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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에나 Jan 26. 2023

월경 빈곤을 끝내는 길은

아미카 조지의 월경 해방 캠페인

  

  2020년 11월 BBC를 훑어보다가 모처럼 마음이 흡족한 뉴스를 만났다. 스코틀랜드에서는 누구나 생리대나 탐폰 같은 월경 용품을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법안이 통과되었단다. 그것도 스코틀랜드 의회의 만장일치 동의라니. 30년 가까이 꾸준히 월경을 하면서도 ‘내돈내산’ 외에 다른 대안을 상상해 본 적 없는 나에게는 놀라운 소식이었다. 나는 처음 듣지만 스코틀랜드 여성들에게는 낯설지 않은 모양이다. 이미 2018년부터 중·고등학교, 대학에 월경용품이 상시 비치되었고, 이제 이 법안으로 인해 청소년 센터, 보건소, 도서관 같은 공공기관, 약국까지 확대된다고 한다. 2019년 이 법을 최초 발의한 모니카 레넌 의원이 환영의 뜻을 밝히며 트위터에 썼다는 문장도 인상적이었다.      


  Scotland might be “the first
but won’t be the last” country
to provide free period products.

스코틀랜드는 월경 용품을 무상으로 지급하는
첫 번째 나라지만 마지막 나라는 아닐 것이다.

     

  기사를 읽으며 월경 빈곤(period poverty)이라는 단어에 눈길이 머물렀다. 생소한 개념이라 찾아보니 2017년 영국 런던에서 아미카 조지(Amika Sara George)라는 17세 학생이 시작한 캠페인이라고 한다. 아미카는 아침 식사 시간에 시리얼을 먹다가 한 해 13만 명이 넘는 영국 여학생이 생리대를 사지 못해 결석한다는 보도를 접했다. 자그마치 14세부터 21세까지 영국 여성 열 명 중 한 명꼴로 빈번하게 일어나는 문제다. 그녀는 하루만 학교를 빠져도 수업 진도를 따라가기가 어려운데 생리대가 없어서 한 달에 일주일씩 학교를 못 가는 학생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아미카는 월경 빈곤을 가난한 여성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가 마땅히 보장해야 하는 학습권 침해로 치환시켰다. 그녀의 캠페인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어낸 이유다. 그러고 보니 월경 빈곤은 여성 인권, 건강권, 학습권이 모두 얽혀있는 문제였다.       

   아미카 조지는 즉각 SNS에 #FreePeriods(월경해방)라는 해시태그를 달아 의제를 공유하기 시작했다. 수없이 많은 사람으로부터 이메일과 트윗, 개인 메시지 등 응원과 지지가 쏟아졌다. 월경 용품 무상 지원을 촉구하는 국민 청원에 18만 명이 동의했고, 같은 해 12월 2,000여 명의 인파가 총리공관이 있는 다우닝 10번가에 모여 시위를 벌였다. 한 사람의 문제 제기에 공감한 공동체가 전적으로 응답한 것이다. 그 결과 영국 정부는 2019년 9월부터 중・고등학교와 대학교에 월경 용품을 무상으로 비치하기로 했고(초등학교는 아직이다), 스코틀랜드 자치정부는 더 나아가 2020년 소득 수준이나 연령에 관계없이 모든 여성을 대상으로 한 월경 용품 무상 지원 시대를 열었다.     


  캠페인을 시작한 지 몇 년 지나지 않아 괄목할만한 변화를 끌어냈으니 과정도 순탄했나 싶지만 분명 어려운 순간도 있었다. 지역 의원을 만나 논의할 때 “의회에서 탐폰 같은 얘기를 하고 싶지 않다”며 핀잔을 듣기도 했고, “저녁 먹는 시간에 왜 생리에 관한 트윗을 하느냐? 불쾌하다” “생리대가 없어서 학교에 결석하는 아이들이 아이폰은 쓰더라” “부모들이 담배나 술을 사는데 돈을 몽땅 써버려서 생리대 살 돈이 없는 것”이라는 키보드 워리어들의 원색적인 비난도 받았다. 그런 차가운 반응에 상처받기도 했지만, 그보다 많은 사람의 뜨거운 지지로 결국 목표한 변화를 만들어냈다.


  이 대목에서 한국의 ‘깔창 생리대’ 보도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홀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열악한 경제 사정 탓에 차마 생리대를 사달라는 말을 못 하고 신발 깔창으로 대신한 소녀의 사연이 전파를 탔을 때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이 충격을 받았다. 한국에서도 침묵 대신 이 문제에 뛰어든 사람들이 있었다. 먼저 서울시 여성가족정책실이 팔을 걷어붙였다. 저소득층 여성 청소년에게 유기농 일회용 생리대를 거주지로 직접 배송하고 돌봄 사각지대의 청소년을 위해 지정시설에 생리대 비치를 시작했다. 이 사업은 이후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현재 바우처 형태로 생리대를 지원하고 있다. 또한 2022년 기준 서울시 293개 공공기관에 비상용 생리대가 설치되었다. 그런 노력을 인정받아 서울시는 2019년 UN 공공행정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한국은 생리 빈곤을 종식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을까? 그렇다. 그러나 여전히 갈 길은 멀다. 한국은 OECD 국가 중 월경 용품이 가장 비싼 나라고, 평균적으로 한 달에 25,000원 정도를 지출한다고 할 때 지원금 13,000원은 필요금액의 반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공공 생리대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면 공무원들은 과잉복지, 포퓰리즘, 예산 부족을 내세우며 난색을 표하기 일쑤다. ‘비상용’ 생리대 지급, ‘저소득층’ 생리대 지원 이상의 보편적 복지로 나가지 못한다. 결국 자신의 가난을 증명해야만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구조에 머무를 뿐이다.      


  아미카 조지가 SNS에 의제를 던졌을 때 뜨겁게 응답하는 공동체, 시민사회가 우리에게 있는가. 젠더갈등이 심화되는 우리 사회에서 역차별 운운하며 “무상 생리대 지급할 거면 무상 면도기도 지급하라!” 비아냥거리는 댓글을 보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친구들에게 가난을 들키는 게 죽기보다 싫은 십 대 여성들, 복잡해 보이는 행정절차에 지레 바우처 신청을 포기한 그녀들은 아직도 키친타월, 휴지 뭉치, 헌 양말 등으로 막거나 생리대 착용 시간을 늘리면서 그저 ‘그날’이 빨리 지나기만을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미카의 제안을 폭발적으로 지지해 주는 시민사회가 없었다면 지금의 영국, 스코틀랜드의 정책은 존재할 수 있었을까. 결국 그 사회의 변화를 추동하는 힘은 시민들에게서 나온다. 질문은 다시 돌아온다. 우리에게 그 외침을 받아 안을 공동체가 있는가.


  누구나 쉽게 가져갈 수 있도록 칸칸이 쌓여있는 생리대와 탐폰, 크기와 브랜드도 다양하게 구비되어 있는 영국 학교 사진을 보며 어쩔 수 없는 부러움을 느낀다. 우리나라 초, 중, 고, 대학교 화장실에도 이런 장면을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저소득층뿐 아니라 모든 여성 청소년에게 월경 용품 보편 지급을 결정했다는 뉴스 헤드라인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더 이상 생리대가 없어 집에 갇혀 비참함을 느끼는 사람이 없도록. 이건 성평등뿐 아니라 인간의 존엄(dignity)에 관한 문제니까.           



참고 기사     

https://www.theguardian.com/world/2022/jan/13/i-started-campaigning-before-i-could-even-vote-amika-george-on- period-poverty-politics-and-the-power-of-protest      


https://www.bustle.com/p/amika-george-on-period-poverty-beating-trolls-fighting-gender-inequality-on-a-global-scale-11995993     


https://news.seoul.go.kr/gov/archives/537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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