다. 다시 말하지만 무통 없이 22시간 ‘쌩으로’(이건 ‘생으로’ 같은 느슨한 형용사로는 표현이 안 된다) 자연 진통은 정말 쉽지 않았다. 게다가 그 진통이 허리로 왔을 때 왜 죽음 같은 산고를 겪는다고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아이가 나오고 난 뒤 그 극심한 고통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해냈다는 기쁨과 성취감이 찾아왔다. 결국 끝이 있는 고통이었다. 오로지 나와 남편, 아가의 힘으로 우리가 만났을 때의 그 감격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그렇게 우리는 엄마 아빠가 되었다.      


이렇게 쓰고 보면 누군가는 자연출산 예찬론자라고 하겠지만 십여 년이 지난 지금 생각하면 딱히 그렇지도 않다. 임신 중에는 이것이 가장 중대한 문제처럼 보였지만, 육아로 산전수전을 겪은 지금은 어떻게 세상에 나왔든 건강하게 태어났으면 그걸로 된 거지 싶다. 산모에게 믿음직스러운 곳, 아이가 안전하게 세상에 나올 수 있는 곳이면 그 곳이 최선이라 생각한다. 나로서는 그 고생을 겪고도 둘째 때 다시 조산원을 찾은 걸 보면 긍정적인 경험이 더 컸던 것 같다. 물론 마지막엔 너무 아파서 창 너머로 보이는 대학병원을 가리키며 “나 저기 응급실에 데려다 줘... 더 이상 못 하겠어!” 애원하기도 했지만. 다행히 둘째는 큰 고생 없이 네 시간 만에 쓩 세상에 왔고, 양막에 고이 싸여 나오는 신기한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병원이라면 보통 양막을 찢는다고 하는데 조산원이니까 가능한 이벤트였다. 서양에서는 이렇게 태어난 아이를 ‘럭키 베이비’라고 하며 축하한다고 한다.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혈액형 검사 얘기에서 참 멀리도 왔다. 이제 혈액형도 알아버렸으니 “아, 조산원에서 낳아서요...”얘기를 꺼낼 수 있는 마지막 카드를 써버린 것 같아 살짝 아쉬운 마음도 든다. 그렇지만 내 머릿속에서는 혈액형 이야기를 들으면 조산원과 출산하던 날로 이어지는 자동 연상 반응은 계속되겠지. 도무지 냉담할 수 없었던, 뜨겁고 아프고 축축한 날로 또 다시 나를 데려갈 것 같다.


undefined
undefined
좌: 태리였던 선율, 우: 태양이었던 선우




매거진의 이전글 나의 반려 운동, 필라테스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