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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에나 Aug 13. 2021

우리들의 ‘어바웃 타임’

영국 콘월에서 보낸 2021년 여름휴가

  

  영국의 남서쪽 땅끝, 아름다운 풍광과 서핑을 즐기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여름 휴양지. 한국 사람들에게는 ‘영국의 제주도’라 불리는 곳. 내게는 영화 ‘어바웃 타임(About Time)'의 촬영지로 기억되는, 콘월(Cornwall). 런던에서 차로 6~7시간이 걸리는 외진 위치라 그간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지난 6월 G7 회의에 우리나라 대통령이 참석하면서 언론에 자주 보도되었다. 아직 겨울이 맹위를 떨치던 2월 말, 나는 여름 휴가지를 검색하고 있었다. 연중 가장 길게 여행을 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인 데다 이번이 영국에서 마지막 여름휴가라 여느 때보다 신중하게 여행지를 알아보았다.   

   

  “1주일이라 멀리 가려면 스코틀랜드 아니면 콘월인데... 스코틀랜드는 작년에 갔다 왔고 그럼 콘월이지.”     


  “그래, 그럼 지금 예약하자.”

     

  콘월에 가본 적이 있는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반응이 극명하게 갈렸다. 날씨가 좋을 때 간 사람들은 영국에서 가장 멋진 곳이라며 극찬했고, 날씨가 안 좋을 때 간 사람들은 최악의 휴가였다고 혹평했다. 관건은 날씨였다. 드디어 7월 말, 매일같이 콘월 날씨를 확인했다. 최고기온 19도에 주로 흐림, 간혹 구름 뒤에 햇살, 종일 비바람이 예고된 날도 있었다. 가뜩이나 올해 여름은 춥고 비가 많이 왔는데 여름휴가까지 두꺼운 옷에 비바람을 맞고 다녀야 한다니 한숨이 나왔다.    

 

 “이래서 영국 사람들이 그렇게 스페인, 그리스를 가는 거야.”      


  실망한 남편이 말했다. 미리 싸놓은 짐에서 수영복과 원피스를 뺀 대신 두꺼운 긴소매 옷과 방수 점퍼를 챙겨 넣었다. 2년 전 여름, 뜨거운 태양 아래 알맞은 온도로 데워져 놀기 좋았던 스페인 바닷가가 눈앞에 자꾸 어른거렸다.      


  7월의 마지막 날,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콘월을 향해 출발했다. 가는 중간에 오락가락하는 비를 보며 ‘그럼 그렇지.’ 아쉬움과 실망감으로 가득 찼다. 그런데 6시간이 지나 첫 번째 목적지인 틴타겔(Tintagel)에 도착하자마자 거짓말처럼 날씨가 바뀌었다. 찬란히 빛나는 햇살 아래 저 멀리 모습을 드러내는 틴타겔 성. 짙푸른 바다,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로 둘러싸인 절벽 위에 세워진 성이라니! 가히 아서왕의 전설이 시작될만한 곳이었다. 지금은 무너져 성의 일부만 남아있는데 그래서 더 신비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엑스칼리버 검을 들고 틴타겔을 지키는 아서왕 동상이 자리한 정상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니 막힌 곳 없이 하늘과 바다뿐인 광경에 가슴이 뻥 뚫렸다. 영국에서 여러 성을 다녀봤지만, 어디와도 다른 독특한 풍경에 연신 감탄이 나왔다. ‘아, 내가 이걸 보려고 여섯 시간을 달려온 거구나.’ 이곳 하나만으로도 콘월에 온 가치가 있다고, 내일부터 비바람이 쳐도 아깝지 않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콘월 여행, 일단 시작이 좋았다.    

 

  영국에서 마지막 여름휴가라 특별배려를 받은 것일까? 이후에도 날씨 요정의 호의는 계속되었고, 완벽하지는 않아도 여행하기엔 충분한 날씨가 이어졌다. 콘월은 다양한 매력으로 나를 사로잡았다. 일단 자연이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카리브해 부럽지 않은 에메랄드빛 바다, 서로 다른 매력의 골든 샌드 비치는 가는 곳마다 감탄을 자아냈다. 유서 깊은 역사적 장소, 박물관과 미술관도 잘 관리되어 있었다. 아무리 자연이 좋다 한들 일주일 내내 비슷한 풍경만 보면 단조로울 수 있는데 문화·예술·역사까지 배우고 향유할 수 있다니 이보다 더 좋은 여행지가 있을까. 일주일을 매일 다른 테마로 다녀도 지루하지 않았다. 콘월은 내게 종합 선물세트 같은 여행지였다.     


  게다가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딱 하루,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선물 같은 날이 주어졌다. 이런 날은 무조건 바다로 가야지! 해가 나도 수온이 낮은 영국 바다. 다들 어떻게 노나 했더니 해녀복 같은 웻수트(wetsuit)를 입어 체온을 유지한단다. 만만치 않은 가격이라 큰아이와 남편 것만 샀다. 도착하자마자 자기 몸만 한 서핑보드에 몸을 의지한 채 신나게 파도를 타는 아이. 모래 놀이만 해도 된다고 했던 둘째는 보다 못해 그냥 입던 옷 채로 바다에 뛰어들었다.      


  “이게 휴가지!”     


  “엄마, 내 평생 최고의 여름휴가예요!     


  환호성을 지르며 즐거워하는 남편과 첫째를 보며, 둘째와 오래 모래성을 쌓았다. 아직 모래 놀이에 진심인 만 여섯 살, 단단하게 성을 쌓아야 한다며 바닷물을 나르느라 팔랑팔랑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아, 지금이 우리에겐 제일 좋은 순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세상 근심 없이 노는데 집중하는 아이들, 그걸 흐뭇하게 바라보는 부모일 수 있다는 것이.   

  

 내 인생 영화 ‘어바웃 타임’에서 주인공 팀(Tim)은 아버지와 영원한 이별을 앞두고 마지막 시간여행을 떠난다. 과거로 돌아가 탁구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 두 사람, 팀은 마지막으로 볼에 입을 맞추며 작별 인사를 건넨다.      


“My son..."      


"My dad..."      


  입은 웃고 있으나 어쩔 수 없이 물기 어린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보던 아버지와 아들. 아버지의 마지막 소원은 팀의 유년 시절 바닷가로 잠시 돌아가는 것. 두 사람은 어두운 방으로 들어가 눈을 감고 두 주먹을 꼭 쥔 채 함께 시간여행을 떠난다. 인적이 드문 한적한 바닷가에서 같이 걷고 달리며 어린 시절 추억을 되살려보는 두 사람. 카메라는 파도를 바라보는 부자(父子)의 뒷모습을 롱 테이크로 담아낸다. 영화에서 가장 애틋하게 아름다운 장면이다. 이제 그 영화에 우리의 추억도 덧입혀졌다.  

    

  기쁘고 행복한 순간보다 지루하고 고된 일상을 견디는 게 우리네 삶이라는 걸 안다. 일상에 지친 어느 날, 나도 팀처럼 두 주먹을 꼭 쥔 채 눈을 감고 시간여행을 떠나봐야지. 그때 눈이 시리도록 푸른 콘월의 바다와 젊고 행복했던 우리 추억이 떠올랐으면. 그럼 ‘그때 참 좋았지. 그런 날 또 올 거야.’ 스스로 다독이며 다시 씩씩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 잊지 못할 추억을 선사해준 2021년 여름이 저물고 있다.                



좌우: 아서왕 전설의 시작, 틴타겔(Tintagel)


좌: 내셔널 트러스트로 관리되는 가드레비(Godrevy) 우: 선물 같은 하루를 보낸 그위디언 비치(Gwithian Beach)


좌: 절벽 위 야외극장 미낙씨어터(Minack Theatre) 우: 영국의 땅끝마을 랜즈엔드(Land’s End)


Photo by Woojung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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