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에나 Jan 26. 2023

모두를 위한 화장실

가장 사적인 공간이자 정치적인 공간인 화장실 담론

   

  웬만하면 집 밖에서는 화장실을 잘 가지 않는다. 슬쩍 봐서 깨끗한 화장실이 아니라면 차라리 참는 편을 택한다. 아무리 맛있다고 소문난 집이라도 화장실이 내 기준에 만족스럽지 않으면 두 번 다시 가는 일은 없다. 워낙 비위가 약한 편이라 임신했을 때는 심한 입덧으로 공중화장실 근처만 가도 웩웩거리곤 했다. 내가 가장 꺼리는 곳은 야외 공원 화장실. 많은 사람이 이용해 쉽게 더러워지는 데다 상대적으로 관리도 잘되지 않아 벌레와 악취가 동반될 때가 많다. 그럴 때면 물을 최소한으로 마시며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틴다. 그러다 겨우 내 집 화장실에 돌아오면 내적 안도감으로 마음이 가득 찬다. 아오, 이제 살았다!     


  여성학을 공부하면서 트랜스젠더들이 겪는 화장실 고충을 알게 되었다. 2014년 국가인권위원회의 '성적지향·성별 정체성에 따른 차별 실태조사'에 따르면 트랜스젠더 응답자의 44.2%가 공중화장실 이용 시 불쾌한 시선, 모욕적 발언 등의 차별을 경험했다고 한다. 응답자의 5.1%는 물리적 폭력을 당했다고 답했다. 최근 5년 내 공중화장실 이용을 포기한 경험이 있는 비율도 67.6%에 달했다. 그렇다 보니 외출 시 최대한 화장실을 가지 않고 참다가 방광염, 요로감염 등 각종 비뇨기과 질환에 시달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화장실 문제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는 육체질환뿐 아니라 우울증 등 정신건강에도 영향을 주었다. 직장을 구할 때도 마음 편하게 갈 수 있는 화장실이 있는지부터 찾아본다고 하니 직업 선택에도 제한이 있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나 역시 화장실에 민감한 사람으로서 그들의 고충에 대해 공감할 수 있었다.      


  책에서만 접했던 성 중립 화장실을 영국에 가서 처음 보았다. 런던에서 가장 좋아하던 장소인 테이트 모던 미술관에는 기존의 성별 분리 화장실과 함께 모든 성별 화장실(All Gender Toilet)이 마련되어 있었다. 기존 여성 화장실처럼 개별적인 칸으로 나뉘어 독립성을 보장받을 수 있게 설계되어 있었다. 테이트 브리튼 미술관에는 치마를 입은 사람과 바지를 입은 사람이 나란히 그려져 있는 픽토그램 옆에 휠체어에 탄 사람과 기저귀를 찬 아이까지 함께 그려진 모든 성별 화장실이 있었다. 그 외에도 영국 극장, 대학, 병원, 공항, 지하철역, 스포츠 시설, 식당 등 다양한 장소에서 성 중립 화장실을 찾아볼 수 있었다. 처음엔 낯설었지만 이내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됐다. 성별 이분법을 넘어 소수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화장실이 곳곳에 있다는 게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상에 자연스레 스며들어있는 인권 의식에 감탄을 넘어 부러움마저 느껴졌다.     


  한국에서 성 중립 화장실에 대한 극심한 반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특히 여성들의 반대가 심한 것으로 안다. 대한민국 여성으로서, 특히 화장실에 민감한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 나는 그 두려움을 이해한다. 우리에겐 밤늦은 시간 호프집의 남녀 공용 화장실에 대한 음습하고 불쾌한 경험이 있다. 게다가 만연한 불법 촬영 범죄와 공중화장실에서 일어난 여성 살해 사건을 분노와 슬픔 속에 기억하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 더럽고 안전하지 않은 공중화장실 사용을 기피하는 여성들의 불안감은 무시될만한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안전하고 청결한 화장실을 이용할 권리, 한국에서는 어떻게 가능할까?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2022년 3월 성공회대학교에서 한국 대학 최초로 성 중립 화장실이 문을 열었다는 보도를 보았다. 이 화장실은 성소수자뿐 아니라 보호자가 필요한 유아나 어르신, 성별이 다른 활동지원사의 도움을 받는 장애인들, 생리컵을 쓰는 여성도 이용할 수 있도록 넓고 편리하게 만들어졌단다. 즉 단순히 성별만이 아니라 성정체성, 장애, 연령 유무와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화장실이다. 그래서 지은 이름은 ‘모두를 위한 화장실’ 줄여서 ‘모장실’이라고 부른다. 1인 화장실이라 프라이버시 걱정을 할 필요가 없지만 그래도 모장실이 불편한 사람은 기존 성별 분리 화장실을 이용하면 된다. 누군가의 권리를 빼앗지 않고 서로 공존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있는 통찰력을 제공해 준 훌륭한 사례라고 생각한다. 공약부터 설치까지 무려 5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총학생회에서 의지를 가지고 학교 본부와 학내 구성원을 설득해 합의를 이루어낸 성과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The Personal is the Political.).” 페미니즘에서 가장 중요한 명제이다. 한낱 개인적인 것처럼 보이는 경험도 페미니즘의 렌즈를 끼고 보면 중요한 사회적 의제가 될 수 있다. 하루에도 여러 번 드나드는 화장실은 가장 사적인 공간이지만 동시에 가장 정치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누군가에겐 당연하게 허용되는 공간이 다른 이들에게는 매일 마주치는 벽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누구나 안전하고 깨끗한 화장실을 원한다. 누구도 불편하거나 배제하지 않는 화장실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 당연한 권리를 장애인들도, 유아들도, 어린아이를 동반한 부모들도, 성소수자들도 함께 누릴 수 있으면 좋겠다.         

  

참고 자료     

https://www.hani.co.kr/arti/society/rights/1005308.html     

https://m.hankookilbo.com/News/Read/A2022080911010000296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035110.html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들의 ‘어바웃 타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